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그널 (Signal)

어느새 우리는 여기에

by 골든라이언

"스~읍, 후~" 답답한 새벽 공기. 산소가 더 부족해졌나? 전자기장 필터도 이제 별 소용없나 보다. 밝은 아침에 눈 떠본 게 언제였는지. 소문대로, 세상의 빛이 소멸하고 있는 걸까? 산소를 서서히 빨아들이는 듯한 새벽 블랙홀. 지난달에 설치한 '플라스마-에어 매트'만이 날이 갈수록 보랏빛으로 물드는 새벽 눈동자를 살며시 닫아 준다. 어제 생긴 작은 상처들과 통증이, 밤새 완벽하게 회복되어 있다. 역시, 나에게 선물 한 보람이 있어. 반짝이는 모듈 사이를 채우는 오렌지빛 플라스마 단층이 한결 포근해졌다. “좋아” 하늘만 예전처럼 돼 돌아가 준다면... 창문 모니터에 떠 있는 산소 측정 농도가 20.2%에서 20.1%로 왔다 갔다 붉게 점멸하고 있다. 확률 게이지는 벌써 20.0%로 확정. 또 떨어지겠네.


"삐빅" 뭔가 도착했다. 자동 택배 테이블 위로 올라오는 고농축 산소 캡슐 키트… 들. 응? "T3, 몇 개나 산 거야?" "시간별로 3종류 키트, 골고루 샀는데" "요" "… 요" 요 버릇없는 초자율 서빙 로봇 T3. 내가 잠든 동안 건강 상태와 호흡량 그리고 앞으로 변화될 산소 농도를 계산해서 주문한 것이다. 저렇게 작은 크기의 물품들은, 생산공장과 바로 연결된 하이퍼 튜불린 (TUBULIN) 튜브를 통해 방에 있는 딜리버리 테이블 위로 즉시 배달된다. 요즘엔, 이 편리한 시스템이 유행이어서, 고객 맞춤형 제품을 생산하는 회사들은 '공장에서 침실로 (FTB, Factory to Bed)'가 가능한 모든 물건의 초소형화에 열을 올리는 중이다.


"네가 그저께 오토매틱 슈즈 살 때 옵션 선택하는 거 보고 반영해서 샀어… 요" "T3! 네가 아니고, 트위스트 (TWIST1, Q15672, 부록 참고)님! 그리고, 그때는 VIP 고객들한테 선물한다고 종류별로 산 거야. 나한테 미리 물어봤어야지. 몇 개씩 주문할지. 누가 네 멋대로 하래?" "아니, 네가... 아, 아니지. 트위스트님이 어제 정찰 때 나보고 알아서 주문하라고 했잖아" "뭐? 했잖아?!" 안되겠다. 트위스트는, T3의 자율 모드를 낮추려고 벌떡 일어났다.

그 순간, 왼편에 있는 창문 저 너머로 번쩍하는 섬광을 보았다. 무언가에 홀린 듯 잠깐 동안 멍해졌다. 마치 별 하나가 사라지는 느낌이랄까. 소중한 누군가가 함께 소멸되는 듯한 슬픔이 동시에 밀려온다. '뭐지?' 하지만, 이내 섬광을 순식간에 흡수해버리는 보랏빛 하늘은 그 순간이 착각이었나 하는 생각마저 들게 했다. 덕분에. 급 차분해졌다. 출근 준비나 하자.


"그래… 그래, 암튼 고맙다. 모닝 청소 모드" "알았다" "!!" "… 요" 초자율 모드 75% 서빙 로봇 T3, 머시너리 사 (machinery., Inc.)의 최신 기종인 저 녀석은 다루기 힘들다. 기존 로봇은 규제상 20~30% 이내의 자율 모드로만 설정되어 있다 보니, 고객들이 사실상 수동적 모드의 로봇에 쉽게 싫증을 냈다. 자연스럽게 실질적 자기 판단과 주장을 할 수 있는 '초자율 모드'에 대한 요구가 늘어나는 추세였고, 마침내 ‘셀 (Cell) 연합위원회’에서 조건부 승인이 났다. 그러나, 잇따른 고객 대응 사고들로 시범 사업이 실패로 돌아가 생산이 잠정 중단한 상태. 머시너리 사 VIP 고객 전담 분석 엔지니어인 트위스트는, 심혈을 기울여 개선되었다는 저 특수 로봇과 임무를 수행하며 베타테스터로서 리포트해야 하는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되었다.

‘하, 앞으로 이 녀석과 어떻게 지내게 될지 도무지 예측이 안된다. 아직은 거친 반항아 같은 느낌이랄까? 본사로 실시간 보고되는 자동 기록 전송 장치 아니었음, '했잖아'할 때 바로 확 꺼버렸을 텐데!’


