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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성식 Aug 27. 2024

각자의 밤이 찾아오면

미술품 경매사 던의 이야기(6)

작가의 말 : 저도 제 마음을 잘 모르겠네요.



도착했어요,라고 말하는 던의 말에 메이는 회상에서 돌아와 앞을 바라보았다. 던의 말 그대로 하나의 벽이었다. 키 큰 수목들은 형식상으로만 존재하는 듯했다. 일종의 벽이라는 사실을 숨기려는 듯 그 뒤에는 오로지 끝없는 어둠만이 보일 뿐이었다. 존재할리 없는 깊이 모를 심해가 벽 뒤로 고여있기에 무엇을 만나게 돼도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분명 던은 '그림을 그리고 싶은 생각이 들면' 이 장소에 어김없이 찾아온다고 말했었다. 어떠한 충동을 억제하는 원리가 이곳에 숨겨있다고는 생각되지는 않지만 이 벽을 넘어 만나게 될 무언가는 던뿐만 자신에게도 새로운 방식을 제공할 무언가가 있다. 그런 존재할지 모르는 가능성에 메이가 먼저 경계의 저편으로 발을 들였다. 던도 메이를 따라 발을 들인다. 


비투과의 검은 구체 안에 들어온 듯 어딜 보나 온통 새까맣다. 뒤를 돌아보았지만 있어야 할 베를레인의 건물과 넓게 펼쳐진 녹색밭은 보이지 않았다. 공간감각을 느낄 수 없는 그러한 공간이다. 손목의 카시오시계를 차고 있다는 착용감만 있을 뿐, 시곗바늘이 가리키는 숫자를 확인할 수 없기에 시간감각 또한 차츰 희미해질 것이다. 다시 뒤를 돌아왔던 길을 그대로 돌아 걸어간다 해도 빠져나갈 수 있을지 의문이 들며 알 수 없는 공포감이 들었다. 새삼스레 시각의 중요성이 느껴진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으니 아마 아래에 깔려있을 검게 물든 흙과 잎의 향 또한 나지 않는 듯했다. 희미한 던의 발자국 소리를 따라 걸어갈 뿐이다. 묵묵히 자리를 지키는 기둥과 같은 나무에 부딪히지는 않을까 걱정되었지만 기우였던 것일까. 구체 안에서 형체를 유지하는 모든 것들이 자신들을 피해 가는 것일까. 그렇다면 그들은 어떠한 의지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 된다. 메이는 메마른 감정으로 팔아넘긴 포테를 떠올린다. 그녀 또한 이런 심연에 갇혀 끊임없이 누군가를 원망하며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원망의 대상은 자신인가 혹은 위약금을 떠넘긴 남편일까.


던은 항상 그래왔듯 눈을 질끈 감은 채 온전하게 갇힌 빛을 받으며 사다리 위의 오두막을 상상하며 어둠보다 더 깊은 어둠을 헤치며 걸어갔다. 닫힌 눈 안에 그려진 오두막이 점점 사라진다. 


"메이씨 잘 따라오고 있죠?" 던이 걱정스러운 듯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물론 안 보이겠지만.


"잘 따라가고 있어."


"원래 제 꿈이 화가였던 거 알고 계셨어요?" 


"뭐, 어렴풋이는 알고 있었지" 메이가 대답했다.


"세상을 놀라게 할 작품을 만들고 싶다. 예술 작품을 창작하는 모든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꿈이겠죠. 저 또한 그랬고요."


"그쪽 세계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꿈은 크게 가지면 좋은 법이지. 지금은 아닌 것처럼 들리는데 내 착각인가?" 메이는 던에 발자국 소리에 더욱 주의를 기울이며 대답하는 동시에 경매품을 보는 던의 눈동자를 떠올렸다. 무엇을 표현했는지도 모르고 언뜻 보며 낙서처럼 보이는 작품들을 몇 억 전후로 낙찰시키며 던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만한 가격에 낙찰시켰다는 것은 그만한 가치가 있다고 판단했겠지. 자신을 미지의 어딘가로 이끄는 베를레인의 경매사는 아마 낙찰가를 정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기술이라는 표현이 더 적합하겠지만. 같은 그림을 보아도 다른 곳을 보고 있는 것인지, 메이 자신은 아무리 생각해도 그런 그림들이 보통 사람들이라면 평생 쥐기도 힘든 금액으로 팔린다는 사실이 놀라울 뿐이다. 하지만 입 밖으로 내지는 않는다.    


