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교육청에 물어볼까요?’
‘ 교감 샘에게 물어봤어요 ?’
아이들 인권과 관련하여 인권침해 소지가 있는 이전의 학생생활 규정들 내용을 개정하라는 교육청의 공문이 왔습니다. 거의 모든 학교들이 그렇겠지만 이전의 학생생활규정들은 반 인권적인 내용들이 특히 용모, 복장 규정 등에 다수 포함되어 있습니다. 20여 년 전부터 개정하자고 주장했던 내용들이 이제야 고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온 것입니다. 마침 내가 맡은 업무인지라 이참에 과감하게 반인권적이라 판단되는 구태의연한 항목들을 쳐나가며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그랬더니 담당 부장이 불안한 기색을 감추지 못합니다. 교직 말년에 아주 전형적인 범생이(?) 교사를 담당 부장으로 접하게 되었습니다. 40대 초반의 중진급 부장이 불안한 마음으로 연속해서 질문을 던집니다. 교육청 공문에 ‘개정’이라고 해서 겨울방학 동안 본인 나름대로 기존의 규정들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살짝살짝 뜯어고치고 첨부하고 했는데 난데없이 선배 교사가 반인권적이라고 여겨지는 규정들 전부를 다 뜯어고치겠다니 화들짝 놀랄 수밖에 없는 접근이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업무 담당교사인 내가 우선 반인권적이라고 여겨지는 규정을 손보고 난 후 우리 교사들, 그리고 아이들에게 순차적인 검토 과정을 거친다는 것인데, 그리고 우리 학교 자체의 생활 규정을 만드는데 왜 교육청에 물어보아야 한다는 것인지 이해가 잘되지 않습니다.
이 친구가 올해 스승의 날에 장관상을 받습니다. 장관상이면 아마 교사가 받을 수 있는 최고 상으로서 모든 교사에게 귀감이 될 수 있는 그런 교사에게 주어지는 상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장관상을 받을 만큼 진짜 성실합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말 그대로 '범생이' 타입입니다. 아침에 출근하자마자 온라인 업무 시스템을 열어 자동적으로 공문 체크하는 것을 거의 최우선으로 하고 있는 교사입니다. 틈만 나면 원격연수를 틀어놓고 연수도 열심히 듣습니다. 교육청 공문이 내려오면 한 줄 한 줄을 아주 정독하며 읽어가면서 조금이라도 해석이 안되거나 완벽하게 자신이 소화해 내지 못하는 내용에 대해서는 수시로 담당 장학사에게 전화를 걸어 공문을 완벽하게 소화해야 하는 성향입니다. 그러면서 성실함을 바탕으로 학교 내 모든 교육 활동에 군말 없이 열심히 참여하는 전형적인 모범 교사입니다. 교장, 교감이 정말 좋아할 수밖에 없는 그런 교사입니다. 승진에 눈이 멀어 가짜 서류로 그럴싸하게 꾸며서 외부 상을 받아내는 교사들을 자주 보아온 터라 이번에는 받을만한 교사에게 제대로 주어졌구나 하는 생각을 합니다. 하지만 한편으로 무언가 그리 개운치는 않습니다. 자신의 역할에 충실한 것은 나도 본받아야 할 만큼 충분히 인정합니다. 하지만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교육청과 관리자들에게 종속되어 그네들에게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모습이 과연 교사들 롤 모델의 하나로서 우리 교사들이 본받아 노력하고 추구해야 하는 모습인가에 대한 의문입니다.
'시험 답안지 감독란에 교사 사인은 안 되나요 ?'
지방학교로 내려와 당연하듯이 서울에서 하던 데로 시험 답안지 감독관 칸에 내 사인을 하고 있었습니다. 교사들은 항상 시험 감독 시간에 모든 답안지 감독관 확인란에 도장이나 사인을 하게 돼있습니다. 그런데 교무실에서 관찰된 기이한 현상을 보면 이 학교에서는 도장만 찍게 되었던가 봅니다. 한 교사가 불편했던지, 답답했던지 시험 담당 부장에게 사인도 되게 해달라는 요청을 했고, 이 담당 부장도 그 요청이 타당하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마침 교무실에 들린 교장에게 답안지에 싸인 허락을 요청했습니다. 하지만 일언지하에 도장 아니면 안 된다는 대답을 듣습니다. 교사들의 불편함에 대한 배려보다는 ‘나만 옳다’는 교장의 권위주의적 마인드에 의한 결과인 것입니다.
교장의 태도가 더 큰 문제이지만 이 문제는 나중에 거론하기로 하겠습니다. 교장을 설득하고자 하는 노력없이 그대로 물러난 담당 부장은 맨 처음 요청한 교사에게 민망한 표정으로 교장의 의지를 전달합니다. 국가적 시험인 수능시험에서도 감독관 교사들의 사인을 허락하고 있는데 학교에서 못할 리가 없습니다. 그만큼 당당한 근거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교사의 자율권을 제대로 행사하지 못하고 채 오직 교장에게 의사결정의 모든 것을 의존하려고 하는 수동적인 자세를 보입니다. 아주 사소한 서류 작업에, 그것도 당위성을 확보하고 있음에도 관리자에게 일일이 물어보거나 의존한다는 것이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하긴 학교 내부 서류 양식에서도 불필요하거나 무의미한 한 줄, 한 칸 없애는데도 담당 교사나 담당 부장이 자율적으로 행하지 못하고 교장이나 교감에게 물어보는 상황이니 답답할 뿐입니다.
