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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골든라이언 Feb 14. 2024

20. 禪, 선善과학의 시작 II

나란히 걷는 선불교

객관성: 주관의 희망적 관측을 포함하지 않고 사물의 있는 그대로를 올바르게 드러내는 것. 혹은, 자기와의 관계에서 벗어나 제삼자의 입장에서 사물을 보거나 생각한다는 것.

우리는 대개 저 '객관성'을 통해 공정함과 중립적 가치를 확보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살펴보겠습니다.


사실, 객관을 성립시키는 가장 중요한 바탕은 [상호 인지]입니다. 나만의 오감이 아닌 '우리의 공통된 경험' 즉, 보고, 듣고, 맡고, 먹고 그리고 만질 수 있어서 실체가 거기에 있다고 수용할 수 있는 대상만을 우리는 '존재한다'라고 임의 정의하게 됩니다. 이 객관성 성립을 불교의 오온(五蘊)에 대입하면 색온(色蘊: 육체, 물질)과 수온(受蘊: 지각, 느낌)의 영역에 속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마치, 무심하게 비추는 거울처럼 감성적인 생각과 판단을 배재하고 오감이 감지할 수 있는 관찰대상만을 인정하자는 [약속]인 셈입니다.       


문제는, 아이러니하게도 객관의 출발점인 이 오감의 불완전성과 개별성입니다.


각 개인이 갖춘 감각기관들의 성능이 모두 제각각이기 때문에 인식할 수 있는 범위가 서로 다를 수밖에 없는 것이죠.  


한 가지 예로, 우리가 '본다'고하는 것은 일반적으로 사람의 눈에 보이는 가시광선(可視光線, visible light) 영역, 즉 평균 400-700nm의 전자기파 영역정도입니다. 반면, 물고기, 양서류, 파충류나 조류 등은 자외선까지도 인식할 수 있으니 이미 종간의 시각 인지 범위가 차이 납니다. 게다가 인간의 시각으로만 한정하더라도 개개인의 시력차이에 따라 특정 대상은 관찰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근시, 난시, 원시, 색약, 색맹 그리고 시력의 상실과 같은 개인마다 서로 다른 시력상태는 특정 관찰 대상에 대해 수용할 수 있는 정보가 차이가 날 수밖에 없겠죠. 증강현실을 볼 수 있는 안경을 낀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보는 것이 다르듯이 비록 같은 시공간에 다른 사람과 그 관찰대상이 함께 존재하더라도. 


요즘 광학산업의 핫이슈인 '메타물질'은 인위적으로 빛을 굴절시켜 아예 바로 앞의 물체도 인지할 수 없도록 하는 기술을 구현할 수 있는데 이는 모든 개별 간 시력이 동등하고 실제 대상이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완벽한 눈속임으로 개인에 따라 정 반대의 시각정보를 수용할 수밖에 없는 상태를 만듭니다. 마치 마술쇼처럼.


따라서, 우리는 적어도 인간끼리는 같은 대상을 보고 있다고 생각하고 그것이 존재한다는 것에 동의하지만 실상은 다르게 보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대다수가 감지할 수 있는 상당히 좁은 영역에 국한된 관찰 대상만을 객관적으로 '보인다'라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나는 꿈속에서 마치 현실처럼 모든 것을 본 그 행위와 경험적 사실은 분명히 존재하지만, 절대로 다른 사람들에게 객관화는 될 수는 없는 것처럼 말이죠.


비단 꿈과 같이 철저한 개인의 경험이 아니더라도 재현성이 낮거나 그럴 가능성이 없는 단발적인 이벤트 역시 객관성을 인정받지 못합니다. 예를 들면, 순식간에 지나가는 미확인 비행물체를 본 몇몇 사람의 주장은 비록 같은 공간에 있더라도 볼 수 없었던 대다수의 사람들은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만약, 사람들이 모여있는 특정장소의 하늘에 비행물체가 나타나 서서히 움직이다 순간 엄청난 속도와 함께 사라진 것을 다수의 사람이 목격했다면 적어도 그들에게는 그러한 특별한 것이 존재한다는 사실에 대한 '임의의 객관성'이 생깁니다. 그리고, 촬영된 기록들이 있으면 좀 더 객관성을 입증하는데 도움이 됩니다. 그러나 결국 똑같은 경험을 하지 못한 훨씬 많은 지구상의 사람들에 의해 객관성은 점점 희석되기 때문에 사회적으로는 여전히 미지의 영역, 조작 혹은 집단의 착시 현상 같은 것으로 남게 됩니다.


결정적으로, 재현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시각적인 것뿐만 아니라 소리와 냄새처럼 다른 모든 감각기관이 제각각 수용하는 정보들도 그 인지능력 범위에 따라 결정됩니다. 심지어, 우리들은 평소에 이 각각의 감각기관들이  정보를 동시에 수용하는 상태에서 지내고 있습니다. 불완전함에 불완전함을 더하고 곱하게 되는 셈입니다. 결국, 이 오감의 복잡한 조합들은 개인별 인지 영역의 차별성이 더욱더 벌어지게 합니다. 그러니, 저마다 오감에 의존한 기억이 다를 수밖에 없겠죠?


