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속 도시이야기 '이퀄라이저 3' 등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20년 정도 전 ‘리더스 다이제스트’에 실렸던 건 분명하다.
할리우드 남자 배우 중 ‘가장 미남은 누구일까’라는 기사였다.
컴퓨터 프로그램을 통해 분석한 결과를 소개했는데 레오나르드 디카프리오도 조지 클루니도 아닌 댄젤 워싱턴이었다.
눈, 코, 입, 귀 모두 잘 생긴 건 물론 위치나 비율이 모두 완벽에 가깝다고 분석해 놓았던 기억이 있다.
컴퓨터도 보는 눈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의 필모그래피는 다양하지만 이퀄라이저만큼 속 시원한 영화는 없는 것 같다.
피가 튀고 충격적인 장면도 곧잘 나오지만 폭력 미학이란 말까지 갈 것도 없이 한 마디로 재미있다.
안톤 후쿠아는 어떻게 만들면 관객들이 ‘재미’를 과하게 느낀다는 걸 너무나도 잘 아는 감독이고 댄젤 워싱턴은 어떻게 연기하면 그 ‘재미’가 배가 되는 걸 잘 아는 배우이다.
1, 2탄과 달리 3탄 배경은 이탈리아다.
그중 프롤로그는 시칠리아섬이 배경이다. (영화의 주 배경인 알토몬데는 사실 가상의 도시이다. 주 촬영지는 아말피해안의 아트라니(Atrani)다.)
폭력미학의 대선배라고 할 수 있는 시리즈 ‘대부’ 역시 시칠리아가 본산이다.
토토의 인생이 한 편의 영화로 비치는 영화 ‘시네마 천국’ 도 시칠리아 체팔루(Cefalu)가 배경이다. 물론 영화에 나오는 상영관은 실재가 아니라 만들어진 것이지만 말이다.
시칠리아는 또 세계 최고의 맛을 자랑하는 올리브 생산지이기도 하다.
로마에서 간다치면 시칠리아의 수도라고 할 수 있는 최대 도시 팔레르모(Palermo)로 비행기를 타고 가는 게 최단 시간이 걸린다.
또 차를 이용하거나 기차를 타고 나폴리, 폼페이, 아말피 등 남부 해안도시를 구경하고 난 뒤 배를 타고 들어가도 된다.
내 경우는 로마에서 기차를 타고 시칠리아로 바로 들어갔다.
정확히는 기차가 바다를 건너 시칠리아에 나를 데려다줬다.
로마에서 출발한 기차는 빌라 산 지오반니(Villa San Giovanni) 항구에서 페리에 실려진다.
페리에는 신기하게도 기차 레일이 놓여 있다. 배 위에 기차가 정차하면 승객들은 기차 안에 있을 수도 있고 기차에 내려서 배 안을 돌아다녀도 된다.
메시나(Messina) 해협을 지나 메시나역에 도착한 기차는 팔레르모를 향해 달린다.
팔레르모에서 시칠리아 여행을 시작하지 않아도 되지만 섬을 한 바퀴 돌고 본토로 빠져나가려면 팔레르모 출도착이 편하다.
시칠리아섬은 여행의 효율성을 위해 차를 빌리는 게 좋다. 섬이지만 오른쪽 핸들이 아니라 한국처럼 왼쪽 핸들이라서 운전이 불편하지 않다.
다만 시칠리아 뿐 아니라 이탈리아 전역이 다 그렇지만 작은 차를 빌리는 게 여러 면에서 유리하다.
로마로 돌아갈 때 비행기를 이용할 계획이었기에 팔레르모기차역에서 다시 공항으로 간 다음 차를 렌트했다.
작은 차를 신청했지만 업그레이드해 준다면서(무슨 이유에서인지도 모르게) 중형 세단 신차를 준다고 했다.
손사래를 치면서 필요 없으니 원래 빌리려고 했던 소형차를 달라고 했다. 그 차가 없으면 그 보다 더 작은 경차라도 달라고 했더니 원래 계약한 차를 내줬다.
새 차라고 좋다고 받았으면 시칠리아 각 도시들의 골목골목을 돌아다니고 거기에 주차를 한다는 건 언감생심 생각도 못했다.
