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그리고 집>을 보고
‘부산 여성 영화제’를 다녀왔다. 영화제 마지막 날이었다. 운이 좋았다.
4편의 단편 영화를 보았는데 그 중 <그리고 집>이라는 영화가 가장 기억에 남았다.
‘그리고 집’이라. 그리고 왜 또 다시 ‘집’일까. ‘집 그리고’이었으면 좋았을 텐데. 돌아돌아 다시 집이라는 뜻일까. 그래, 그렇게 집은 무섭다.
어렸을 때 당돌하게도 그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나중에 내가 컷을 때 엄마아빠가 나한테 손을 벌릴까봐 걱정이라고. 그 말을 들은 이모는 내 부모가 아니면서도 괜히 더 서운해 했다. 이모는 나에게 버럭 화를 내며 당연히 부모가 늙으면 자식이 도와주는 거라고 했지만, 미안하게도 지금까지 공감하지 못하겠다. 도와주기는 개뿔, 제발 나라도 잘 살게 내버려 둬.
줄탁동시라는 말을 이럴 때 잘못 사용하고는 한다. 너도 분명 태어나고 싶어 했다는 가증스러운 변명. 정자들의 달리기에서 내가 노력해서, 엄마 뱃속에서도 내가 나오고 싶어 해서. 그러니 너도 이 가정에 책임이 있는 거라는 무책임한 말들을 아이에게 늘어놓는 부모가 있다. 그들은 스스로 좀비가 될 거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다. 늙어버려 죽지 못하고 가족의 삶을 갈아 먹는 좀비.
영화에는 수진의 아버지가 좀비로 나온다. 그는 병수발이 필요한 환자다. 침대에 누워 소변을 보면 누군가 소변통을 비워줘야 한다. 식사도 양치도 혼자서는 할 수 없다. 이제껏 엄마의 몫이었던 간병이 조금씩 수진에게로 넘어오는 상황에서 수진은 두려움을 느낀다. 이런 아버지라면 차라리 그냥 죽고 없어지길 바랐을 것이다. 징그럽게도 살아남는 아버지가 싫었을 것이다.
미안하다. 가족을 간병하는 사람들이 많을 텐데 이런 말을 해서. 그렇게 이런 말은 조심스럽다. 하지만 그래서 이 영화가 더 좋았다. 드러내기 어려운 솔직한 심정을 그대로 잔인하게도 표현했다. 그래, 내가 하고 싶은 말이었다. 그 생각들이 책갈피를 끼워놓은 것처럼 문득 펼쳐졌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는 아주 답답하고 아득한 첫 페이지.
이 영화가 더 공포스럽게 다가온 이유는 영화 속의 이야기가 곧 현실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벗어나려 해도 내가 가는 모든 방향의 길 끝에는 결국 가족이 서있다. 나의 조부모, 나의 부모 그리고 나까지.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다. 우리는 좀비로 태어났다.
아빠가 집을 나간 지 2년이 넘었다. 사실 잘 기억도 나지 않는다. 아빠와 엄마는 예전부터 싸움이 잦았다. 그래도 가족이라는 큰 무게 때문에 버티고 버텨서 30년을 살았다. 그들도 한 때는 노부부가 되어 서로 의지하는 상상을 했을 것이다. 서로 버림받았다고 생각하면서 원망하는 오늘의 결말은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다. 나는 마냥 그들이 각자 행복하길 바랐는데, 영화를 봤던 늦은 밤에 생각이 쏟아졌다. 아빠는 늙어서 혼자일 텐데 괜찮을까. 아빠는 엄마를 책임지기 싫어서 집을 나간 것일까. 아니면 나에게 아빠라는 짐이라도 덜어주기 위해 스스로 떠난 것일까. 남겨진 엄마를 나는 어떻게 생각해야할까. 엄마만 남겨졌으니 그래도 짐이 줄었다고 생각해야할까. 나는 부모님을 원망해도 괜찮을까. 사방에서 좀비들이 몰려들어 나를 갉아먹는 것 같았다. 내 몸을 타고 올라가 머리를 갈라서 뇌까지 파먹는. 그렇게 뇌가 없어지고 좀비가 되면 더 편할지도 모르겠다. 그들도 처음에는 이렇게 시작했을 지도.
수진이 캐리어를 끌고 워킹홀리데이를 가는 것으로 영화는 끝난다. 그럼에도 그 장면이 결코 희망적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수진은 언제쯤 완전히 자유로울 수 있을까. 수진이 수진만으로 살길. ‘그리고 집’으로 다시 돌아오지 않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