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한 없는 중재

쿠오바디스, 아이다(Quo vadis, Aida?, 2020)

by 우린

2021년 5월 18일 화요일, CGV 압구정에서 '쿠오바디스, 아이다'를 관람했다. 지난 시간에 '레 미제라블(Les misérables, 2019)'에 나오는 '중재'의 의미를 다뤄봤는데,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이 영화가 떠올랐다. 시기상으로도 비슷하게 관람했기 때문에 더 묵직하게 다가오는 작품이었다.


※영화를 보지 않은 분들에게는 스포일러가 될 수 있으니 주의 부탁드립니다.

※이 글은 해당 GV에서 다뤄졌던 내용이 인용되어 있습니다.



movie_image_1.jpeg 쿠오바디스, 아이다(Quo vadis, Aida?)

줄거리

영어선생님이던 아이다는, 세르비아군으로부터 보스니아인들을 지키기 위해 온 UN 군의 통역사가 된다. 민간인을 상대로 공격을 계속한다면 강한 제재를 받을 것이라는 UN은 경고를 보내지만, 세르비아군은 멈추지 않는다. 결국 수많은 보스니아인들은 안전지대인 UN의 캠프로 향한다. 비좁은 UN 캠프는 적은 수의 사람들로 가득 차버리고, 나머지들은 캠프 근처에서 노숙을 하며 구조되기를 하릴없이 기다린다. 세르비아군은 태도를 바꿔서, 보스니아 민간인들에게 빵과 간식을 건네며 망명할 수 있도록 돕겠다고 말한다. 중재를 해야 할 UN 군마저 세르비아군에게 도움을 받는 이상한 상황 속에서, 아이다, 우리들은 어디로 가야 하나요?




권한 없는 중재
Mediation without right


영화는 UN과 보스니아인들이 대화하며 시작된다. 이미 세르비아군은 민간인들을 상대로 많은 살상과 공격을 자행한 후였고, UN 군은 이런 세르비아군에게 폭격을 가할 것이라고 강한 제재를 경고한다. 보스니아인들은 UN 군이 더욱 적극적으로 중재를 해주길 원했고, 이에 소령 롭의 대답한다.


"나는 그저 피아니스트일 뿐입니다."


있는 그대로 통역을 하자, 보스니아 사람들은 UN의 숨은 뜻을 다시 묻고, 아이다는 답한다.


"주어진 악보를 연주하듯, 의견을 전달하는 것뿐이라는 거죠."


소령 롭이 생각하는 '중재'의 의미가 이 대사에서 잘 드러난다. 양쪽의 의견을 전달하고, 그 사이의 평화를 수호하는 것이다. 하지만 피아니스트 롭이 말하는 평화는 그가 연주할 피아노 곡처럼 짧고, 그의 앞에 놓인 악보의 종잇장처럼 얇다.


세르비아군은 UN의 경고를 무시하고 또다시 민간인들을 공격했고, 시장도 사살했다. 예고되었던 UN 군의 공중폭격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결국 보스니아인들은 폐허가 된 마을을 버리고, UN의 캠프로 향한다. 그들과 같은 언어를 사용하고 비슷한 생김새를 가진 세르비아군을 피해서, 낯선 영어를 사용하는 다른 인종의 UN 군에게 도움을 청한다. UN 군에게서 얻을 수 있는 것이 눈에 보이지 않는 보호라 하더라도, 그들에게는 선택권이 없다.


UN 군의 무능력함을 알게 되자, 자신을 피아니스트라고 말한 소령이 매우 무책임하게 보일 것이다. 하지만 애당초 소령에겐 책임만 주어졌을 뿐, 권한이 없었다. UN 안전보장이사회는 항공 봉쇄와 자산동결 등 제재를 명했고, 이에 연방군은 철수했으나 세르비아군은 이에 굴하지 않은 것이다. 사실상 UN의 개입은 여기서 끝나게 된다. 당장 UN 캠프에 필요한 식량과 물품이 동이 나고 있는 상황에서, UN 본부는 보스니아 민간인들뿐만 아니라 이 캠프에 파견된 군 또한 외면한다. 이후 세르비아군이 민간인 대표단과 협상을 요구하자, 대표단을 꾸려 UN 군은 협상 장소로 향한다. 하지만, 협상이 이루어지는 동안 UN 군은 중재의 역할에서 벗어나기 시작한다. 소령은 민간인들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해서 망명자들을 호위하겠다고 나서지만, 호위할 버스도 기름도 없었다. 이에 세르비아군은 자신들이 알아서 망명하는 민간인들을 호위하겠다는 신뢰할 수 없는 제안을 하고, 이에 반대한 소령은 결국 호위할 수 있는 기회를 간청하듯이 얻어낸다. 그리고 UN 캠프에서 사용할 물자들도 지원받는 굴욕을 당한다. 악보대로만 연주해야 할 피아니스트, 이미 시작했기에 마지못해 연주를 이어나간다.


