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렌치 디스패치(The French Dispatch, 2021)
2021년 11월 13일 토요일, CGV 판교에서 열린 '프랑스 디스패치' 프리미어 상영에 참석했다. 그리고 11월 19일 금요일 롯데시네마 월드타워에서 열린 이동진 평론가의 GV에도 참석했다. 어느 곳에선 저널리스트에게 바치는 헌정 영화라고 일컫고, 또 어느 곳에선 가장 웨스 앤더슨 감독스러운 영화라고 평가한다. 필자는 이를 예술에게 보내는 사랑 편지라고 말하고 싶다. 웨스 앤더슨 감독은 잡지 또한 예술의 장르로 보았고, 그럼으로써 그 잡지가 다루는 소식들 또한 예술로 인정한다. 이렇게 예술은 또 한 번 한정되지 않음을 보여주었다.
※영화를 보지 않은 분들에게는 스포일러가 될 수 있으니 주의 부탁드립니다.
※이 글은 GV에서 언급된 내용이 인용되어 있습니다.
평소처럼 잡지 '프렌치 디스패치'의 발간을 앞두고 있던 어느 날, 편집장 '아서 하위처 주니어(Arthur Howitzer Jr.)'가 별세한다. 갑작스러운 죽음과 그의 유서 때문에, 이번 발간이 마지막 발행본이 되어버린다. 4개의 기사를 쓴 기자들과 직원들은 프렌치 디스패치의 대미를 장식한다.
십자말풀이
The crossword
편집장 아서는 미국인이었지만 여행을 계기로 프랑스의 도시 '블랑제'에서 프렌치 디스패치를 창간한다. 그의 날카로운 안목으로 기자를 채용하기도 했으며, 기존의 분량을 훨씬 넘는 기사를 원문 그대로 실으라는 결정을 내릴 정도로 대범한 인물이다. 이런 그가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나게 되고, 그의 단호한 유서가 공개된다. 인쇄기는 녹여서 처분할 것. 스태프와 기자들을 해고하고 그에 따른 보너스를 챙길 것. 그리고 영구적으로 잡지 발행을 중지할 것.
이 대사를 듣자마자 프렌치 디스패치를 비유할 대상들이 머리에 한꺼번에 떠올랐다. 그중에서도 아서는 십자말풀이의 가장 가지가 많이 뻗어나가는 단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아서는 창업자이기 때문에 '시작'에 해당하는 인물이기에 나무의 뿌리가 가장 먼저 떠올랐지만, 그와 기자들의 관계는 흙 속의 뿌리에서 이파리로 자라나는 한 방향의 성장과는 차이가 있다. 그들은 긴밀한 대화를 통해서 원고를 다듬고 확장해나간다. 그리고 아서를 나타내는 단어 또한 한 단어로 고정된 것이 아니라 변화가 있던 것으로 그려진다.
단지 그가 이 잡지의 시작이었기 때문에 십자말풀이를 떠올린 것은 아니었다. 우리가 십자말풀이를 할 때 가장 가지가 많이 뻗어 나가는 단어부터 추측한다. 하지만 이것이 단 한 가지의 정공법은 아니다. 사실 정확한 답을 적을 수 있다면, 십자말풀이에는 풀이 순서가 필요 없다. 마지막 발간호의 내용을 살펴보면, 역시 아서의 별세에 대한 부고로 첫 글을 시작한다. 하지만 그 부고는 아서 본인이 읽어보거나 검토한 것이 아니다. 이는 반대로 프렌치 디스패치의 기자들과 직원들이 적어 내려간 글이다. 다른 단어로부터 차근차근 적혀내려가, 가장 마지막에 아서의 단어가 완성된다. 그의 긴 여행 또한 그동안 실렸던 프렌치 디스패치의 기사들로 가득 채워져서 마무리된다. 그는 블라제에 온 이래로 처음으로 캔자스로 돌아갔고, 그곳에서 그의 장례식이 치러졌다.
예술이 살아나는 순간들
Colorful moments
도입부의 아서를 위한 부고를 제외하면, 마지막 발행본은 크게 4개의 기사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각 기사에는 예술이 살아나는 순간들이 담겨 있다.
