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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골든라이언 Jun 11. 2022

빚내는 지식, 빛나는 지혜

생명과학자의 철학


굉장히,
 오랜 시간 동안
 책을 읽지 않았습니다.


어느 순간, 실천할 수 있는 것이 아는 것보다 크게 모자란다고 느껴졌었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으로부터 얻은 지식들이 마치 원래 내 것인 양 흉내 내고 있는 나 자신이 갑자기 부끄러웠습니다. 마치 '큰 빚을 지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지식을 얻다]


대부분의 지식들은 초중고교 시절을 지나 대학과 대학원의 '교육과정'을 거쳐오며 배워온 것과 독서나 인터넷으로 습득한 것인데, 자전거 타는 법처럼 스스로 체득한 것 외에 우리가 무엇인가 배운다는 것은 모두 다른 분들이 앞서 밝혀낸 것을 '얻는 것'입니다. 그래서, 소위 공부를 잘한다거나 지식이 풍부하다는 것은 결국 '빚의 탑'을 열심히 세운 셈이고, 그동안 얻은 지식에다가 자신이 습득한 지식 하나를 더해 다른 사람들에게 잘 넘겨줬을 때야 그 빚이 청산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어깨에 들어간 힘이 '빚의 무게'때문인 줄 모르고 그저 '아는 체'하는 사람들과 '일류 고학력'에 방점을 둔 분들을 들이 그다지 달가워하지 않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것입니다. 요즘은 겸손하고 겸양하면 자신을 보여주지 못하고 기회가 박탈당해 도태되는 분위기여서 열심히 드러내야 한다고들 하지만, '빚 청산'을 어떻게 잘할 것인가 측면에서 한번 고민해볼 부분이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인식론 (認識論, Epistemology)'과 같은 깊은 철학적 사유를 빌리지 않더라도 지식의 속성에 대해 직관적으로 생각해보, '절대적인 불변의 진리를 이르는 것'이 아니라 어제 '이것'이었던 것이 오늘과 내일을 지나면서 '저것'으로 달라지는 가변성(可變性)이 높은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특히 어떤 물건이나 상황에 대한 '정의(定義, definition)' 당시 사람들이 '이건 그렇다고 하자는 약속'에 따라 순식간에 변하기도 합니다. 천동설과 지동설처럼. 그러니까, 엄청나게 어깨를 짓누르는 그 '지식의 빚'이라는 것도 결국에는 시대에 따라 변화하거나 사라질 수밖에 없는 허무한 바탕 위에 세워진 '모래로 지은 탑'이라는 것은 열 번도 더 생각할 필요가 있는 것이겠죠. 세월이라는 바람은 1초도 멈춘 적이 없으니까.


이러한 속성을 지닌 '지식'에 집착하거나 매몰되는 것이 어떤 부작용을 가져오는지 우리는 모르지 않습니다만, 외면하고 거스를 수 없는 흐름이라 생각하며 순응하고 살고 있습니다. '밈'과 '유행'에 뒤처지지 않으려고 애쓰고, 사교육과 투기에 진짜 '빚'을 내면서. '모르면 바보'가 되지 않기 위해..


문제는, 사람들이 이렇게 빠르게 생멸(生滅)하는 지식과 그 산물들의 흐름을 유행 따라 끊임없이 쫓아다니다 보면 어느 순간부터 무의식적으로 그 '공허함'을 느끼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공허함을 내재한 반복적인 사이클 위에서 뒤처지고 싶지 않아 열심히 하다 보면 '획득과 칭찬'이라는 만족감을 얻고 이에 힘입어 자발적이고 능동적으로  과정을 수용하게 됩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 (혹은 태생적으로)  더 이상 이 흐름을 아가고 싶지 않은 마음이 들어 수동적인 모드에 들어가거나 이 사이클 위에 올라타는 것을 거부하면 자연스럽게 도태되는 느낌을 갖거나 그런 시선들을 의식하게 되면서 당장 불안과 초조함에 의한 스트레스가 생성됩니다. 뭔가 하지 않은 그럴 듯 한 이유와 변명을 준비하고 있어야 하니까. 아마 대부분 '사춘기'시절이 가장 먼저 떠오를 것입니다.

"내 인생을 점수 몇 점에 걸고 싶지 않아요. 더 중요하고 하고 싶은 게 많아요"

"성적이 인생에 그닥 도움 되지 않는다는 안다. 그런데 네가 뒤쳐지고 낙오자가 되는 것은 볼 수가 없고.. 그건 부모의 도리가 아니니 대학 갈때까지만 참아봐."

마치 잘못 헛디뎌 나만 물에 빠질까 봐  빠르게 둥둥 떠내려오는 크고 작은 얼음 조각들을 계속 밟아가며 언젠가 안전한 육지 위에 안착하는 꿈을 꾸지만 끊임없이 달려오는 얼음 덩어리들이 쉬도록 허락하지 않는 것처럼..