반면 협상이 진행되는 도중 세르비아군은 책임자가 자리를 비운 캠프에 무단으로 진입한다. 이들은 민간인들 중에 세르비아군에게 총구를 겨누었던 군인이 없는지를 확인한다는 구실로 캠프 안을 수색한다. 이때 캠프 안에는 겨우 성년이 된 듯하고, 울음을 참지 못하는 몇 명의 UN 군도 보인다. 캠프 안의 사정은 가축의 사육장과 다름없는 모습을 확인하자, 세르비아군은 음식을 나눠주기도 한다. 이후 민간인들은 남자와 여자로 구분되어 세르비아군이 마련한 버스에 올라탄다. 호위를 하겠다던 UN 군은 끝내 민간인들의 안전을 보장하지 못하게 된다. 결국 피아니스트에게 주어진 곡이 끝나게 된 것이다.


출처: 네이버 영화 '쿠오바디스, 아이다(Quo vadis, Aida?)'




아이다의 통역
The translation made by Aida


아이다는 UN 캠프 안에서 보스니아어를 영어로 통역하는 일을 맡게 된다. UN 군도 네덜란드 출신이고, 영어를 얼마나 유창하게 구사하는지와 관계없이, 이 캠프 안에서 영어가 모국어인 사람은 적거나 없는 것으로 보인다.


아이다는 통역사로서의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해낸다. 보스니아의 협상단과 UN 군이 마주할 때에도, 통역과 해석만 전달한다. 영어를 잘 듣고 보스니아어로 잘 통역한다. 하지만 그녀의 마을이 세르비아군에게 함락당하자, 그녀에게 변화가 생긴다.


아이다의 가족들의 생사가 걸리자, 그녀는 가족의 편에서 통역을 하기 시작한다. 그녀의 가족을 UN 캠프 안으로 데리고 오기 위해서, 자신의 의견을 강하게 전달한다. 마음속에서 들리는 보스니아어를 꺼내 영어로 전달한다. 또한 UN이 자신을 보호해 줄 거라는 강한 믿음을 보이며, 가족들에게도 UN을 믿으라고 피력한다. 결국 그녀는 자신의 남편을 민간인 대표단의 일원으로 포함시키는 조건으로 가족을 캠프 안으로 들이는 데에 성공한다. 그녀는 자신이 UN에서 통역사로 일하고 있는 것이 참 다행이라고 여긴다.


한편 세르비아군이 따로 통역사를 준비하면서, 아이다는 협상에 따라가지 못한다. 그녀는 그들의 협상 내용을 듣지 못하니, 통역 또한 하지 못한다. 보스니아 사람들은 망명도 선택할 수 있다는 협상 내용을 남편에게 전해 듣는다. 그러자 그 옆에 있던 또 다른 민간인 대표는, 그것은 협상이 아닌 통보처럼 보였고, 그들이 제안한 망명 또한 굉장히 미심쩍다고 말한다. 이후 아이다는 민간인이 총살당했다는 목격담을 듣게 되고, 당장 UN 캠프에 고발한다. 하지만 그녀가 믿어왔던 UN은 그녀에게 유언비어를 퍼뜨리지 말고, 가서 할 일을 하라고 한다. 이에 보스니아 민간인 대표들은 UN의 간부가 영어로 무엇을 이야기했는지 묻지만, 아이다는 이것을 통역하지 않고 뒤돌아서 나간다.


