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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루 Dec 06. 2023

듣보인간도 꿈을 꾼다

2023년 10월의 기록 - 영화 <듣보인간의 생존신고>를 보고

위로란 무엇일까. 쉽게는 따뜻한 말이나 토닥임, 포옹, 손잡기, 혹은 맛있는 음식 대접, 함께 시간 보내기 등이 떠오른다. 하지만 이런 위로들이 언제나 효과적인 것은 아니다. 처한 상황이나 사람의 성향에 따라 원하는 위로도 제각각일 수밖에 없다. 어떤 사람들은 일면식도 없는 사람과 우연히 마주침으로써 살아갈 힘을 얻게 되곤 한다.

영화 <듣보인간의 생존신고>는 권하정 감독이 좋아하는 가수 이승윤의 뮤직비디오를 제작하는 다큐멘터리다. 삶의 어두운 시기를 보내고 있던 하정은 아는 동생을 축하할 일이 있어 아주 오랜만에 밖으로 나오게 된다. 그 한 번의 외출에서 우연히 음악 공연 티켓을 받게 되었고, 그렇게 가게 된 공연장에서 승윤을 처음으로 만나게 된다. 무기력하게 지내던 평소와 달리 그의 공연을 보는 동안 무척 행복했던 하정은 집으로 돌아와 그의 음악들을 모조리 찾아 듣고 팬이 되었다.

영화를 전공했으나 깊은 슬럼프에 빠져 영화를 접으려고 하던 하정은 승윤의 뮤직비디오를 만들고 싶다고 생각하게 되고, 아는 동생들과 작업에 착수하게 된다. 이들이 승윤을 설득하고 결국에는 뮤직비디오까지 완성하는 과정을 최대한 사람들이 편하게 볼 수 있게 유쾌하게 담아낸 점이 인상적이었다. 한 명의 팬이 가수에게 접촉하고, 거대자본 없이 뮤직비디오 제작까지 한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을 텐데 이들(권하정, 김하연, 구은하)이 웃고 떠드는 소리 덕에 고난이 괴롭게 보이지 않고 모두 견딜만한 즐거움으로 보인다.

꿈이 뭐라고, 꿈을 접어 본 사람들은 알 것이다. 꿈을 접는다는 건 생각보다 길고 지루하고 아픈 일이다. 그 과정에 위태로이 서 있던 하정이 승윤을 보며 느낀 감정은 단순한 팬심을 넘어서 동질감, 그리고 존경심이었으리라 짐작해 본다. 왜냐하면 하정이 팬이 된 시점에 승윤 역시 가수의 꿈을 거의 놓기 직전이었기 때문이다. 승윤은 당시에 많이 알려진 가수가 아니었고, 그의 이름을 알리게 된 오디션 프로그램이 그의 마지막 도전이었다고 한다.

나는 이 영화를 본 후에 이승윤의 음악이 궁금해져 며칠간 그의 음악을 반복해서 들었는데, 운 좋게도 최근에 그의 공연을 볼 기회가 생겼다. 혼자 음악을 들을 때도 참 좋다고 생각했지만 실제로 본 그는 무대 위에서 훨씬 더 빛나고 강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아마도 하정이 승윤을 처음 봤을 때도 그가 내뿜는 기세에 감명받았을 듯하다. 그러나 승윤은 유명하지도 않고 엄청 많은 팬이 있는 것도 아니었을 테고, 그 괴리감에서 어쩌면 하정에게 영감을 주었을지도 모른다. 모든 걸 놓아가고 있을 때 눈앞에 나타난 이승윤이라는 사람을 보고 어떤 심정이었을지 내 입장이었다면, 하고 상상하게 된다.


이름이 있는데 없다고 해
명성이 없으면 이름도 없는 걸까
- 이승윤, 무명성 지구인 中


하정이 공식적인 뮤직비디오를 찍기 전, 승윤을 설득하기 위해 찍은 뮤직비디오는 <무명성 지구인>이었다. 가수도, 감독도 이름이 알려지지 않으면 그 일을 계속하기 힘든 게 현실이므로 이 노래가 하정에게 더욱 크게 와닿지 않았을까. 하정은 승윤을 좋아하는 마음을 핑계 삼아 자기가 하고 싶었던 일을 다시 하게 되었고, 그 과정을 영화로 만들었다. 이 영화는 단순히 가수와 팬의 이야기가 아니라 어디선가 움츠리고 있을 ‘듣보인간’들을 위로하기 위한 기록물이었다.

무명이었던 승윤은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고 세상에 이름을 널리 알리게 되었고, 무명이었던 하정은 자기의 영화를 여러 대형 극장에서 상영할 수 있는 감독이 되었다. 이 꽉 막힌 해피엔딩이 내가 이뤄낸 성취가 아님에도 나에게 위로가 되고, 어쩌면 나도 내가 좋아하는 일을 계속 해도 될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품게 만든다. 모두가 영화 속 주인공이 될 수는 없겠지만 언젠가는 내가 걸어간 길이 누군가에게 영감을 줄 수 있을지 모를 일이다. 그것만으로도 위로가 되고 마음이 따뜻해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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