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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성식 Aug 27. 2024

우리의 사각을 메꿔줄 기억의 지속(2)

미술품 경매사 던의 이야기(7)

작가의 말 : 어떤 종교인지 기억이 나지 않지만 모든 것은 형태를 달리하며 순환한다,라는 하나의 사상을 본 기억이 있습니다. 불교였던 것 같습니다.



던의 집 근처의 세븐편의점에서 맥스 캔커피를 사 집에 들어왔다. 조그마한 침대 옆에 놓인 캔버스에는 파이프 담배가 그려져 있지만 아직 색옷은 덮여 있지 않았다. 침대와 달라붙어 놓인 더 자그마한 이케미 책상에는 각종 붓과 물감들이 놓여있고 책상 위의 벽에는 인화된 모작들의 사진이 촘촘히 포스트 되어있다. 다빈치로 시작해 고흐를 거쳐 폴록까지 알만한 화가들의 작품은 전부 35mm의 필름에 담겨 있지만, 일부러 캔버스에서 느껴지는 화가를 꼽자면 역시 달리다. 던의 방 안에는 창문뿐 아니라 의자도 없다. 캔버스를 거치하기 위한 이젤 탓이다. 침대에 걸터앉으며 캔커피의 뚜껑을 따다 생각지 못한 흔들림에 내용물이 흰 옷에 튀었다. 작품에 튀지 않아 다행이라 생각하며, 캔커피의 가벼운 달콤함과 그다지 깊지 않은 향이 스며든 파이프를 떠올려 보았다. 그리고는 나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며 손을 뻗어 책상 위의 따뜻함과 동시에 어두운 분위기를 자아내는 번트 엄버 색의 아크릴 물감을 집어 팔레트에 짰다. 그리고는 전시회의 남자를 생각한다.


매일 같이 공사판 차림에 구두를 신고 같은 자리에서 작품을 지긋이 들여다보는 남자. 그 남자는 분명 자신의  작품이 무언가를 놓치고 있다고 말했다. '무언가를 놓치고 있다' 틀림없이 자신의 눈을 보고, 자신 외에 아무도 없는 공간에서 35mm의 필름 카메라를 목에 멘 자신에게 직접적으로 건넨 말이다. 처음부터 자신이 그림을 그리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던 것일까. 창문 하나 없는 방 안에서 이루어지는 자그마한 창작 행위를 어떤 경로로 알게 되었을까. 남자가 작품 속에서 격렬히 찾고 있던 것과 일말의 연관이 있는 것일까. 던은 아무도 없는 방 안에서 캔커피를 입에 가져다 대며 괜히 주위를 둘러본다. 캔을 기울여 차가운 목 넘김을 느낀다. 기억 속의 남자는 의미심장한 말을 뒤로하고 다시 작품을 바라본다. 살바도르 달리의 기억의 지속. 던은 자신의 그림과 남자가 바라보는 그림 속의 시계에 일종이 연결이 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느낌이 들었다. 던은 다시 손을 뻗어 문가의 스위치를 딸깍 눌러 조명을 껐다. 문 틈으로 들어오는 빛조차 없는 완벽한 어둠 속의 공간이다. 문 쪽을 바라보고 있어도 문과의 거리를 가늠할 수 없고 그쪽으로 걸어도 문을 만나게 될 거라는 확신도 들지 않았다. 맥스 캔커피와 마주 보고 있을 캔버스 속의 파이프담배와의 거리 또한 마찬가지다. 감각에만 의존해 팔레트 위의 붓을 들어 물감을 찍고 캔버스로 손을 뻗는다. 깊이를 알 수 없는 심해에 홀로 떠 있는 느낌이기에 무엇을 만나도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보이지 않는 윤곽을 넘지 않게 조심스럽고 세심하게 붓질을 시작한다. 뒤에서 누군가가 묵묵히 자신의 소리에 의존해 헤엄치며 따라오고 있다. 자신과 어둠에 휩싸인 남자는 어디를 향하고 있는 것인가.


침대에 흡수되지 못하는 진동과 함께 파이프담배가 환하게 빛났다. 휴대폰에서 나온 빛이 캔버스만을 비추고 있다. 모르는 번호로 걸려온 전화였다.


"여보세요?" 던이 조심스레 휴대전화를 집어 들며 말했다.


"오랜만이네" 끝음을 살짝 올린 건너편의 가녀린 여성의 음성이 들려왔다.