영화 초반의 그녀는 통역사로서 영어와 보스니아어를 전달하는 수동적인 모습을 보인다. 하지만 영화가 전개되고, 세르비아군의 만행이 계속될수록 그녀는 적극적인 태도로 개입한다. 하지만, 보스니아 말이 아닌 영어로 조국을 지키는 아이다는, 모국어가 아닌 영어로 내전에 개입한 UN 군처럼 아무것도 수호하지 못하게 된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이는 언어 구사능력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일이다. 영화 속에서도 UN과 보스니아는 언어적인 오해 없이 모든 대화가 수월하게 이루어진다. 즉, 겉으로는 대화가 잘 이루어졌더라도, 그 대화의 이면을 들여다보지 않은 세계의 무관심이 수많은 민간인의 죽음을 가져온 것이다.


movie_image.jpg 출처: 네이버 영화 '쿠오바디스, 아이다(Quo vadis, Aida?)'




그래서 보기만 할 것인가
Will you just leave it?


평범하던 한 사람이 단 한순간만에 영웅이 될 수 있다. 반대로 그 영웅이 다시 무능력을 느끼며 평범해지는 것 또한 금방이다. 여기서 말하는 영웅은 초능력을 갖고 있는 것도 아니기에, 이는 영화 속에서만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아이다는 이렇게 영웅이 되었다. 영어교사였기에 UN에서 통역사로 일하는 것은 큰 변화는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비참한 내전 속에서 구해야 할 가족이 생겼다. 아이다는 수많은 난민 속에서 자신의 가족을 찾으려고 고군분투한다. 조금이라도 높은 곳으로 올라가 개미처럼 새카맣게 모여든 사람들을 향한 그녀의 시선은 매우 제한적이었다. 남편과 아들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도 한정적이었다. 갖은 노력 끝에 그녀는 가족들을 품에 안을 수 있었고, 가족을 지켜낸 영웅이 되었다. 그다음은 어느 산모였다. UN의 의료진과 함께 산모의 순산을 돕고, 그녀는 산모와 아이의 영웅이 되었다. 그리고 캠프 밖에 있는 수많은 보스니아인들의 영웅이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한순간에 평범한 보스니아 사람으로 돌아와, 자신의 가족 그리고 자신의 목숨마저 타인에게 맡겨야 했다.


이 영화를 보고 있는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영화를 보는 동안은 완벽한 제3자로서 안타까움만 표현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저 보는 행위만 할 수 있는 우리에게, 아이다는 정말로 그러한지 눈을 맞춘다.


현재도 많은 사람들이 살상되고 있으며, 나라를 잃을 위기에 처해있다. 지중해를 넘어 유럽으로 향하는 난민들, 그리고 미얀마와 홍콩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상황들을 떠올려보자. 그럼 아이다의 시선이 곧, 우리의 시선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처음에는 주인공을 따라서 우리도 영화를 볼 것이다. 주인공의 시선이 머무는 곳에 제한시켜서 영화 속으로 빠져들어간다. 점차 익숙해지면 우리의 눈에는 많은 것들이 보이게 될 것이다. 아이다는 보스니아 사람들을 쳐다보는 것에서 멈추지 않는다. 처음에는 국한되어 있었지만 그녀는 생명들을 구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그녀가 혹은 UN 군이 수많은 생명의 손을 놓쳐버린 까닭은, 세계인들이 보스니아 내전을 그저 바라보기만 했다는 것이다. 세계인은 내전이 일어나고 있는 상황에 있지도 않은 사람이지만, 무관심으로 뼈아픈 결과들을 만들어낸다. 과거 보스니아의 참혹한 상흔을 기록하기 위해서 이 영화가 만들어진 것은 아닐 것이다. 이 영화를 다 본 당신에게 아이다는 묻는다. 이제 당신은 어디를 어떻게 볼 것인가를 묻는다. 그리고 한 가지 더. 그래서 보기만 할 것인가?


출처: 네이버 영화 '쿠오바디스, 아이다(Quo vadis, Aida?)'





출처: 다음 영화 '쿠오바디스, 아이다(Quo vadis, Aida?)'














2021년 05월 18일 CGV 압구정


https://movie.daum.net/moviedb/main?movieId=143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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