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교사를 옥죄는 것
학교교육의 질을 높이기 위해 일선 각 학교에 보다 많은 자율권을 줘야 한다는 주장은 계속적으로 반복되어 강조되어 왔습니다. 하지만 실상은 정반대로 흘러가고 있습니다. 학교 자체, 그리고 교사의 자율적인 판단이 개입할 수 있는 여지는 전혀 존재하지 않습니다. 무엇 무엇해야 한다, 무엇 무엇하면 안 된다는 식의 교육부 중심, 교육청 중심의 획일적 통제 위주 교육행정이 항상 학교교육을 지배하고 있는 현실입니다. 교육청의 철저한 지시, 감독은 교사들에 대한 불신을 전제로 학교 자체의 자율성이라는 개념 자체를 아예 인정해주지 않으려고 하는 방해책입니다. 교육청의 정책이 학교나 교사들의 필요성이나 적실성 등을 우선적으로 고려되지 않는 한 나에게는 그저 현실성 없는 정책에 교사들의 순응을 요구함으로써 모순된 행정체제를 공고히 하는 악순환이 반복되는 듯 보입니다.
교장 책임 학교 자율 운영? 학교 자치? 교사 자율성?
역시 빛 좋은 개살구입니다. 통제와 지시 일변도의 획일적 교육 행정이 학교 위에 군림하는 상태에서는 학교경영 방식의 수동성과 후진성에서 벗어나기 어렵습니다. 직간접적으로 내려오는 각종 지시와 통제에 끌려다니고, 이로 인한 잡무로 인하여 교사다운 본질적인 업무에 집중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교사의 전문성 및 자율성 신장, 진정한 학교의 자치화는 기대할 수 없습니다. 내가 근무한 지 30여 년이 흘렀지만 학교가 항상 그 자리일 수밖에 없는 이유입니다.
핀란드에서는 국회의원 중 약 20%가 교사 출신이고, 지자체 교육 담당 부서에도 대부분 교사들이 포진하여 의사결정한다 합니다. 학교 현장의 문제와 어려움을 항상 체험해 온 교사들이 직접적으로 나서 교육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시스템이 정착하여 그렇게 교육이 완벽한가 봅니다. 현장 경험을 가진 교사들의 정책 참여가 주는 순기능이 극대화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국회의원까지는 아니지만, 지자체 교육청에 대부분 교사들이 장학사나 장학관으로 포진하고 있는데 왜 학교가 편해지기는커녕 더 힘들어질까요? 왜 교사들이 교육청에 장학사로 들어가면, 그리고 이들이 교감, 교장으로 학교 현장에 나오면 교사들을 ‘을’로 보고 ‘갑’이 되려고 할까요? 교육청 관리들도, 교장들도 모두 교사 출신이라는 점에서 결국 교사들의 문제라고 귀착될 수 있을 것입니다. 교사로서의 성숙과정 자체가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왜곡된 관료주의적 체제 속에서 교육전문가로서의 의식과 능력은커녕 오직 보신주의적이고 관리 지향적인 자세만 배워 성장합니다. 그러니 학교교육과 관련된 상급기관들의 구성원이 되면 스스로, 신날게 하나 없는 교직사회에서 아이들만 바라보며 바둥거리는 교사들을 위축시키고 비루하게 만드는 역할을 자초합니다. 교육청의 지나친 간섭과 감독은 교사들로 하여금 전문성은커녕 조용히 고개 숙이고 묵묵히 주어진 일이나 겨우겨우 때워 나가는 것이 최상이라는 타성에 젖게 만드는 역기능을 발휘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편으로 이런 체제가 당연하게, 관행으로 굳어진 배경에는 교사들의 순응적 자세도 한몫했다는 것이 나를 더욱 불편하게 만듭니다. 순진무구한 교사들 대부분이 이런 불필요한 요구를 교육청에서 받아도 투덜대기는 하지만 그냥 순순히 수행한다는 것입니다. 특히 지방 교사들의 특성은 일반적으로 더욱 순응적입니다. 