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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보다는 공감이다 1

by 무상

‘모범생으로 살다 보니 답답했다. 나도 모르게 그냥 그래 보고 싶었다.’


사건 기사에서 여학생을 공사장으로 끌고 가 성폭행한 고등학교 2학년생의 말입니다. 지나가던 여학생을 보는 순간 욕구가 치밀어 올라 충동적으로 범행을 저질렀다는 것입니다. 이 학생의 성적도 전교 상위권이었고, 평화로운 가정에서 아무 불편 없이 성장한 학생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자신의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 타인에게 피해를 미치는 범행을 과감하게 행동으로 옮기게 됩니다.


성희롱 및 성폭력 사건이 우리 사회에 자주 발생하고 있습니다. 성 착취 동영상을 올렸던 모범생 대학생도 그렇고, 친구들을 성폭행하는 청소년들이나 대학생들, 이들은 모두 제도권 학교를 막 벗어난 풋풋한 사회인들입니다. 학교에서 배울 만큼 배운 사람들이고, 최고의 대학생들까지도 포함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사회의 사회적 상위 계층에 속하는 정상적인 구성원들이나 이제 막 학교에서 충분히 배우고 나온 사회 초년생들이 성희롱 및 성폭력이 불법이라는 것을 몰라서 그랬을까요? 아마 지식도 충분히 가지고 있고, 교육도 충분히 받았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인간적이고 비윤리적인 범행을 자행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입시를 위한 치열한 경쟁의 과정에서 에너지를 꾹꾹 눌러 막아 놓아놓고 모든 것을 ‘희생’해야만 하는 아이들이기에 한번 터지면 거칠게 나타납니다. 성적만을 위한 경쟁과 갈등이 심해진 상황에서 짜증과 분노를 참지 못하고 욱하는 분노조절장애가 생겨나기도 하고, 심지어 범죄로까지 이어지는 것입니다. 내가 보기에는 학교폭력도 같은 맥락입니다. 강한 아이가 약한 아이를 대상으로 나타나는 일종의 스트레스 해소입니다. 즉, 쌓이고 쌓이는 스트레스를 풀 수 있는 탈출구가 없는 상태에서 아이들의 심성이 심각하게 거칠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때리고 싶어서 때리는 것이 아니다. 때릴 수 있기 때문에 때리는 것이다.'

어느 군대 드라마에서 고참 병사의 횡포를 대신 표현한 말입니다. 보상심리의 작동입니다. 치열한 경쟁에서 살아남아 현재의 위치까지 올라오는 데 기울였던 고생, 고통에 대해 보상받기를 원하는 심리입니다. 어쩌면 그동안 너무 고생하였고 고통스러웠기에 악착같이 보상받고자 하는 왜곡된 욕구가 가장 강렬하게 자리잡고 있을 것입니다. 우리 아이들도 학교에서나 성인이 되어서나 그저 쉽게 때릴 수 있는 기회가 오면 그 기회를 맘껏 활용하여 지금까지의 고통에 대한 보상을 받고자 하는 심리가 우선하게 됩니다. 당연히 가해자로서 피해자의 입장을 고려하거나 이해하지 못합니다. 지식으로 교육을 받은 결과로서의 도덕적 감성과 타인 배려에 기본인 공감 능력 보다는 내가 한 고생, 고통에 대한 보상을 받고자 하는 심리가 자동적으로 우선하는 것입니다.


또한 성희롱 및 성폭력에 대한 단순 지식보다는 타인에 대한 이해, 배려, 그리고 약자에 대한 동감 등의 정의적 감성을 동시에 함양할 수 있는 교육적 접근이 우선적으로 필요한데 한 시간이라도 더 빼내서 입시 공부를 해야 하는 우리 학교 입장에서는 불가능합니다. 성희롱 및 성폭력의 불법성에 관하여 단지 교과서 지식으로만 암기하는데 그친 결과입니다. 지나친 경쟁에 함몰되어 친구마저 내팽개쳐버리는 인간성의 상실, 나만의 이익이 최우선시되는 이기심만으로 충만한 인간을 길러내는 교육. 학교 현장에 있어 아이들을 직접 접해보고 경험하는 나로서는 우리 교육은 이렇게 위험하기만 보입니다.


우리 아이들이 도덕성을 상실하고, 공감할 수 있는 인간으로 성장하지 못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당연히 입시만을 위한 경쟁구도 때문입니다. 물론 찰스 다윈의 진화론은 경쟁구도를 전제로 한 적자생존이 인류 진화의 핵심이라고 설명합니다. 하지만 『공감의 시대』의 저자인 제레미 리프킨은 경쟁보다는 서로 공감하고 연대하는 능력을 인류진화의 근원력이라고 보고, ‘공감하는 인간’이라는 ‘호모 엠파티쿠스(homo-empathicus)’라는 개념을 강조합니다.


영국의 정치경제학자·도덕철학자인 애덤 스미스(A. Smith)를 인용할 때 인간의 ‘이기심’에 의한 자유로운 경제활동이 국가의 부를 이룬다고 주장하는 학자로만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정확히 말하면 애덤 스미스의 이기심은 ‘건전한 이기심’을 의미합니다. 즉, 인간이 이기적인 존재라고 할지라도 자신의 이익에 상관없이 타인의 슬픔이나 행복에 ‘공감’하는 본성적 감정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기심과 공감적 감성을 전제로 개인이 자기 자신의 이익을 추구함으로써 사회 발전을 이룰 수 있습니다. 결국 ‘보이지 않는 손’이라는 개인의 이익 추구적 경제활동은 자기의 이익만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행복이나 불행에도 관심을 갖는 본성을 전제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애덤 스미스(A. Smith)의 주장을 길게 언급하는 이유는 극단적으로 우리 입시교육은 오히려 애덤 스미스가 언급한 ‘공감’이라는 본성조차 제거하고, 오직 자신의 이익에만 집착하게 하는 인간을 길러내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우려 때문입니다. 지나친 우려에 속하겠지만 자꾸 참혹한 유대인 학살을 저질렀으면서도 ‘양심의 가책이 없느냐 ?’는 질문에 ‘나는 아무런 죄책감이 없다. 월급을 받으면서 성실하게 일하지 않았다면 양심의 가책을 받았을 것이다. 나는 나에게 주어진 일을 열심히 했을 뿐이다.’라는 나치 장교 아이히만 같은 인간을 양성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두려움입니다. 결국 원하는 대학이나 제대로 인정받는 대학에 들어가지 못하면 ‘루저’로 낙인찍히는 아이들에게, 또 살벌한 경쟁을 뚫고 친구들을 뛰어넘어 살아남은 엘리트 아이들에게 모두 공통적인 것은 우리 치열한 학교 교육 그 어디에도 ‘공감’ 능력을 길러줄 수 있는 교육적 노력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에 심각성이 있습니다. 일부에서 우리 교육을 '안받느니 못한 교육'이라는 비판도 이런 이유에서 기인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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