팜 스프링스(Palm Springs, 2020)
2021년 8월 5일 목요일, CGV 용산아이파크몰에서 열린 '팜 스프링스' 시사회에 다녀왔다. 어김없이 장르와 줄거리 없이 영화를 관람했다.
※영화를 보지 않은 분들에게는 스포일러가 될 수 있으니 주의 부탁드립니다.
※해당 시사회는 키노라이츠에 응모 및 당첨되어 참석할 기회를 얻게 되었습니다.
문제만 일으키는 인생을 살아왔다고 생각하는 '세라'는, 팜 스프링스에서 열리는 동생 '탈라'의 결혼식에 억지로 참석하게 된다. 그녀는 처음 만난 '나일스'와 어느 사건에 휘말려 신비한 빛을 내뿜는 동굴로 걸어들어가고, 그 순간 그녀는 결혼식 아침에 침대에서 눈을 뜨게 된다. 나일스와 함께 같은 날에 갇혀버린 세라, 과연 이 둘은 영원한 반복 안에서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을까?
어제, 오늘 그리고 내일
Yesterday, Today and Tomorrow
나일스에게는 말 그대로, 매일 같은 하루가 반복된다. 얼마나 반복되었던지, 그는 결혼식 하객들의 말과 행동을 모두 외우고 있다. 물론 그도 많은 방법을 통해 벗어날 시도를 했지만, 그의 일상을 되찾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래서 과거를 잊고, 미래는 오지 않는 것으로 단정 지었다. 어차피 어제와 같은 오늘이 또 오늘 같은 내일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의 이런 생각은 먹던 '초콜릿 바'로 표현된다. 베어먹은 부분은 이미 배속으로 들어갔기에 과거다. 달콤한 맛은 다 봤고, 눈에 보이지도 않으니, 과거는 이제 의미가 없다. 그가 집중하는 부분은 초콜릿 바의 남은 부분이다. 눈으로 보이기도 하고, 앞으로 먹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남은 부분을 비교적 먼 미래로 볼 수도 있지만, 그는 이를 가까운 미래 즉, 현재라고 여긴다. 나일스는 이런 현재에 사로잡혀 반복하는 삶에 적응했다. 어차피 현재는 과거가 되지 못한 채 사라질 것이기에 그는 무엇이든 행동한다. 어느 순간부터 그는 결혼식 이전에 어떤 직업을 갖고 있었는지 잊어버린 것도 당연하다.
반면 세라는 전체를 알고 싶다면 과거 역시 알아야 한다고 말한다. 초콜릿 바의 완전한 모습뿐만 아니라, 인생을 볼 때도 마찬가지다. 과거가 있어야, 현재와 미래가 온전해진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녀에게 남은 것은 엉망이 된 과거뿐이다. 동굴로 들어간 이후로는 그녀의 현재가 미래도 흘러가지도 않고 과거로 남지도 않기 때문이다. 이에 그녀는 어떻게든 내일이 올 수 있도록 하려고 노력한다.
나일스에게만 반복되던 하루가 우연히 세라에게도 덮쳤다. 나일스에게는 세라와 공유할 과거가 생긴 것이다. 자고 일어나기만 하면 사라지던 과거가, 세라에 의해 기억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세라는 과거에만 집중하지 않고, 현재를 즐기기 시작했다. 어떤 과거를 갖고 있든 항상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느 날 이 무한반복에서 어떻게든 빠져나가겠다고 선언한 뒤, 나일스는 세라를 보지 못한다. 그녀의 부재 때문에 나일스는 '내일'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그녀와 함께 했던 시간들을 추억하고 그리워한다. 하지만 시간은 여전히 결혼식 날이다. 반복되는 시간 속에서도 나일스는 이전에는 못 느끼던 '그녀가 있던' 과거와 '그녀가 없는' 미래를 체감하게 된다.