그래도, 예상치 못한 위기 상황에서 자율 판단으로 긴급 상황에서 그녀를 구해준 건 저 친구였다. 어제 오전 11 시경, 셀 국경의 북쪽 지역에서 특이한 일이 벌어졌다. 우주에서 대규모의 카인 (Kine, 진동) 발생 물질들이 셀 쪽으로 날아와, 셀 외부를 둘러싸고 있는 이 중막의 표면 위에 노출된 특정 수신기들(receptors, 혹은 수용체들)에 격렬하게 부딪히고 있다는 급보가 ‘셀 연합위원회’에 전달되었다. 위원회의 협조 요청으로, 마침 근처 VIP 고객 관리를 위해 출장 나갔던 트위스트가 상황 발생 지점에서 가장 가깝다는 이유로 현장에 급파되었다. 트위스트는 활성화 (activation) 된 수신기 주변 정밀 스캔 후 확보 영상 자료들을 본사에 전송하고, 바닥에 떨어진 카인 물질 잔해 일부를 채집하려고 타고 간 이동 셔틀에서 막 내려 서고 있었다.

그 순간, 어디선가 나타난 거대한 셔틀이 트위스트의 머리 위로 엄청난 속도로 지나가면서 강한 에어 폭풍을 발생시켰다. 트위스트가 막 그쪽으로 쓸려갈 위험천만한 순간, T3가 자율적으로 긴급 모드를 작동시켜 트위스트의 정찰 슈트에 자신을 신속 결합해서 중량을 늘려 버텼다. 이어서, 반대 방향으로 최대 출력 부스트를 작동해 가까스로 타고 갔던 셔틀로 무사히 복귀할 수 있었다. 그 와중에 에어 폭풍에 날아든 잔해물들이 트위스트의 슈트를 뚫고 상처를 냈고, T3가 급하게 욱여넣는 덕에 머리에 작은 혹이 났다. '뭐 목숨을 건진 게 중요하지. 함께 지낸 게 겨우 열흘 밖에 안 되니까' 서로의 동기화에 익숙해지려면 시간이 좀 걸릴 것이라는 제조팀 A/S 담당자의 조언도 있었고, 어제의 활약도 있고 하니 반품은 일단 보류하자는 쪽으로 마음을 먹었다. 그래도, 99개 주문은 좀… (아직도, 쌓이는 소리)


욕실로 자리를 옮기며 72시간짜리 산소 캡슐 하나를 입에 넣었다. '겨우 3일… 한 달 유지되는 건 아직 못 만드나?' 하는 생각을 하는 동안 욕실 입구에서 시스템 로봇이 액상 전자렌즈를 눈에 흘려 넣어 준다. 순간, 펼쳐진 수백 개의 정보들이 트위스트의 선호도 순서대로 정렬되어 있다. 오늘은 경쾌한 선율의 모닝 추천 재즈 피아노 음악 'The holiday of cells'과 '뉴스 퀵 브리핑'을 함께 선택했다. 아침 뉴스, 드문드문 들려오던 지진 소식이 요즘엔 잦아진 것 같아. 인플레이션 때문에 식량도 고갈되어 간다고 하고. 특히, 카본(탄소) 소스 에너지 공급이 자주 끊어지고 있다는 불안한 뉴스마저. 단 하나. 산소가 풍부한 행성을 찾는 EX 스페이스셔틀 프로젝트에서 새로운 정보를 보내왔다는 소식. 이것만 희망적이네. 그런데, 어제 그 카인 소동은 왜 뉴스에 나오지 않지? 기밀인 건가? 하는 의문이 잠깐 들었지만, T3랑 실랑이도 벌였고 해서 그냥 경쾌한 피아노 선율에 몸을 맡기고 잠시 잊기로 했다.


