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숲에는 여전히 눈이 내린다

첫눈이 사라졌다(Never Gonna Snow Again, 2020)

by 우린

2021년 10월 7일 목요일, 더숲 아트시네마에서 열린 '첫눈이 사라졌다' GV에 참석했다. 이번에도 예고편이나 사전 정보 없이 영화를 먼저 마주했다.


※영화를 보지 않은 분들에게는 스포일러가 될 수 있으니 주의 부탁드립니다.

※이 글은 해당 GV에서 다뤄졌던 내용이 인용되어 있습니다.



줄거리

우크라이나 프리피야티(При́п'ять)에서 온 '제니아'는 폴란드 바르샤바의 한마을의 집들을 방문하는 안마사로 일한다. 마을 사람들은 그가 해주는 안마에 매료되어, 피로를 풀고 치유받는다. 그의 손가락을 응시하다 보면, 최면 속에서 자신의 내면과도 마주할 수 있다는 소문이 마을에 퍼진다.




낯선 공간 속 작은 공간
The village


제니아는 검은 숲속을 사박사박 걷고, 어두운 밤에 다리를 건너서 바르샤바에 도착한다. 체류 허가를 받기 위해 찾아간 곳에서는 제니아의 자격을 지적한다. 다른 언어를 하지 못하는 점에 더해서, 체르노빌 원자력 사고가 일어난 프리피야티 출신이기 때문이다. 제니아의 얼굴이 익숙하다는 담당관의 말로 보았을 때, 제니아는 체르노빌 꼬리표를 오랜 시간 달고 다녔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처럼 우크라이나 사람들은 이미 폴란드에 많이 거주하고 있는데, 이들은 외부인으로 취급받으며 차별당한다. 영화 밖으로 잠시 나와서 이야기해 보면, 우크라이나와 폴란드는 국경을 맞대고 있다. 1991년에 소비에트 연방이 해체되며 많은 사람들이 폴란드 등 주변국으로 이주하기도 했다. 당시 폴란드인들이 서방으로 일자리를 찾아떠나면서 생긴 빈자리를 우크라이나인들이 일부 채웠다. 이들은 주로 저임금을 받거나 육체적인 노동이 필요한 곳에서 일했다. 영화 속에서 그들은 음식 배달원, 경비원 등으로 일하는 것으로 나온다.


제니아는 자신의 능력을 사용해서 체류 허가를 받아내지만, 계속해서 이 비슷한 상황을 겪게 된다. 그는 부유한 주택단지에서 안마사로 일한다. 부피가 큰 안마침대를 들고 다니는 제니아는, 주택단지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서 일종의 검문소를 통과한다. 국경선처럼 엄격한 검문이 이루어지는 곳은 아니지만, 외부인들은 허가가 있어야 들어갈 수 있다. 고객의 집에 초인종을 누르고 기다리다가 허락받은 후에 안으로 들어선다. 제니아는 그들의 넓은 집에서 안마침대만큼의 조그만 공간을 차지하게 된다. 마치 넓은 바르샤바에서 작은 집에서 거주하는 제니아처럼 말이다.


그는 그 공간에서 항상 무언가를 보고 듣는다. 시시 껄껄한 동네의 가십거리를 알게 되기도 하며, 그들이 무엇을 진정으로 갈망하는지도 엿볼 수 있다. 고객들은 은연중에 우크라이나 사람들을 멸시하는 발언을 하기도 하는데, 제니아는 '그들'과 다르다며 무마하려고 한다. 또는 가족들에게 무시당하는 치부를 제니아에게 들키기도 한다.


그들은 아픈 부위를 제니아에게 말한다. 그에게서 풍겨오는 소나무 향을 맡고, 그의 손가락이 뭉친 곳을 풀어줄 때 그 어느 때보다 편안함을 느낀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그들이 겪고 있는 정신적인 고통도 호소하게 된다. 그들은 벌거벗은 몸 위에 타월을 올려놓은 채 안마를 받는다. 그의 작은 공간 속에 들어온 그들은 육체뿐만 아니라 실 한 올 걸치지 않은 속마음을 제니아에게 드러낸다. 그리고 우리들은 제니아를 통해서, 혹은 이 영화의 힘을 빌려서 그 모습을 관찰한다. 다만, 우리는 제 옷을 입고, 심지어 자신은 그들과 다르다는 가면을 쓴 채로 영화를 관람하기도 한다.


