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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꿈 꾸는 나 Oct 07. 2021

세상에 하나뿐인 엄마 선생님

우리 아이가 달라졌어요 1

 “경미하기는 하지만 ADHD가 맞습니다. 특별히 다른 부분보다는 주의집중에 어려움이 있어, 학년이 올라갈수록 학습에 어려움을 겪게 될 거예요” 의사는 말했다.


 내가 아무래도 둘째가 ADHD 증상을 보이는 것 같다고 부모님들께 이야기했을 때, 양가 부모님은 내가 너무 예민하다고 타박했다. 그러나 특수교사로서의 직업적인 관찰력과, 엄마로서의 촉이 있었다. 예상은 했지만,  ADHD가 맞는다는 말을 듣는 순간 심장이 요동쳤다.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의사는 충동성도 없고, 친구들과 문제를 일으키거나, 교실에서 돌아다니는 등의 문제는 보이지 않기 때문에 1학년 생활은 어렵지 않을 것이라 했다. ADHD가 맞긴 하나, 치료를 잘 받으면 성인이 되었을 때 완치 가능성도 굉장히 높다고 했다. 그러나 내 귀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둘째가 돌쯤이었다. 친척집에 놀러 가 잠을 잤는데, 아이가 밤 새 울었다. 예상컨대 뱃속부터 시력이 좋지 않았던 아이는 커튼이 없는 창가에 거뭇거뭇 거리는 무언가가 무서웠던 것 같다. 무언가 나타날까 봐 7살까지 집 안에서도 혼자 화장실을 가지 못했다. 인도를 걷다가 저 멀리 오는 강아지만 봐도 깜짝 놀라 차도로 달려 나간 적이 여러 번이다. 새로운 곳에 가면 최소 두 시간은 적응이 필요했다. 와야 할 때쯤 재미를 느껴 가지 않겠다고 떼를 부렸다. 아이의 불안함은 아기 때부터 나타났지만, 그땐 그저 어리기 때문이라 생각했다.


 아이는 의사가 보지 못하는 일상생활에서의 어려움을 가지고 있었다. 생각보다 불안이 높아 밖에서는 하지 못했던 불만을 온전히 집에서 풀어냈다. 하고 싶지만 할 자신이 없기 때문이었다. 또래에 비해 참고, 기다리는 것이 어려웠다. 부모와의 약속은 그때뿐, 아이는 원하는 것을 즉시 얻으려 떼를 썼다. 당장 필요한 자신의 욕구를 해결하기 위해서 바닥에 드러눕는 일은 다반사였다. 주어진 것에서 선택하고 결정하는 것을 어려워했다. 대부분 언니의 선택을 모방했고, 돌아서면 후회했다.


 초등학교 입학 후, 아이의 담임에게 아이의 상황에 대해 먼저 이야기를 해야 하는지 고민했다. 그러나 자신의 물건을 잘 챙겨 왔고, 전해야 하는 물건도, 말들도 잊지 않고 전했다. 특별히 가정으로 전화가 오지 않았기에 3월 말에 예정된 담임과의 상담을 기다렸다. 코로나로 선생님의 얼굴을 볼 수 없다는것은 아쉬웠지만, 내심 전화 상담인 것이 좋았다. 아이에 대해 더욱 편히 이야기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기다리던 전화상담시간. 담임은 한 달 정도 관찰된 아이의 모습을 나에게 이야기했다. 가장 먼저는 기침소리 내는 것을 아는지 물었다. 두 번째는 학교생활이 힘들고 불안한지 앞으로 자주 나와 질문을 한다고 했다. 짐작컨대 그 수준이 아주 사소한 것부터였을 것이란 예상이 됐다. 수업을 곧 잘 따라가지만 선생님의 설명을 듣지 않고 먼저 후다닥 해버린다고 했다. 특히 수학 시간에는 집중하지 못하는 표정으로 앉아있어 선생님의 마음이 많이 속상하다고 했다. 친구들을 너무 잘 도와주고, 배려심이 많지만 어떨 땐 자신의 의견도 내세웠으면 좋겠다고 했다. 담임의 이야기를 다 듣고 아이의 상황을 전했다. 담임은 그제 서야 아이가 왜 그랬는지 이해가 된다며 감사하다고 했다. 감사한 것 나인데 선생님이 고맙다니.


 전화를 끊고 나는 결국 울음이 터졌다. 아이 때문에 담임에게 전화가 오지 않는다는 것에 나는 안도했다. 하교 후, 아이가 억울한 일을 당했다고 속상함을 토로할 때 친구와 다투지 않고 잘 참아준 것이 다행이었다. 그저 아이가 방해되지 않았고, 돌아다니지 않았다는 것. 다툼이 없이 하루하루를 보내는 것이 내게는 중요했다. 그런데 담임은 그런 내 아이의 모습을 안쓰럽다 했다. 아이보다 내 마음이 먼저였던 것이 엄마로서 부끄러웠다. 힘들고, 속상했을 아이 마음을 먼저 생각지 못한 것이 미안했다.  전화를 끊고 나는 결국 울음이 터졌다. 꺼이꺼이 우는 내 울음소리가 아이에게 들킬까 소리가 새 나가지 않게 손으로 입을 막고 펑펑 울었다.


 좋은 선생님을 만나 감사했지만, 아이의 학교생활은 내가 통제할 수 없기에 속이 상했다. 아이의 상황이 온전히 받아들여진 것도 아니었다. ‘엄마니까 뭐든 할 수 있어’라는 마음도 아니었다. 교사로서의 나와 엄마로서의 나는 많이 달랐다. 교사로서는 교실에서 할 수 있는 기준에 학생이 다다를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면 되었다. 고작 1년이면 되었다. 그러나 엄마로는 아이 삶 전체를 관여해야 하지 않는가. 적어도 10년은. 두려웠다. 자신이 없었다.


 그러나 슬픔에 빠져있을 수 없었다. 내 부정적인 감정에 휩싸여 허우적거릴 시간이 없었다. 아이가 어릴 때, 어떻게, 얼마나 개입하느냐에 따른 효과의 차이를 알기 때문이었다. 아이와 관련된 카페를 가입했다. 많은 케이스의 이야기를 읽고, 예후를 살펴보았다. 아이의 치료, 교육, 진로, 음식에 관련된 다양한 책을 주문했다. ‘~카더라’의 이야기들은 내 아이에게 적용할 수 없었다. 내 아이와 똑같은 아이는 세상에 단 한 명도 없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나는 결심했다. 내 아이에게 세상에 단 하나뿐인 엄마 선생님이 되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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