"예술가가 되려면 상상도 못 할 돈이 든다는 사실을 알게 된 건 이미 예술작품에 흠뻑 빠져버린 후였어요. 한 번 빠져버리면 어쩔 수 없다는 것도 말이죠. 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이었어요. 그다지 많은 경험을 하며 살아오지 않은 어린 나이였지만 앞으로 이만큼 저를 설레게 할 또 다른 무언가를 찾을 수 없게 되는 것이 아닐까, 하고 매진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함과 동시에 있으나 마나 한 보육원을 나와 예술의 거리의 한 구석에 방을 잡았어요. 외부와 이어주는 오래된 창하나 없는 방이었지만 그림에 집중하기에 은 좋은 환경이었어요. 어떻게든 완성되면 알아보는 누군가는 반드시 생기기 마련이다. 딱 한 명만, 제 작품을 알아줄 단 한 명이라도 생긴다면 되겠지. 


이젤과 캔버스, 팔레트와 아크릴 물감, 붓만 보아도 일말의 희망이 마구 샘솟았아요. 눈을 뜨면 35mm 필름카메라를 목에 걸고 집 근처의 전시 공간에 가 모든 작품을 필름에 담고 집에 가 분석을 했죠. 점심이 지나고 배고 고파질 쯤이면 캔커피와 함께 붓질을 시작했습니다." 던은 잠시 말을 멈추고 반구형의 전시회장을 떠올렸다.


찌그러진 탁구공을 반으로 잘라 그대로 엎은듯한 반구형의 전시회장에 들어서니 어둑한 노란 톤의 조명이 모든 내부를 물들이고 있었다. 이 시간대에 검노랑 전시회장에 오는 사람은 그 남자를 빼면 던이 유일다. 내부는 여러 원형 시멘트기둥이 무질서하게 세워져 있었고 각 기둥에 매일 교체되는 여러 모작들이 걸려 있다. 모작인지 원본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던에게 있어 사실적인 작품들은 영감의 원천이나 팔짱을 끼고 지긋이 감상할만한 대상이 아니기에. 단지 자신의 완성물을 위한 분석 재료일 뿐이었다. 그 남자는 그렇게 작품을 보고 있었다. 팔짱을 끼고 지긋이, 작가가 작품 속에 숨겨놓은 것을 찾으려는 것처럼. 나이대는 30대 후반 정도로 보인다. 주머니가 여러 개 달린 회색 조끼와 해진 바지, 그리고 그러한 공사현장 차림에 어울리지 않는 구두는 던의 시선을 끌기에 충분했다. 짧은 머리에 비교적 진한 눈썹, 그다지 미남이라고는 볼 수 없지만 야윈 얼굴에 상대적으로 큰 눈은 홍콩계 영화의 주연 배우를 연상시킨다. 가만히 서 기둥을 바라보는 남자의 자세는 차분했지만 눈빛만큼은 격렬했다.   