"출근" "출근 준비하시겠습니까?" 욕실의 시스템 AI가 확인한다. "응" 하며 벽면에 고정된 근육들을 순간 깨워주는 전자기 샤워기 손잡이를 잡고 섰다. 그 하단에 설치된 자동 스캐너가 벨트 스위치를 찾아 원격으로 잠금을 풀고 "쉭" 하며 벗겨진 옷이 스캐너 옆 자동 재생장치로 들어가는 사이 천장부터 바닥까지 반원형 투명막이 생기며 '전자기 에어샤워'기의 작동이 시작되었다. 신체 상황에 따라 균형을 잡아주는 전자기장 자극을 받게 되면 활력이 솟구치기 때문에 에어샤워가 진행되는 이 시간을 트위스트는 매우 좋아한다. 샤워가 끝나갈 무렵 렌즈 속 피아노 연주는 저절로 멈추고 샤워 부스를 감싸며 웅장하고도 부드럽게 울리는 음성이 들려온다. "움직이는 모든 것은 항상 변한다. 항상 변하는 모든 것에는 주체가 없다. 그러므로 변하지 않고 […]" 이후, "종료" 음성과 함께 부스가 사라지며 동시에 로봇 암들에 의해 새 벨트가 채워지는 사이, 정면의 전자 NMR (핵 자기 공명 분광 법) 거울에는 트위스트의 신체 건강과 관련된 보조 인자들에 대한 상태를 체크한 결과들이 나타났다. "AA264, 정상" "ATP, FAD, NAD+, TPP, CoA. 정상" "Fe2+ Mg2+, […],정상" "마지막입니다. 질량 체크 20.954 +@ kDa, 정상" "좋아" 트위스트는 벨트 중앙 왼편 흰색 스위치를 눌러 나노 자동 조립 옷이 피부를 따라 퍼지면서 입혀지도록 했다. 그리고, 스위치 옆 모드 선택 버튼을 몇 번 눌러 밝은 청색 엔지니어 모드로 전환한 다음 T3에게 지시했다.


"가자 T3, 그리고 아르기닌 디카페인 커피 준비해 줘" "그런데, 내 이름은 정확히 TCF3 (P15923)인데… T3가 아니고" 크... "미안 미안, 그냥 줄이자 T3로. 편하게" "콜", "예!", "… 예" 오늘 아침이 뭔가 빡빡한 느낌은 그냥 기분 탓이겠지? 캡슐 오른편 구석에 준비되어 있는 셔틀에 가까이 가니 스캔 번호 'Q015672 OK'가 체크된 후, 이동 가능한 상태를 확인하는 초록색 알람이 반짝이며 해치가 자동으로 열린다. "도킹해" T3는 다가와 커피를 건네주고, 스스로 상부 천장에 결합한 뒤에 보고한다. "도킹 완료. 키네신 모드 완료. 목표지점은 머시너리 사 N 구역 R 빌딩 280층 2817 오피스입니다. 출발할까요?" "오케이" 게이트가 열리고 셔틀이 밖으로 나와 곧 하이퍼 튜불린 튜브에 오르려는 순간, "스톱 스톱, 멈춰!" "네? 늦었는데요… 지각하면 내… 아니 제 평가점수도 깎이는데…" 하며 셔틀을 이동하려 한다. "기다리라면 기다려 봐!” 노려보니 그제서야 슬 멈춘다. “벨트 반응 안보여? 좌측 7시 방향 렌즈 지정 포인트 줌인” "알았어" "…요" "저 구역이면, 스네일 씨인데" 스크린에 비친 그는 확실히 스네일 씨였다. 그런데, 뭐지? 그가, 이상하다.


스네일 (코드명 SNAI1, O95863). 머시너리사의 최상위 VIP 고객. 그는, 평범하면서 독특하다. 원격 관리를 원칙으로 하므로 근접해서 볼 수는 없었지만, 회사 내의 다른 팀 팀장들끼리 그를 비공식적으로 부르는 애칭이 '나무늘보'인 만큼 평소의 행동이 느릿느릿하다. 평소에는 재력가라고 상상이 되지 않을 정도로 수수한 옷차림에 낮의 활동은 거의 없고, 한밤중에만 잠깐 에너지 푸드 숍에 들렀다가 곧장 귀가한다. 특이 동향이라면, 가끔 새벽에 경계 외각의 셀로 넘어가서 그곳의 머신 숍만 갖고 있는 신제품을 구매하는 정도? 단조롭고 특별한 동선 변화가 없는 덕에 모니터링은 쉽지만, 본사에서는 어떻게든 VIP인 그에게 신종 로봇을 판매하기 위해 항상 행동변화를 주목하라고 주문한다.


"오케이 확인, 본사로 전송 시작" "응" 쓰윽 반말하는 T3를 노려봤지만, 지금은 이럴 때가 아니다. VIP 모니터링 임무를 맡은 트위스트의 '벨트'에는 고객이 일정한 반경에 있으면 알람이 오는 기능이 장착되어 있다. 당연히, 고객들은 이 사실을 모를 테지만. '오. 재밌네. 스네일 씨. 이 시간에 웬일이지?' 심지어 오늘은 평소와 달리 최신 오토 슈즈에다 'SNAI1'이라는 자기 심벌이 새겨진 후드티를 입고 나왔다. 세상에, 볼 캡까지지. 오토슈스를 이용해 훨씬 빠르게 어떤 빌딩으로 이동하는 듯 하다. 그의 전담 리빙 로봇 두 대와 함께.


