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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난이에게]

by 킴철수

몬난아 안녕. 날씨가 많이 추워졌어.

어제는 부산에도 눈이 엄청 많이 왔어. 짧은 시간이었지만 눈을 보니까 괜히 기분이 좋아졌어. 그때 나는 집에서 일을 하고 있었어. 아마도 기분이 별로 안 좋거나 기분이 안 좋을 시간도 없을 만큼 바빴을 텐데 눈이 온다는 소식에 모든 업무를 중단하고 창을 열었어. 정말 눈이 펑펑 오더라. 조금만 더 오래 왔다면 눈사람을 만들 수도 있었을 텐데. 그러면 더 좋았을 지도 모르겠지만 그래도 기분이 좋았어. 학교에서도 학생들이 운동장에 나와 눈을 맞으며 뛰어 다니는 영상을 봤어. 내가 학생이라도 그랬을 것 같아. 난 직장인이지만 뛰어 나가고 싶었거든.


문득 네 생각이 났어. 너는 그렇게 많은 눈을 본 적이 있을까. 보고 싶었을까. 그냥 추울 뿐 별 감흥이 없을까. 그래도 꽃잎 같은 눈이 하늘에서 떨어지면 신기하지 않을까. 나보다 너의 하늘이 좀 더 높을 테니까 더 신기하지 않았을까. 어쩌면 눈을 이미 봤을지도 모르겠다. 무려 십칠 년을 살았으니 말이야. 나는 간혹 너를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있더라고. 하하.

그렇게 눈이 내리고 회사 메신저 창에도 눈을 보니 기분이 좋다는 글들이 올라왔어. 우리는 이렇게 눈만 내려도 행복해 하는 쉬운 사람들이라며. 사실 부산에 이렇게 많은 눈이 오는 건 정말 쉬운 일이 아닌데 말이야. 어쨌거나 기분이 좋아지니까 이상하게 좀 슬픈 느낌도 들었어. 마치 깜깜한 동굴 속에 갇혀 있다가 오랜만에 빛을 본 것처럼? 그만큼 일이 하기 싫다는 말이야.


너는 알지? 내가 어떻게 일하는지. 너무 힘들 때면 거실로 나와서 자고 있는 너의 냄새를 맡고 다시 일하러 갔었잖아. 물론 너무 자주 나와서 너는 한숨을 쉬며 싫어했지만. 그렇게 하루하루 기계처럼 퇴근하면 내일을 위해 남은 시간을 보내고 주말만 손꼽아 기다리면서 나머지 요일을 버티고 있어. 그래서인지 그렇게 손꼽아 기다린 금요일 저녁이 오면 그때부터 조바심이 나서 주말을 제대로 보내지도 못해. 금요일 밤만 되어도 이미 주말이 다 끝난 것 같은 느낌이 들거든. 바보 같은 말 같지만 조금은 맞는 말이기도 해. 실제로 금요일 밤이 지나면 곧 일요일 밤이 오더라고. 일요일 저녁에는 도살장에 끌려갈 소처럼-이런 표현은 너에게 조심해야 하지만 아무래도 이 표현이 가장 적합한 것 같아-생각이 많아지고 희망을 잃어가.

회사는 나에게 어떤 곳일까. 도대체.


나는 하고 싶은 것이 없었어. 갖고 싶은 직업도 없고. 그런 삶도 있는 거잖아. 다들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살고 싶어 하지. 하지만 세상에는 모두가 싫어하는 일도 있고 누군가는 그 일을 해야 세상은 돌아가. 그래서 직업에 귀천이 없는 거라고, 난 생각했어. 어떤 사람에게 직업은 그 자체로 자아실현이겠지만 또 어떤 사람에게 직업은 그저 돈을 버는 수단일 뿐. 번 돈으로 퇴근 후에 행복을 찾을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 그리고 불안한 마음에 이런 사람이 더 많을 것이라며 괜히 위로하기도 했어. 그렇게 생각하니 직업이라는 게 별 큰 의미가 없어졌어. 그렇게 이리저리 회사들을 돌고 돌아 지금의 회사를 만났어.

아무도 입사를 강요하지 않았고 내 발로 찾아가서 심지어 제발 합격시켜달라고 기도했던 건 나였어. 아무것도 없는 나에게 가능성만 믿고 월급을 준 회사였고. 그 고마움을 난 기억해. 한국에서 취준이란 얼마나 불안한 단어인지 넌 모를 거야. 특히 술 먹고 노는 것밖에 할 줄 모르는 나 같은 사람에게 내가 일할 책상이 하나 주어진다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그 자리가 얼마나 갖고 싶었는지 말이야. 그 기억을 잊지 않으려고 노력해. 그 기억이 내가 일을 계속 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거든.


그래 놓고 이제 와서 어쩌라는 건지. 싫으면 그만두든지 아니면 열심히 하든지 말야. 이도저도 아니게 중얼중얼, 백수처럼 놀 돈은 없으면서 그렇다고 어디 좋은 곳에 이직할 능력도 없으면서 아니 뭐 별다른 노력도 하지 않으면서. 나도 알고 있어. 바보 같이 내가 놓친 부분이 있었거든. 우리는 아주 오랫동안, 청춘이라고 부르는 대부분의 시간 동안 일을 해야 한다는 거야. 내 젊은 날들을 겨우 돈 버는 시간으로 바꿔야한다는 것을 미처 생각하지 못했어.


이제 나는 지독한 월요일병에 걸린 환자가 되었어. 이 월요일병은 월요일을 싫어하는 병이지만 가장 극심한 순간이 그토록 기다려온 주말이라는 이상한 점이 있어. 오히려 월요일에는 월요일 병이 없거든. 그땐 또 다음 주말이라는 희망이 있어서 그런 걸까.

늙은 내가 덜 고생하기 위해서 젊은 내가 대신 고생을 하는 격이라니, 아무리 생각해도 정년까지는 너무 긴 시간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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