유치원부터 대학원까지 교육의 범위는 넓고 다채로워져서 선택의 폭이 넓어진 듯 보이지만, 결국 경기장 트랙 위에 올려놓고 경쟁 순위를 통해 승자독식 구조를 공고히 하고 있습니다. 그 덕에 유아 때부터 '스펙의 얼음덩어리를 쌓아 남들보다 높은 탑 꼭대기'에서 보다 넓고 안전한 다음 얼음조각으로 골라 뛸 수 있게 해 주는 게 부모의 의무처럼 되어버렸습니다. 


이런 경쟁을 위한 단순 지식 쌓기의 굴레를 벗어나고 싶은 마음은 음악, 예술, 스포츠 그리고 종교 등등.. 다른 문화적인 것들로 대신 채우고 보상받고 싶어 하는 욕구로 이어집니다. 지식을 획득하건 거부하건 지속적으로 허무함과 상실감을 터치하는 상황은 결국  방향으로 향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들 문화마저도 이미 모르면 도태되는 '지식화 와 산업화'가 되어 있기 때문에 끝내 그 헛헛함을 채워 줄 수가 없는 것이 현실입니다. 바쁘게 따라다녀야 하니까..


결국 그 스트레스가 감당이 안되면, 그 감정은 자연스럽게 슬픔과 분노로 이어집니다. 오갈 데가 없는 마음이 극단적으로 치달으면, 지극한 슬픔은 자신의 탓을 하며 더이상 생을 유지하고 싶지 않은 생각으로, 외부로 향한 지극한 분노는 살인과 전쟁으로 이어집니다. 이런 방법 외에 다른 형태로 공허함과 환멸심을 해소할 방법을 찾지 못할 만큼 아프기 때문 일 것입니다. 그나마, '남겨진 자들'로 지내고 있는 우리는 사회 부조리와 정치뉴스에 그 분노를 끊임없이 쏟아내어 왔습니다. 내 분노를 마음껏 집어던져 넣어도 되는 '당위성'과 '표출 방법'도 유행 된 현실..

막상 내가 그 대상이 될까 봐 세상 살기 두렵고 막막한 것이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지 한 호흡 쉬고 반 걸음 뒤로 물러서서 들여다보는 것은 진정 아무런 지식과 자격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뒤 돌아보면 점점 작아지고 끝내는 세월이라는 뜨거운  태양에 다 녹아버릴 얼음들에게 우리의 소중한 인생을 내어 주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얼음들, 우리가 만든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부터가 정말 심각합니다. 우리는 지금 그 어느 때보다 지식의 '생성과 전파'가 빠른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스마트폰 한 번의 터치로 과거의 역사부터 미래의 신기술까지 다양한 방법으로 지식을 획득할 수 있습니다. 유튜브나 앱 등 각종 매체들을 통한 지식 습득의 속도는 더욱 가파르게 증가하고 있고, 이는 다양한 전문지식들이 엄청난 속도로 보편화되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또한, 메타버스와 같은 커뮤니케이션 네트워크 플랫폼의 발달은 서로 다른 분야의 사람들 간의 접촉 기회를 높여 '지식과 문화 융합의 평준화'를 가속화하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즉, 지식 생멸의 속도가 초고도로 빨라지고 있습니다.

이해하시겠죠? 우리는 공허함과 허무함과 상실감이 극도로 증폭되는 PCR의 시기에 들어와 있습니다. 안전벨트와 주의사항 그리고 비상탈출 교육 없는 초고속 스페이스 셔틀에 올라 탄 것입니다. 


자신이 곧 우리 사회이며 국가이고 세계라면, 초고도화된 지식의 건강한 세상을 만들 수 있다고 확신할 수가 없습니다.


이상태로 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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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를 보다]


"우리는 넘치는 지식의 바다에 살고 있는데 왜 세상은 그리고 나의 삶은 행복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지 않은가요?"이런 곤란한 질문을 손바닥 하늘 가리기처럼 그저 낙천적인 생각으로 힘내서 살아보자고 하기에는 그렇게 조언하는 나조차도 행복하진 않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조금 더 통찰력 있으면서도 사려 깊은 '지혜(智慧, wisdom)'로운 대답이 필요합니다.


이제, '지혜'라 함은 하버드대 같은 일류대학 출신의 고고한 이력을 가진 머리 희끗한 할아버지 교수님으로부터 나오는 특별한 가르침 일 것으로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성공한 기업가나 정치인 그리고 태생적 환경적 어려움을 드라마틱하게 극복 한 주인공들 에게서나 들을 수 있는 비싼 그 무엇으로 여길 수도 있을 것입니다.


'지혜'의 사전적 의미를 찾아보면, '사물의 이치를 빨리 깨닫고 사물을 정확하게 처리하는 정신적 능력.'이고 위키백과에는 '사람, 사물, 사건이나 상황을 깊게 이해하고 깨달아서 자신의 행동과 인식, 판단을 이에 맞출 수 있는 것'으로 정의되어 있습니다. 이치, 깊은 그리고 판단과 같은 단어가 주는 무게감은 뭔가 갖추기가 무척 어려울 것 같은 뉘앙스를 풍깁니다. 그것은 지혜 그 자체를 정의하는 것이 아니고 '지혜로움으로부터 발생한 행위의 결과'에 촛점을 맞춘 정의 이기때문에 그 정도의 결과를 낼 정도가 되어야 감히 '지혜'라는 단어를 꺼낼 수 있을것같은 큰 부담감이 드는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존경받았던 수많은 스승들은 언제나 지혜는 이미 우리 스스로 갖추고 있다고 합니다. 그저 살짝 가리워져 있을 뿐이라고. 