고통은 진짜
Real pain
시간의 섭리를 따르는 일상으로 되돌아가기 위해 세라는 사막을 헤맨다. 이때 나일스가 자신은 신이라고 외치고, 지진이 일어난다. 물론 나일스는 항상 같은 시간에 일어나는 지진을 알려준 것일 뿐, 신이 아니다. 신이 아닌 그들에게는 당연히 제약이 있다. 밤에 잠들거나 죽었을 때 아침으로 돌아가 하루를 다시 시작하겠지만, 그에 따르는 고통은 실제로 느껴진다는 것이다. 나일스가 세라에게 자살을 권하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나일스는 이런 고통을 피하며 하루를 최대한 안전하게 보낸다. 아침에는 피자 모양 튜브에 올라타서 맥주를 마시고, 결혼식 때의 지루함만 견딘다면, 꽤 괜찮았던 날인 것이다. 어쩌다 로이를 만나게 되는 날을 제외하고, 그는 몸을 사린다. 하지만 나일스와 함께 세라가 시간 속에 갇힌 뒤에는 그녀의 호기심 때문에 여러 고통을 다시 겪어야 했다. 그에게 세라는 어떤 고통에도 꿈쩍도 하지 않는 것 같이 보였다. 이런 겁 없는 그녀가 어느 날부터 반복되는 날들을 끊어내려고 노력하자, 나일스는 자신과 계속 같은 시간에 머물 것을 설득한다.
'고통은 진짜'라는 나일스의 뼈아픈 조언은 역시나 세라에게도 적용되는 말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힘들어하는 고통은 육체적이 아닌, 정신적인 고통이었다. 매일 아침 그녀는 낯선 방에서 어떤 사람이 화장실에서 샤워하는 소리를 들으며 눈을 뜬다. 결혼식 전날 다른 사람의 애인과 그녀가 불장난을 즐긴 것이다. 수많은 날들이 반복되고, 그중에서는 나일스와 재밌고 근사한 날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매일 같이 그녀가 저지른 과오를 뉘우치며 하루를 시작했다. 그녀의 인생이 엉망진창이라는 것을 계속 인정해야 했던 것이다. 그녀가 과거에 집착하게 된 이유가 여기 있는 것이다. 되돌아가는 시간 속에서 '오늘'은 매일 바꿀 수 있지만, '어제'에 대해서는 그녀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없음을 깨닫는다. 그래서 그녀는 '내일'을 되찾아 '어제'로부터 멀어지고 싶어 한다.
내 인생의 최고의 날!
The best day I've ever had!
결혼식에서 우연히 만난 나일스와 로이는 짜릿한 하루를 보낸다. 하지만 그날 이후로 로이는 나일스에게 어떤 고통을 가져다줄지 고민하고 실행하는 '천적'이 된다.
나일스는 어떤 이유에선지 평범한 날에 갇혀버렸다. 여자친구의 외도를 두 눈으로 목격하는 날이었으니, 어쩌면 최악의 날에 묶였다고도 할 수 있다. 반면 로이는 오늘이 자신 인생의 최고의 날이었다고 말한다. 시간이 멈췄으면 하는 로이의 마음을 읽은 나일스가 그에게 동굴로 들어가라고 알려준다. 로이는 세라보다 앞서서 나일스와 함께 결혼식 날에 갇힌 것이다.
로이는 최고의 날이 반복될 수도 있음에도 불구하고, 호시탐탐 나일스의 목숨을 노린다. 어차피 무슨 일을 겪든 나일스는 침대에서 다시 눈을 뜰 테니, 최선을 다해서 고통을 선사한다. 로이가 나일스와 끝내주는 날을 보낸 것은 사실이지만, 시간이 흘러가지 못하고 고여있음에 화가 난 것이다. 하지만 계속되는 반복에 지쳐 복수를 관두고, 결국 그는 날마다 주어지는 일상에 만족하기로 한다. 그는 그저 영원히 크지 못할 자신의 아이들이 정원에서 노는 것을 바라보며 하루를 보낸다.
형편없는 하루를 보내던 나일스, 그리고 최고의 날을 보낸 로이 모두 하루로만 한정된 시간을 싫어한다. 현재가 행복한 것은, 과거보다 낫기 때문이고, 미래가 기대되기 때문이다. 나일스의 쾌감 넘치는 감정들도 반복 앞에선 누그러든다. 자신을 이런 저주에 합류시킨 나일스를 향한 로이의 분노도 사그라든다. 시간은 분명히 '오늘'에 멈춰있지만, 그들의 경험은 강처럼 흘러가고 모래처럼 쌓인다.
2021년 8월 05일 CGV 용산아이파크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