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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사슴 Dec 14. 2023

그리던 집은 없어

단편영화 <그리고 집>을 보고


서울독립영화제 홈페이지


단편영화 <그리고 집>은 10년째 투병 중인 아버지와 그를 간병하는 어머니, 집안일에 별 관심 없는 남동생을 둔 수진의 이야기다. 어느 날, 수진은 회사에서 해고되고 꿈꿔온 캐나다 워킹홀리데이 서류심사에 합격한다. 서류심사 합격이 쉽지 않은데, 발목 잡힐 회사라는 걸림돌도 사라져버렸다. 묘한 타이밍. 수진은 은근히, 또 자주 설렌다. 단꿈에 젖어있다가도 아버지의 병시중이 필요할 때마다 자꾸만 가족 안으로 소환된다.     


누군가를 돌본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육아가 아니라 갑작스러운 사고나 노화로 몸이 불편해진, 나보다 더 나이 많은 누군가를 돌본다는 것. 게다가 그것이 매일 감당해야 하는 노동이 된다면. 돌봄에 노동이라는 단어가 더해지면, (단 두 음절일 뿐인데도) 그 ‘돌봄’은 차마 두 손으로 들지 못할 만큼 무거워진다. 두 손으로 간단히 해내는 것이 아니라 등짐처럼 짊어져야 하는 것이 된다. 관자놀이 부근에서 낡은 베개가 풍기는 오래된 땀 냄새가 어렴풋이 돌아다닌다. 온 감각을 날 세우게 만드는 두려움이 ‘돌봄노동’의 네 글자 뒤에 우두커니 서 있다. 무한이라는 시간을 제 뒤로 펼친 채.     


엄마는 수진에게 사소한 간병 심부름을 시킨다. 환자에 대한 연민과 원망을 지나 일상으로 스며든 노동의 피로, 언제 끝날지 모르는 막연한 혐오는 최전선에서 환자를 마주하며 똥오줌을 받아내었을 엄마에서부터 수진에게로 흘러 들어간다. 수진은 두렵다. 눈앞에서 출렁거리는 누런 오줌을 받아내는 미래를 순리처럼 받아들여야 할까. 엄마의 감정과 가사노동은 다음 타자를 기다려왔던 것처럼 수진에게 넘어오려 한다.      


반면 남동생은 아버지의 오줌으로부터 자유롭다. 집안 구성원이면서도 안전한 언덕에 올라가 있는 남동생이 야속하다. 알고 싶지 않은 감정의 골을 자신에게만은 얄팍하게 전부 드러내는 엄마와 굳이 그 속을 들여다보지 않고 피하는 남동생. 이 둘은 수진의 미래를 불투명하게 만드는 주범이다. 아버지의 병세와 집안의 상황은 시시각각 수진에게 공포로 다가온다. 아버지는 좀비라는 환상으로, 어머니는 더없이 잔인한 현실의 모습을 하고.      


서울독립영화제 홈페이지


가족주의는 아이의 탄생과 더불어 그 자녀에게 마땅히 감당할 몫을 안겨준다. 내가 겪어온 가족은, 내 주변의 가족 대부분 그랬다. ‘행복한 가정은 모두 모습이 비슷하고, 불행한 가정은 모두 제각각의 불행을 안고 있다’는 소설 《안나 카레리나》의 첫 문장처럼, 가지각색의 이유로 가족 구성원 사이의 건강한 거리감은 쉽게 사라진다.     


가까운 누군가의 바닥을 목격하는 것은 결코 즐거운 경험이 아니다. 아무리 함께 사는 가족이라고 해도, 아니 가족이라면 더더욱. 살아가면서 생기는 무거운 삶의 피로를 함께 짊어지는 것이 ‘가족’된 도리인지 잘 모르겠다. 태어난 순서 혹은 성별에 따라 맡겨지는 유난히 큰 짐을 나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한 1g도 나의 선택이 들어가지 않은 태생의 환경에서 내가 감당해야 하는 책임은 도대체 뭘까. 집을 떠난다고 자유로울 수 있을까. 그러면 구질구질하게 가득 차 있는 고약한 의무에서 벗어날 수 있는가.      



수진은 워킹홀리데이를 반대하는 엄마를 뒤로하고 이른 아침 집을 떠난다. 수진은 과연 비행기를 타고 그리던 나라로 날아갔을까. 이루고 싶은 소원을 비는 마음으로, 수진이 캐나다에 도착했기를 간절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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