그렇지만, 이러한 가르침은 당장 실용적이지도 않으며 나이 들어 세상을 하직할 때쯤에나 생각해 봄직 한 고루한 개념 정도로 인식되기 때문에 딱 책위에서나 존재해야 할 내용으로 결정하고 헌 책방 한구석에 넣어둬 버렸습니다. "그 어려운 지혜라는 것은 현생의 내 수준에서 논 할 것이 아니야"라며.  오랫동안 책을 읽지 않았던 것처럼..


그러나, 현대의 지식은 나노 단위로 쪼개져 세분화되고 전문화되어 틈을 찾기 어려운 시대로 달려가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너무나 날이 매섭고 커져버린 지식의  양날검에 비해 오히려 너무도 짧아진 지혜의 손잡이를 다시 튼튼하게 수리하고 다듬어 보검을 만드는 작업을 해야 할 시기입니다. 위기의 상황임을 예민하게 인지하는 누군가는 헌 책방의 옛 스승들의 책들을 꺼내 먼지를 털어내고 다시 책장을 넘기며 도대체 지혜라는 것이 무엇이고 이것이 진정 우리를 살릴 수 있는 탈출구인지 고민하고 있을 겁니다.


그렇지만 보다 분명한 것은 지혜는 지식처럼 얻어야 할 무엇이 아니라 우리가 원래 갖고 있는 것을 찾아서 보는 것이기에 어렵다고 생각하는 막연함만 걷어내면 조금씩 드러날 것입니다.


예를 들면,

구름, 비, 눈, 얼음, 수증기 그리고 다시 구름..

이 중에 어떤 것이 원래 주인공인가요? 자녀들이 이렇게 묻는다면, 대부분은 "응, 주인공은 따로 없고 저런 모습으로 계속 변하는 거야. 끊임없이. 누가 그렇게 하라고 한 게 아니라 저절로 저렇게 되기 때문에 자연(自然)이라고 한단다. 날씨가 따뜻해지면 물이 수증기가 되어 하늘로 올라가서 구름이 되고 추워지면 다시 눈이 되어 내려오는 거야 "라고 할 것입니다. 

그리고, 시의 아름다움은 글자와 글자 사이의 여백에서 나오고 기타의 아름다운 선율은 줄과 줄이 만든 공간에서 흘러나온 것임을 이해하고 또 아이들에게 설명할 수 있습니다. 또한, 한번 숨을 내쉬고 들이마시는 그 사이의 틈이 있어야 우리가 살아갈 수 있는 것을 알아차리는 데엔 특별한 지식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지금 이 글을 보고 계시는 분들, 오른손으로 주먹을 한번 꽉 쥐어보십시오. 당신의 마음이 하나로 모이는 것이 느껴질 것입니다. 이제 주먹을 완전히 펴면 당신은 세상으로 세상은 당신에게로 들어왔습니다. 마지막으로, 손가락을 가위 모양으로 만들어 이를 잘라내어 다시 한마음 내기 전의 원래대로 돌아가도록 합니다. 전 세계인들이 다 같이 즐겁게 즐기는 가위바위보 게임은 지식의 얼음덩어리들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 그리고 자연이 어떤 모습인지 알려주는 지혜의 선물입니다.


그러니 아마도 스승들의 가르침처럼 '지혜'그저 시를 음미하고 음악에 귀 기울이듯 우리가 마음의 틈을 조금씩 만들고 쳐다봐주고 찾아주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눈 깜빡이고 말을 하며 먹고 마시며 걷고 뛰며 만지는 그 속에서 하나씩 지혜의  스위치를 찾아 작은 등불을 켜보는 작업을 지금부터 하면 어떨까요?


지식이라는 얼음덩어리들은 원래 지혜로부터 나온 것입니다. 삶을 살아가며 다양한 지식들을 만들 필요가 있다는 우리들의 지혜가 하나씩 현실화된 것이기 때문에,

얼음덩어리를 떠내려 보내는 그 바다가 바로 지혜이며 우리 자신입니다. 그러니, 생멸하는 얼음덩어리에 집착하고 오래머물고자 하면 마음만 차갑게 식어갈 뿐입니다. 바다는 늘 그자리에서 모든 것을 수용하며 묵묵히 기다리고 있습니다. 여기저기 건너뛰지만 말고 바다에 풍덩 빠져 푹 쉬었다가 다시 즐거운 인생게임에 올라타는 것, 그러니까 머무르지 않는 마음으로 얼음덩어리들을  잘 다루 줄 아는 바다의 지혜를 되찾는 것이 지식의 칼자루를 길고 튼튼하게 만드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오늘도 모든 존재들의 등불들이 태양처럼 환하게 빛나고 지구가 그 빛으로 아름답게 둘러싸인 즐거운 상상을 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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