첫 번째는 '허브세인트 새저랙(Herbsaint Sazerac)' 기자가 '앙뉘' 지역을 묘사하는 기사다. 기자의 독특하고도 논리적인 표현들로 앙뉘는 소개된다. 그 예로 이 지역의 강설량을 설명하는 부분이 있다. 눈이 쌓이는 정도를 나타내는 길이가 아닌, 맨눈으로는 보이지도 않고 순식간에 녹아버리는 아주 작은 단위로 나타낸 것이다. 강설량의 부피를 눈송이 한 개의 부피로 나누면 간단하게 개수가 나올 테니, 그리 터무니없는 측정법도 아니다. 이처럼 단순히 수치로 표기될 정도로 작은 내용도, 예술가의 눈에는 다르게 보인다.
두 번째는 천재 작가 '모세스 로젠탈러(Moses Rosenthaler)'의 생애를 다룬 'J.K.L 베런슨(J.K.L. Berensen)' 기자의 글이다. 살인죄로 교도소에 수감된 모세스는 긴 형량 중에 구강세정제를 정량보다 많이 마시는 것 외에는 아무런 행동을 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취미 미술반에 찾아가게 된다. 같은 교도소에 있던 '줄리안 카다지오(Julien Cadazio)'는 수많은 죄수들의 작품들 중에서 모세스의 추상화를 작품을 미술의 새로운 흐름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의 야욕으로 세계 사람들이 그의 작품에 열광하게 된다. 이후 작품 수집가이자 줄리안의 대모인 '업셔 클럼펫(Upshur "Maw" Clampette)'이 나서서 모세스의 작품을, 말 그대로, 통째로 구입한다. 두 번째 기사에서는 예술의 많은 것들을 비유적으로 말해주고 있다. 모세스가 죽음 대신 선택한 것이 미술 작업이었다는 점, 예술가가 어떻게 영감을 얻는지 그리고 예술은 어떻게 발굴되는지에 대한 많은 것들이 함축되어 있다.
세 번째는 '루신다 크레멘츠(Lucinda Krementz)' 기자가 전하는 '68 학생운동'에 대한 내용의 기사다. 이는 정치와 시(詩) 면에 속하는데, 그 두 개가 하나의 섹션으로 묶여 있는 것에 주목했다. 이 기사에서 '시'는 도대체 언제 등장하는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필자는 정치적 사건을 시처럼 예술로 바라본 것이라 생각한다. 실제로 이 학생운동은 '사랑의 자유'를 구호로 외쳤고, 제피렐리(Zeffirelli)가 선언문 작성 때문에 고뇌하는 모습은 작품을 만들어나가는 예술가와 다를 바 없다. 한편 루신다는 '언론(Press)' 표식을 달고 다닐 정도로 언론의 중립적인 태도가 중요하다고 항상 강조하는 인물이다. 정치에 있어서, 제3자로 존재하는 것을 '언론의 자유'라고 여길 수 있다. 특히 미국인인 루신다처럼 외국인이거나 외부자로 접근한다면 중립적으로 바라보는 것이 가능할 수도 있다. '택시운전사(A taxi driver, 2017)'의 초반부에서 독일 기자 '피터'의 입장이 그러하다. 하지만 시에 있어서 중립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가? 시는 창작에 있어서, 그리고 낭독에 있어서 결코 중립적일 수 없다. 이처럼 루신다의 기사는 저널리즘이 어떻게 예술에 이끌리게 되고, 사회적인 사건도 예술로 비칠 수 있는지에 대한 고민이 담겨있다.
네 번째는 '로벅 라이트(Roebuck Wright)' 기자의 '네스카피에(Nescaffier)' 경위에 대한 기사다. 로벅은 엄청난 기억력을 갖고 있는데, 일단 글로 적힌 것은 무엇이든 암기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로벅은 있는 그대로의 사건보다 기록된 기억에 집중한다. 그가 취재한 네스카피에 경위는 경찰서장 전용 식당의 수석 주방장이다. 그는 경찰들이 근무 중에 간편하게 식사를 할 수 있도록 메뉴를 고안하는 등 경찰계에 큰 공헌을 한다. '당신 같은 예술가는 꿈에서도 맛을 느끼는가'와 같은 질문을 가져간 로벅은 네스카피에 경위를 일종의 '장인(匠人)'으로 본다. 그리고 그에 대한 답을 얻게 되는데, 이는 편집장 아서의 철칙 '눈물금지(No Crying)'을 다시 생각해 보게 되는 계기가 된다.