팔레르모에서 시계 반대 방향으로 시칠리아를 돌았다. 처음 간 곳은 시칠리아의 제일 서쪽에 위치한 트라파니(Trapani).
트라파니의 바다는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식으로 표현하면 '바다 구비는 온통 소금밭이어서 피기 시작한 메밀꽃이 바람에 날린 눈처럼 흐뭇한 달빛에 숨이 막힐 지경'인 곳이었다.
그렇다. 트라파니는 염전으로 유명하다. 트라파니 염전은 유럽 최대 규모의 전통 소금 생산지다.
처음 보면 낯설기도 한 풍차와 염전이 그림엽서를 만들어내는 곳으로 고대 페니키아 시대부터 소금 생산이 시작된 곳이다.
다음으로 내려간 곳은 아그리젠토(Agrigento).
시칠리아가 그리스 땅이었을 때부터 만들어진 도시로 부분적으로 무너진 아그리젠토 신전이 도시의 얼굴 역할을 하고 있는 곳이다.
아그리젠토와 더불어 시칠리아 고대 그리스 문명의 중심지는 시라쿠사(Siracusa)다. 시라쿠사는 사실 마피아의 태동지 중 한 곳이기도 하다.
하지만 마피아도 옛날이야기가 됐다. 마피아가 활개 칠만한 경제 상황이 되지 않아 섬의 마피아는 이탈리아 남부로 본거지를 옮겨갔기 때문이다.
말이 나와서 말인데 영화 ‘대부’나 ‘시네마 천국’의 배우나 포스터를 디자인한 라운드티셔츠는 시칠리아 어느 도시를 가든 기념품 가게에 주렁주렁 걸려있다.
대부의 주제가 ‘speak softly love’는 카페 어느 곳에서나 쉽게 들을 수 있고 트럼펫을 들고 노천카페를 돌아다니는 연주자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고차원적이지 않고 대중과 더불어 대중에게 언제나 사랑받는 문화란 그런 것이고 그런 문화의 한 가지가 한 사람에게 밥벌이가 될 수도 있다는 점에서 영화라는 종합예술이 주는 계량화하기 어려운 엄청난 영향력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시라쿠사는 수학자 아르키메데스가 태어난 곳으로 그의 무덤이 있다고 알려져 있고 이런 내용이 영화 '인디아나 존스 운명의 다이얼'편에 나온다.
시라쿠사 숙소 주인이 떠나던 날 아침, 내 손에 건네주던 가루우유와 올리브기름은 잊을 수가 없다. 시라쿠사에서는 손님을 빈손으로 보내지 않는다고 말하던 그 웃는 얼굴 역시 잊히지 않는다.
배낭여행객의 무거운 짐 꾸러미가 더 무거워져서 걷기 힘든 건 나중 문제였다.
그리고 또 한 곳 시칠리아에서 가슴에 남은 곳이 바로 사보카(Savoca)다.
영화 '대부'에서 알 파치노의 설익은 풋사랑으로 이어진 성당 결혼식이 열린 곳이다.
알 파치노가 부하들과 들렀던 곳이자 신부 아버지의 바(bar)인 ‘바 비텔리(bar Vitteli)’와 ‘산 니콜로(San Nicolo)’성당에 가기 위해 우체국 앞에 차를 세우고 보니 미니버스가 뒤 따라와 차를 세웠다.
차에서 백발의 어르신들이 20여 명은 족히 차에서 내렸다. 패키지여행으로 ‘대부’ 촬영지를 보기 위해서 오신 분들이었다.
유럽의 패키지 여행지에서 어르신들을 많이 만났지만 이처럼 원로한 어르신들을 본 건 바르셀로나, 브뤼헤에 이어 손에 꼽을 정도였다.
그들에게 있어서도 영화 ‘대부’는 단순히 마피아 영화 한 편이 아니란 걸 한눈에 느낄 수 있었다. 영화의 추억과 함께 늙어간 그 시간이 애잔해서일지도 모르겠다.
지팡이를 짚고 또 할머니의 손을 잡아 주면서 사보카 마을을 둘러보는 어르신들의 모습은 인생이란 영화의 피날레를 장식하는 스틸 컷이기에 충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