노아, 보육원에서 자신을 따르던 동생이다. "어떻게?" 던의 손이 떨린다.


"자연스레, 우린 또 만나게 될 거야. 도망치려 해도 소용없어. 언제까지고 말이야"


말이 되지 않는다. 아니, 설명이 되지 않는다라는 표현이 더 적합할 것이다. 혼란스러운 마음을 가까스로 달래며 떨리는 붓을 팔레트에 내려놓았다. 손의 떨림 탓인지 번트 앰버는 파이프담배의 윤관을 넘어 배경의 일부를 물들였고 던이 무어라 말을 더 잇기 전에 전화는 끊겨버렸다. 아마 꿈일지도 모른다. 이미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사람에게 전화가 걸려오는 일은 꿈이 아니라면 도저히 설명할 방식이 없기 때문이다. 일방적인 전화가 끊기며 다시 방 안을 조용한 어둠이 채웠다. 손을 더듬어 캔커피를 찾아보려 했지만 아무것도 손에 집히지 않았다. 불을 다시 키려 해도 소용없다. 이 어둠 속에서 거리는 시간과 함께 이미 의미를 잃었기 때문에.



던은 눈을 뜨고 서야 자신이 잠에 들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미 시원함을 잃은 캔커피는 책상 위에 올려져 있었고 캔버스 속의 파이프 담배도 여전히 캔커피를 마주 보고 있었다. 무언가 떠올라 어젯밤의 희미한 기억을 더듬으며 휴대전화의 통화목록을 급히 눌렀다. 역시 꿈이었는지 모르는 번호로 온 수신 기록은 이미 디지털 공간에 남아있지 않았다.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35mm의 필름 카메라를 목에 걸고 나갈 채비를 하는 중 캔버스의 어두운 갈색이 눈에 들어왔다. 색이 형체의 윤곽을 삐져나와 있다. 피로감이 누적된 탓일까, 초보적인 실수를 금세 잊어버리기라도 하려는 듯 던을 문을 벌컥 열고 반구형의 전시회로 발걸음을 옮겼다.


예술의 거리에는 다양한 가게와 들어서 있다. 아기자기한 소품을 파는 유리공예점부터 중고 악기점, 그리고 점집까지. 공통된 속성을 찾아보기는 힘들지만 거리의 모두가 약속이라도 한 듯 평범한 샐러리맨이 오전 업무를 마치고 간단한 점심을 먹을 때쯤이 돼서야 문을 연다. 한쪽이 강물을 퍼 올리고 나서야 다른 한쪽이 강물을 향하는 카누의 패들처럼. 거리는 시계의 시침과 분침이 중천에 떠오른 해를 보며 만나는 시각을 기준으로 평범한 일상에서 바통을 이어받는다. 젊고 게으른 몽상가들이 모여있기 때문인가, 하고 던은 생각했다. 사진을 담고 집을 돌아가며 마주치는 사람들 대부분이 어리다. 던에게 정확한 나이를 가늠할만한 깊은 경험이나 연륜은 없지만 굳이 그러한 사례들이 없더라도 한눈에 알 수 있다. 몽상가들은 끊임없이 거리로 들어서지만 일상을 살아가는 보통의 사회인들의 발걸음은 점점 끊기고 있다. 희망을 품고 이곳에 찾아오는 9할 이상의 젊은 예술가들은 대게 2년이 되지 않아 현실을 깨닫고 거리를 떠난다. 나머지의 무작위의 선택에서 살아남은 소수만이 평범함에 영향을 끼치는 별이 되어 거리를 떠난다. 어찌 됐건 떠나게 된다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던도 스스로 자각하고 있다. 아까운 젊음을 몽땅 창작에 쏟는 이유도 그 탓이다. 번트 엄버 색은  물감이 짜인 팔레트를 떠올리고 전시회를 떠올린다. 무언가를 골똘히 찾는 구두의 남자가 뒤따라온다. 노아의 부드러운 입술의 감촉이 희미하게 입가를 스쳤다가 이내 사라져 버린다.


그녀는 이미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언젠가 만나게 될 일도, 그녀의 입술의 감촉을 다시 한번 느낄 수 있을 리도 없다. 설령 살아있다 해도 마찬가지, 보육원의 그들을 버리고 떠나온 시점부터 던은 자격을 상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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