일단, 느낌이 좋아. 새로운 패션, 특이 한 행동 패턴은 어떤 요구가 생겼다는 것이고 그만큼 새로운 로봇들을 구매할 가능성과 직결되기 때문에 본사 정보팀은 전문용어로 그의 변화 즉, '새로운 수식 (modification)'을 신나게 분석을 하고 있을 것이다. 마침, 스네일 씨가 'E-케드헤린(Cadherin, CDH1, P12830) 조절국' 빌딩의 코너를 끼고돌아 들어가려 한다. 조금 더 확대해 볼까? 하는 생각을 하는 그 순간, 스네일 씨가 가던 길을 멈추고 갑자기 이쪽으로 고개를 '휙' 돌려 보는 것이 아닌가?


'설마, 나를 인식한 건가?' 혹시 몰라 본능적으로 고개를 계기판 밑으로 숨겼다. '에이… 저 먼 거리에서 내가 지켜보는 것을 어떻게 알겠어?'하는 마음이 들었지만 그래도 혹시 모른다. "T3, 천천히 자연스럽게 출발해" "응" 몇 초를 달렸을까? 빌딩 몇 개 지나 커브 후 이어지는 직선 튜브 레일 위에서 광속으로 가속되는 카운트가 시작될 때 얼른 다시 관찰 모드를 개시했다. 그는 이내 빌딩 일층에 있는 EMF 신사복 코디네이션 숍으로 들어가는 것 같았다. 아닌가? 그런데 이상하다. 그의 서빙 로봇들이 보이지 않는다!! 렌즈 레이더망에도 사라졌다. 뭐지?


"T3, 스톱, 스톱!! " "스톱?" 급 정거에 몸이 휘청했지만 이내 정신 차리고, "좋아, 자율 광속 모드 취소… 그리고 우회로 진입!" "네" "긴급! 긴급 모드!! 뉴클레우스 빌딩 캡슐 주차장으로" "네, 긴급 모드 전환" 그 즉시 셔틀은 우회로를 진입해서 'E-케드헤린 조절국 빌딩 반대편에 있는 뉴클레우스(nucleus) 빌딩 쪽으로 날아갔다. "트위스터님, 왜 추적해?" 아, 설명. "보통 VIP들은 2대 이상의 로봇들이 한시도 떨어져 있지 않고 따라다녀. 그런데, 저기 빌딩 코너를 돌아가는 순간 로봇들이 사라진 것 같아. 확인해봐야 돼" 셔틀 모니터의 레이더에도 아주 짧은 순간이지만 작은 점들이 점멸한 기록이 남아 있었다. 뭔가 이상하다. 사고인가? "렌즈 에너지 증폭! 아무래도 직접 확인해야겠어, 그리고 T3, 한 번만 더 반말하면 수동 방전시킬 줄 알아" "어… 넵!" "그리고 본사 모니터링 33팀한테 채널열고 스네일 씨의 로봇들 위치 추적 요청해서 바로 전송해 달라고 해" "네! 알겠습니다"


너무 서두르면 안 된다. 일단, 침착하자. 아르기닌 커피 한잔부터 마시고… 혹시 모르니 산소 캡슐 여분을… 아차! 두고 왔어. 커피를 마시는 동안, 스네일 씨가 고개를 돌려 이쪽을 보며 마치 웃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던 것이 불현듯 떠올랐다. '확실히 웃고 있는 모습인 것 같았는데, 저 상황은 뭐지? 암튼 그에게 무슨 일이 생긴게 분명해' 그때 들리는 T3의 음성. "본사 엔지니어 본부장님 연결 요청입니다. 연결할까요?" "응? 아! 연결해 렌즈 말고 모니터로" 상사 얼굴은 되도록 멀리서.


"트위스트, 너 뭐 하니? 빨리 오지 않고. 지금 다들 너 오길 기다리고 있어!!" "본부장님? 네네!! 지금 바로 갑니다. 그런데, VIP 스네일 씨 로봇이 사라졌어요. 추적하고 있습니다" "알아, 이미 모니터링 33팀 팀장한테 연락받았고, 드론들 몇 대 보냈다고 하니까. 일단 와. 시상자가 빠지면 어떡해!!" 사실, 오늘은 '팀장' 진급 일인 데다가, 작년 한 해 VIP 고객 관리 최우수 엔지니어로 포상을 받는 날이다. 보통이라면 이 년 후에 진급이지만, 마침 팀장 자리도 공석이고 본부장도 적극 추천해서 운이 좋게 고속 승진도 동시에 하게 되었다. "넵, 바로 날아가겠습니다." "T3, 긴급 모드 한 번 더 쓰자. 우회 루트 이용해서 본사 엔지니어 본부로 바로 간다" "응" "네” "…네" 조만간 저 녀석 버릇을 꼭 고치리라. 하지만, 본부로 가는 내내, 예상치 못한 스네일의 변화와 좀 전에 목격한 수상한 현상들이 계속 신경 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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