이 영화는 대부분의 장면이 명도로만 구성된 흑백 화면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때, 웨스 앤더슨 감독은 예술이 반짝거리는 순간들을 채도를 사용해서 표현했다. 모세스의 작품이 공개되는 순간, 제피렐리가 '줄리엣'과 노래를 듣게 되는 순간 그리고 네스카피에 경위가 만든 음식을 맛보는 순간이 그 예다. 이제 다시 생각해 보자, 앞서 이야기한 인물들 중 예술가가 아닌 인물은 존재하는가?
이방인의 감정
Solitude
편집장 아서의 부고는 위의 문장에서 시작한다. 이는 마치, 프렌치 디스패치 그 자체의 시작을 언급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 문장은 그것이 무엇의 시작인지가 비어있다. 이런 빈칸은 역설적으로 모든 것으로 가득 찬 공간이다. 즉, 모든 인물들의 시작은 휴가에서 비롯되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 휴가지에서 이방인으로서 느낀 감정에서 시작되었다.
영화에 등장하는 기자들은 모두 외부인으로서 블랑제에서 취재를 한다. 이들은 취재 대상과 직접적으로 엮이기도 하며 일정한 거리를 두기도 한다. 여전히 외부인으로 머물든, 내부인으로 관여를 하든 상관없이 그들은 외로움을 체감한다. 특히 루신다 크레멘츠는 본인의 의지로 혼자 지내는 것이며, 글 쓰는 사람에게 방해가 되는 것은 배우자와 자녀라고 완고하게 생각한다. 그는 언론의 중립을 중시하지만, 결국 취재 내용에 가장 깊게 개입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이는 비단 기자들만 느끼는 감정이 아니다. 모세스는 자살을 벗어나기 위해서 10년 만에 다시 붓을 들었고 그의 뮤즈를 만났다. 제피렐리는 자유로운 사랑을 쟁취하기 위해서 학생운동에 매진한다. 그리고 이런 외로움이 가장 짙게 그려지는 것은 잡지의 마지막 기사인 로벅의 기사다.
로벅은 네스카피에 경위를 취재할수록 본인도 느꼈던 이방인의 감정을 발견한다. 즉, 네스카피에 경위와 그 사이의 공통점들을 찾은 것이다. 그들은 백인이 아니며, 특별한 능력이 있었다는 것 그리고 쉽게 털어놓을 수 없는 고민이 있다. 그들에게 이방인의 감정은 소속감을 느낄 수 없어 생기는 외로움뿐만이 아니다. 그들은 살아남으려는 본능과 유사한 노력이 필요했다. 로벅은 일명 '닭장' 안에 수감되기도 했으며, 네스카피에 경위는 죽음의 맛을 보기도 한다. 또한 이들은 남들보다 뛰어난 능력이 있었고, 그것의 진면목을 알아봐 준 이가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타지에서 느끼는 감정은 '새로움'만이 아니다. 새로움이 권태로 변모할 때, 그들과 동화되지 못하는 자기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이는 남들보다 못한 점일 수도 있고, 남들보다 탁월한 점 때문일 수도 있다. 혹은 그저 남들과는 구별되기 때문에 고독을 경험하게 된다. 고독은 곧 예술의 친구다. 칠흑 같은 밤바다에서 빠져나와 폐를 찢을 듯한 숨을 내쉴 때, 한 줄기의 등대를 발견하듯이 고독에서 빠져나온다. 이 빛은 모세스의 뮤즈에게 닿을 수 없는 차가운 빛일 수도 있고, 네스카피에처럼 적응해 내려는 독처럼 따가운 빛일 수도 있다.
2021년 11월 13일 토요일 CGV 판교
2021년 11월 19일 롯데시네마 월드타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