출처: 네이버 영화 '첫눈이 사라졌다(Never Gonna Snow Again)'




아이들
The children


제니아의 안마 실력와 최면요법이 주택단지 내에 입소문이 난다. 21, 33호 그리고 별도의 번호가 붙지 않은 집에도 제니아는 드나들며 안마하게 된다. 고객의 자녀들도 자연스럽게 만나게 되는데, 이 아이들의 눈빛과 행동이 예사롭지 않다.


그가 처음으로 방문한 '마리아'의 집에서 '블랑카'라는 어린아이를 만난다. 블랑카는 어머니인 마리아가 안마를 받을 때, 그것을 볼 수 있는 곳에 앉아서 그림을 그린다. '에바'의 아들도 이처럼 안마를 받는 어머니와 멀지 않은 곳에 앉아있다. 이들은 제니아와 어머니가 하는 이야기를 듣고 있다가, 말을 보태기도 하고 교정해 주기도 한다.


한편 33호에 사는 '마렉 노즈스키'는 '비카'의 남편이자 암 투병 중에 있었다. 화학요법을 포함한 다양한 치료를 받아봤지만, 그는 제니아의 안마가 가장 효과적이라고 말한다. 제니아가 이 집을 자주 방문하게 되었고, 자연스럽게 그의 아들 '카츠페르'와도 만나게 된다. 필자는 '카츠페르'라는 이름으로 기억하지만 확실하지 않다.


"나 아저씨가 누군지 알아요."


어느 날 카츠페르는 집을 찾아온 제니아에게 이렇게 말한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 아이는 제니아가 누군지 더 정확하게 말해주지 않는다. 하지만 여러 의미로 해석될 여지가 있다. 마을에서 소문난 안마사라는 의미일 수도, 또는 부모님과 어떤 사이인지 알고 있다는 의미일 수도 있다. 필자는 이 말을 들었을 때, 산타클로스를 떠올렸다. 제니아가 초능력을 갖고 있는 것을 간파하고 있다는 것처럼 들리기도 한다. 어떤 해석이든 상관없이, 아이들은 '아는 자'들이다.


아이들이 그리는 그림도 의미심장하다. 먼저 블랑카의 그림 속에는 자전거를 탄 사람이 등장한다. 이후 자전거와 관련된 사건이 벌어지는 것을 생각해 보면, 아이들은 각성한 관찰자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어떤 사실이 마치 어른들의 전유물인 것처럼 아이들은 진실을 직시하지 못하도록 막는다. 하지만 아이들은 이를 모두 알고 있고, 반면 어른은 이 사실을 모르는 것으로 우매하게 그려진다. 아이들은 어려서 혹은 지식이 부족해서 잘 알지 못한다고 여기는 것은, 마치 우크라이나인들처럼 낯선 곳에서 이민자들을 비유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또한 제니아를 그린 아이들의 그림들이 등장하기도 하는데, 아이들이 바라보는 제니아는 좋은 사람,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그들의 그림 속에서 제니아는 이국적이지도, 이질적이지도 않다. 아이들 그림 속에서, 자신을 슈퍼히어로로 여겼던 제니아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출처: 네이버 영화 '첫눈이 사라졌다(Never Gonna Snow Again)'




눈과 먼지
Dust like snow


제니아 집의 한 벽에는 어머니의 사진이 걸려있다. 어머니가 벤치에 앉아 어딘가를 응시하고 있는 사진이다. 제니아는 종종 잠을 못 이루고 이 사진을 통해서 과거를 회상한다. 이미 언급된 것처럼 제니아의 고향은 체르노빌이 있던 프리피야티다. 그는 돌아갈 고향도, 그 고향에서 함께 살던 어머니도 잃었다.