던은 이 기둥에서 저 기둥을 빠르게 옮겨 다니며 필름카메라에 작품을 담았다. 보통 남자는 강화유리 입구에서 가장 가까운 기둥의 작품을 바라보았기에 그 작품만은 분석의 재료로써 담지 못했다. 일종의 의식 같은 던의 작업은 5분에서 10분 사이면 끝났는데, 예술품 하나를 감상하기에는 차고 넘칠 시간이었다. 하지만 남자는 묵묵히 자신의 자리를 지켰다. 무언가를 찾고 있는 것처럼. 눈을 격렬하게 치켜드고 말이다. 던은 언젠가 걸릴 자신의 미완성의 캔버스를 떠올렸다. 어쩌면 이 전시장에 걸릴 날이 올지도 모른다. 첫 기둥에 걸려있다면, 이 남자는 무엇을 찾고 있을까. 어디까지나 가정의 이야기다. 만일 자신의 작품을 알아봐 주는 사람이 생긴다면, 그 처음은 이 남자였으면 좋겠다, 하고 막연히 생각하며 전시회장을 나왔다. 어디선가 마주한 느낌이 드는 벽과 같은 기둥들이 널린 전시회장을 던은 필름카레라를 목에 건 채 나왔다.  


그 남자와 처음 대화를 나눈 것은 미끼 없는 낚싯줄의 보육원으로부터의 독립 후 첫 작품이 완성될 즈음이었다. 적절한 색채를 찾아 입혀주기만 하면 끝나는 그림이다. 캔버스 안에는 3개월 동안 인화된 필름카메라의 모작들과 던의 구체화된 열정이 파이프담배의 형상으로 담겨 있었다. 언제든지 기관차의 증기처럼 뿜어져 가느다란 연기가 나올 듯이 위태로운 질감의 파이프 담배는 달리의 형식 안에 그려져 있다.


여느 날과 같이 35mm의 카메라 안에 80여 점의 작품을 담고 나가려는 순간이었다. 


"이봐 젊은이, 왜 내가 바라보는 작품은 찍지 않는 거지?" 나지막한 음성으로 그 남자가 말을 걸어왔다. 


자신에게 하는 말임을 인식하기까지 수초의 시간이 걸렸다. 이 반구형의 공간에는 오로지 그 남자와 던뿐이다. 달리 말을 걸 상대는 없다는 것을 인지하고 다시 전의 물음을 떠올렸다. '왜 내가 바라보는 작품은 찍지 않는 거지'


그야 남자가 묵묵히 자리를 지켜 작품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다. 목을 살짝 빼고 무언가를 찾는 듯이, 항상 같은 차림과 이질적인 광택의 구두를 신고. 옆에 조용히 다가가 카메라에 담는 것만으로 그의 탐구를 방해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던은 35mm 필름카메라 끈을 목에 걸고 대답했다.


"아무래도 방해하고 싶지 않아서였습니다. 항상 같은 자리에서 작품을 바라보고 계셨으니까요." 주변에 일종의 보이지 않는 결계가 쳐져 있어 허가 없이 들어갈 수 없다는 말이 목구멍가지 차올랐지만 실례라 생각해 가까스로 참았다. 


남자가 천천히 던을 향해 돌아보았다. 노란 조명을 반사하는 구두가 지면에 닿는 소리가 전시회장을 채웠다. 정면에서 남자를 본 것은 처음이지만 역시나 이 공간과 마찬가지로 낯선 느낌이 들지 않았다. 보육원과 정규수업을 제공하는 학교만 전전한 던이 그를 이미 마주쳤다면 아마 두 곳 중 하나다. 하지만 눈앞의 회색조끼의 남자는 학교 혹은 보육원과는 어울리지 않는 느낌이었다. 굳이 남자의 장소를 고르자면 사람의 흔적이 끊긴 외딴섬이려나. 


"자네의 그림은 무언가를 놓치고 있어." 남자가 입을 벌려 천천히 한 글자, 한 글자 의미를 정확하게 전달하려는 듯이, 던의 목에 걸린 35mm 필름카메라를 보며 나지막이 말했다. 그리고는 다시 원래 바라보던 작품으로 눈을 돌렸다. 남자의 시선 끝에는 해안가가 있고 나뭇가지가 있다. 그리고는 흘러내리는 시계가 공간을 채우고 있다. 살바도르 달리의 '기억의 지속'. 그 남자는 다시 기둥을 둘러싼 보이지 않는 결계가 쳐져 있는 자신의 공간으로 들어갔다.


내 작품은 무언가 놓치고 있다. 달리의 작품을 바라보고 있는 남자가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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