따라서, 어떤 공통의 경험이건 두 사람 이상만 되면 언제든 수용정보의 불균형이 생길 수밖에 없는 상황이 발생할 수밖에 없습니다. 비슷한 감각기능을 가진 존재들과 무리를 이루며 살고 있지만, 결국 우리 모두는 각자의 세계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현실세계에서 늘 문제를 일으키는 각종 오해들은 감정, 언어 혹은 기억의 개입 이전에 이미 기본적으로 깔린 불안정한 기본적인 상황이라는 것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상호오해가 아닌 이해를 위해서는 끊임없는 소통과 공감등의 노력이 필요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객관성'이라고 하는 것은 절대적 진리에 해당하는 그 무엇이 아니라 인간끼리 사회를 형성해 더불어 살아가는데 필요한 최소한의 공통된 정보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사회적으로 보편타당한 결정을 내리는데  이 객관성은 분명히 장점으로 작용하며 특히 과학이라는 분야를 살아 숨 쉬게 하는 근본임은 분명하지만, 살펴본 바와 마찬가지로 개인마다 색온과 수온의 영역이 고정되지 않고 계속 변하고 있기 때문에 불완전성과 개별성에 의해 시시각각 변할 수 있는 가변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유식사상에서, 천인(天人)은 물(水)을 보석으로 치장된 연못으로 보고, 인간은 단지 물로 보며, 아귀는 피로 보고, 물고기는 자신이 사는 공간(住處)으로 여긴다고 하는 '일수사견(一水四見)'이라는 표현은 바로 이러한 불완전성과 개별성에 따른 객관성의 한계를 잘 드러낸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더 현실적인 문제는,

우리는 [거울처럼 무심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색온과 수온의 영역에서 수용된 정보는 나머지 오온의 구성요소인 상온(想蘊: 표상, 생각), 행온(行蘊: 욕구, 의지) 그리고 식온(識蘊: 마음, 의식)까지 더해지고 보태지면서 각 개인마다 완전히 다른 경험으로 기록됩니다.   


감각기관이 느끼는 바깥경계에 대해 '응, 그렇구나'라고 단순히 수용할 수 없는 것이죠.  

       



이러한 속성을 가진 객관성을 바탕으로 한 [과학]의 분야가 불완전한 것이 전혀 이상하지 않는 이유입니다.


수많은 과학자들이 '이것은 저러하다'라고 주장하는 가설과 검증내용을 보면 반드시 [특정한 계, 조건 내지는 환경]하에 그렇다는 단서를 세웁니다. 특히, 수없이 많은 갈래로 전문화된 영역에서 더욱 그런 양상을 띠고 있습니다. 어떤 현상에 대한 가설 검증을 위해 정반합에 해당하는 모든 실험들을 할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 객관성의 한계점으로 인해 각 개인의 관찰영역이 매우 한정적인 것이 결정적인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어떤 현상에 가설을 세우고 증거를 수집하거나 실험을 통해 증명하는 행위는 그것이 옳다고 생각하고 판단하는 주관의 영역에서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일단 가설을 세우면 마치 변호사처럼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할 만한 문헌정보와 데이터들을 집중적으로 수집하며 다른 과학자들의 반론에 의해 가설이 무너지는 것을 방어하기 위해서는 논리가 한쪽으로 지나치게 편중된 편향성을 지닐 수밖에 없는 것이죠. 이렇게 열심히 준비하더라도, 결국 증거가 불충분하다거나 애초부터 나는 믿지 않겠다고 하는  태도를 견지하는 이들을 설득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판단은, 주관의 영역이니까요.


과학계예서, 어제는 맞고 오늘은 틀렸으며 오늘은 틀렸지만 내일은 옳을 수 있는 가능성이 언제든지 열려있는 것이 바로 이러한 속성 때문입니다.


양자역학이 그랬고 상온 초전도체가 그럴 것입니다. 카페인이 든 커피는 건강에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 아직도 결론이 나지 않고 있습니다. 그저 조건마다 사람마다 효능과 부작용이 다른 것이다라는 모호한 대답만 할 뿐입니다.  


따라서,  객관성과 이를 근간으로 하는 과학의 한계점은 분명하게 존재합니다.




다만, 이것이 곧 지금 이 시대에 살고 있는 불행할 수 있는 어두운 환경적인 문제를 일으킨 것이 아닙니다. 과학은 그저 불완전한 칼날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손잡이를 거꾸로 쥐고 칼을 휘둘러 온 것이 무엇인지.


부를 축적하고자 하는 욕망,

그리고 이와 맞물린 권력욕.


지극히 주관적이면서 이기적인

우리의 생각들.


이제, 다시 되짚어 찾아야 할

때입니다.


참선의 정수를 통해,

과학의 근본으로

돌아가는

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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