여기 교육청에 근무하는 장학사나 장학관들은 참 편할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서울만 해도 부당하거나 불필요한 공문이 날아오면 담당 장학사에게 전화를 걸어 항의하는 교사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아마 그래서 서울 교육이 지방 학교보다 훨씬 더 개선되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지방 교사들은 불편함과 부당함을 인지해도 이를 그대로 수용하고 순응하는 모습을 보이고, 이런 반응으로 인해 교육청의 관리 감독이 당연한 듯이 더 거세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 결과로 우리 교사들의 모습은 교육적인 냄새보다는 더욱 행정적이고 서류적인 냄새를 풍기는 ‘공무원화 된 교사들’로 자연스럽게 고착화되어 가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교사들의 이러한 수동적 자세 이면에는 교사들이 항변해도 절대 변하지 않는 교육청의 탓도 큽니다. 교육청의 잘못된 공문, 부당하고 무의미한 지시, 학교 자체의 비합리적인 문제점들에 교사들의 항의를 할지라도 진지하게 들어주고 고민하고 해결해 주는 창구가 없습니다. 감히 교육청에 이의 제기나 항의성 전화를 하는 교사도 드물지만 간혹 교육청의 지시나 공문에 교육청 담당자에게 문의하거나 항의해 본들 정해진 것이니 그냥 해야 된다는 답변뿐입니다. 교육청의 의도는 어떻게든 관철하려고 하면서 교사들의 고민에는 적극적인 대처를 해주지 않습니다. 최근 인천의 특수교사 죽음도 그렇습니다. 12명의 특수아들을 맡아 일주일 최대 수업시간 29시간을 하고 있음에도, 거기에 밀착하여 보살펴야 할 중증 이상의 특수아가 4명 이상으로 늘었음에도 모든 것을 교사 한 명이 감당했어야 하는 현실이었답니다. 특수 학급이 있었던 학교에 근무해 본 적이 있어 특수 교사들이 너무 힘들다는 것을 알기에 너무 안타깝습니다. 하지만 교육청은 계속된 지원 요청에도 역시나 갑자기 지원해 줄 수가 없다며 1년을 버티라는 답장만 했답니다. 학교와 교사의 개별적 사정이야 어쨌든 그저 정해진 규정, 매뉴얼에 따라 대처할 뿐입니다. 최근 교육청마다 교사들의 잇따른 죽음으로 인하여 나름의 대처를 세우고는 있다 하지만 그저 기다리는 수동적인 대처일 뿐 교육청이 교사들에게 먼저 다가서서 문제를 들어주고 해결해 주려는 적극적인 접근은 아직 보여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교사가 더 큰 용기를 내서 무의미하고 불필요하다 싶은 지시나 공문을 따르지 않고 덮어 버리려 할지라도 교육청은 그 교사를 우회하여 학교 관리자들에게 전화를 해서 요청합니다. 결국 불복종 교사에게 다시 시정 지시나 요청이 또 들어옵니다. 교사의 학교 현장에 근거한 자율적 판단은 아예 무시, 배제하고, 교육청의 지시에 절대복종할 수밖에 없는 관리자들을 동원하여 기어코 교육청의 의도를 관철시키려고 합니다. 동시에 자율적인 판단으로 대처하는 교사는 학교의 관리자들에게는 ‘골치 아픈 교사’로 낙인이 찍히게 됩니다. 결국 교사들은 그저 지시하는 대로 따르라는 시스템만 확고하게 유지됩니다.
내가 알기로 별정직이라는 특별한 직책이 교육청마다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별정직을 차지하는 이들은 대부분 선거에 공이 많은 교육감의 측근들이 차지하고 있으며, 아마 비교육 전공자들도 다수를 점하고 있다고 합니다. 교육감 주변에 포진하고 있는 이들은 교육청 직원들에게 또 다른 상관 격이 될 것입니다. 무슨 역할을 제대로 하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교육감과 가장 가까운 힘 있는 분들이니 이왕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면 직접 교사들의 학교 현장 목소리를 제대로 들어주고 해결하고자 하는 역할을 전담한다면 아마 훨씬 적극적으로 교사들의 고충을 접근하고 해결해 줄 수 있을 것입니다. 적극적인 교사 지원 시스템이 정착된다면 교사들도 능동적으로 변화할 테고, 더 나아가 학교의 모습과 교육의 질이 나아질 것입니다.
세계적으로 인정받은 ‘기생충’ 영화와 ‘오징어 게임’이라는 드라마 등 한국 문화 콘텐츠의 발전에는 ‘지원은 하되 간섭은 하지 않는다.’라는 정부의 원칙이 있었다 합니다. 간섭 없는 창작의 자유가 지금의 한국 문화 콘텐츠의 발전을 이끌어낸 것입니다. 진정한 학교 자치를 향하여 학교 현장의 교사들에게도 지원은 하되 간섭은 하지 않는 교육청의 역할을 간절하게 기대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