물론 「....... 교사는 교장의 명을 받아 학생을 교육한다.」는 교육법 75조의 규정이 교사들을 지배한 시대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1998년부터 '교장의 명'이 아닌 '법령에서 정하는 바'에 따라 학생을 교육하는 것으로 변경되었습니다. 그럼에도 학교장의 '명'에 따라 학생을 교육한다는 인식이 교장이나 교사들의 머리 속에 아직도 굳게 박혀있습니다. 결국 대부분의 교사들이 이러한 인식과 함께 교직 사회의 관료적 시스템과 서류, 규정 등에 이미 종속화되어 '교사의 자율성'이라는 개념 자체를 인식하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이런 난맥상의 결과로 교직 사회의 관료적 시스템이 우리 교사들의 자율적 성향을 얼마나 강렬하게 억누르고 있고, 교사들에게 수동적·의존적 습성을 지독하게 내면화시키고 있음을 다음에서 엿볼 수 있을 것입니다.
'누구 맘대로...'
학생생활 규정 하나 바꿔보려다 교감에게 들은 소리입니다. 교육부나 교육청이 자신들의 감독 영역에서 학교가 벗어나는 것을 원하지 않는 것처럼, 지금의 관리자들도 여전히 자신들만의 고유 권한이라고 여기고 싶은 통할권, 감독권을 교사들에게 변함없이 행사하고 유지하고 싶은 마음일 것입니다. 하다못해 어느 초등학교 교사는 자기반 교실 사물함 위치를 바꾸려다 학생들 보는 앞에서 교장 선생님에게 학생처럼 혼나고 1년을 그대로 살았다고 말합니다. 교사의 의도로 무언가를 해보려고 해도 관리자들의 의도와 일치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관료화된 여건이 교사들을 피동화시키는데 일조합니다.
어느 날 한 초등학교 교감이 교무실에서 20대의 여교사에게 종이 과녁 앞에 서 보라고 한 뒤 과녁을 향해 체험용 활을 쏜 사실이 알려져 논란 빚은 뉴스가 나왔습니다. 재판부는 이 여교사에게 ‘교감의 요구를 거절하기 어려웠을 후배 교사를 상대로......’라고 보호 변론을 해주었습니다. 물론 당연히 그런 비정상적인 요구를 하는 관리자의 행태가 잘못되었음은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고 실제 이런 관리자들이 많다는 것도 다른 장에서 충분히 서술될 것입니다. 내가 더 궁금한 것은 ‘왜 이런 비정상적인 요구를 순순히 받아들이고 있는 것일까 ?, 정 이유가 있었다면 ‘무엇 때문에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는 것인가 ?’입니다. 상황적 맥락과 무력적 힘에 의해 지극히 순종적인 자세를 보이며 끌려다니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입니다.
또 다른 신문 기사에 ‘어느 중학교에서 강당에 여학생을 모아놓고 치마 길이를 점검한 사실이 알려져 과도한 규제라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라는 내용이 올라왔습니다. 내가 초점을 잡고자 하는 것은 단속을 당하는 아이조차도 부당함을 인지하고 단속하는 선생님에게 '이게 정당한 것이냐'라고 물어보았는데 선생님들조차 ‘아니다.’라고 하면서도 어쩔 수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는 것입니다. 물론 학교 현장에서는 관리자나 생활부장의 독단에 의하여 부당함에도 강제되는 경우가 자주 있습니다. 독선적인 일부 관리자나 교사들의 행태에 대하여 큰 소리 내며 싸우지 않고서는 막을 수 없는 경우가 간혹 발생하여 아예 피하거나 동참하지 않는 경우는 자주 있습니다. 하지만 비교육적이, 부당함을 알면서도 이에 항의조차 하지 않고 무조건 순응하는 자세를 보이고 있다는 것은 이미 우리 교사들이 교육적 의식 없이 가던 방향대로 갈려고 하고, 하던 것만 계속하려고 한다는 ‘관성의 족쇄’에 빠져 있다는 것입니다.
과연 교사들의 자율권은 무엇이고, 있기는 한 것인지, 있음에도 불구하고 교사들 스스로 자율적 권리를 찾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우려될 뿐입니다. 위에서 언급한 교사들이 아직 교사 경력이 짧아서 하나하나에 신중함을 기하는 것으로도 이해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상명하복이나 서류에 익숙해진 교사들의 또 다른 의존적 습성을 보는 것 같아서 안타깝기만 합니다. 학교 내의 자잘한 의사결정 사안이나 교육 활동에 있어서 교사들 스스로 교육적이고 상식적인 기준을 바탕으로 자율적인 결정이 가능한 사안에 있어서도 이런 의존적 습관이 반복적으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특히 ‘관성의 족쇄’에 빠져 대부분의 의사결정을 습관적으로 교장에게 의존한다는데 더 큰 문제가 있습니다.
학교와 교사의 자율성은 전적으로 교사의 전문성을 기초로 합니다. 그리고 그 전문성을 바탕으로 한 자율성의 발휘는 학교 변화 및 발전을 위한 필수 요인입니다. 학교 현장에서 근무하는 교사들만큼 아이들과 학교 현장을 잘 아는 이들은 없습니다. 그리고 당연히 잘 알아야 합니다. 아무리 외부적 압력이나 지시가 지배적일지라도 학교 현장에 걸맞은 제도나 지시가 아니라면 오히려 역효과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따라서 교사들 스스로 교육과정이나 평가 방식을 자율적으로 결정하지는 못할지라도, 학교에서 아이들과 관련된 수많은 일상적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학교의 교육 주체인 교사들의 자율적 대처가 최우선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