그가 뛰어난 최면 능력을 갖게 된 것은 체르노빌 원자력 사고와 관련이 없을 수도 있지만, 이 영화는 계속해서 체르노빌과 제니아를 양분할 수 없도록 이끈다. 제니아가 체르노빌 사건보다 1년 먼저 태어났고, 최면이 그의 선천적인 능력이라면 원전 사고와 별개일 수도 있다. 원전 사고로 인해서 공기 중에 수없이 떠다니는 분진을 눈처럼 좋아하는 제니아의 모습을 보면 더욱더 연관 짓게 된다. 자신을 슈퍼히어로라고 여겼던 그는, 끔찍한 사고로 초능력을 얻기도 했고, 그것으로 인해 소중한 것을 잃어버리기도 했다. 여기에 더해, 그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많은 사람들이 있다. 제니아는 체르노빌이라는 절망에서 생겨난 희망 같은 존재가 된다.


"당신의 불행, 고통, 병이 제 손으로 전달됩니다.

검은 물이 발에 흐르고, 숨을 쉴 때마다 가벼워집니다. 먼지처럼."


검은 물, 먼지처럼 음산한 단어를 사용했음에도 불구하고, 제니아가 최면을 걸때 읊는 말은 고요하고 평화롭게 느껴진다. 그래서인지 이 말을 듣고 빠져든 최면 속에서 그들은 평온을 찾는다. 그들이 최면에서 보고, 만나는 것은 인물마다 다른게 그려진다. 그리워하는 상대를 다시 만나기도 하고, 어릴 적 자신을 보기도 한다. 그들이 최면에 걸려 도착한 장소가 영화 초반에 등장한 검은 숲인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곳에서 걸어 나온 제니아를 생각해 보면, 검은 숲은 그의 고향을 의미한다. 프리피야티에는 원전 사고 이후에 출입이 금지된 숲이 존재한다. 숲 자체가 피폭되어 모든 생물이 죽어버려, 소나무가 썩지 않고 붉게 변해서 붉은 숲이라고 불린다. 그리고 그곳에는 제니아가 좋아하는 눈이 내린다.


영화의 제목이 '첫눈이 사라졌다'인 이유에 대해서도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이 영화는 체르노빌 사고와 분명하게 연결되어 있지만, 그 사고가 전부인 재난 영화는 아니다. 이를 바탕으로 제목을 보면, 원전 사고가 생태계와 기후를 교란시킨 것처럼, 앞으로 미래에 기후가 재앙처럼 변할 것이라는 메시지처럼 읽힌다.


제니아는 사람들의 힘든 마음을 먼지, 눈, 가루의 이미지로 어루만진다. 영혼이 가루처럼 변해서 사라지는 것으로, 이승을 떠나는 인간을 표현하기도 했다. 또한 영화의 초반에서 블랑카는 올해에는 눈이 내리지 않을 것이라고 제니아에게 말했다. 눈이 위로의 의미라면, 이제는 더 이상 사람들은 위로받지 못할 것이라는 뜻으로 들린다.


제니아는 손으로, 그리고 최면술로 사람들의 힘든 마음을 위로한다. 하지만 정작 본인은 비참했던 유년 시절에 사로잡혀 힘겨워한다. 제니아는 안마로 육체적 피로를 스스로 풀 수도, 최면으로 정신적 트라우마를 혼자서 치유할 수도 없다는 한계를 갖고 있다. 마치 의사가 환자는 치료하지만, 정작 본인의 질병은 치료 못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런 제니아가 힘든 이들을 돕기 위해 눈을 선택한 건, 눈 덮인 그 모습 때문일지도 모른다.



지난밤에

눈이 소복이 왔네

지붕이랑

길이랑 밭이랑

추워한다고

덮어주는 이불인가 봐

그러기에

추운 겨울에만 내리지


윤동주 「눈」


출처: 다음 영화 '첫눈이 사라졌다(Never Gonna Snow Again)'





출처: http://www.topstarnews.net/news/articleView.html?idxno=14632509













2021년 10월 07일 더숲 아트시네마


https://movie.daum.net/moviedb/main?movieId=148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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