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이 아름다운 건 야경 때문은 아니었다

영화 속 도시이야기 '열혈검사'

by 신천옹

1980년대 중반부터 홍콩 누아르란 이름으로 주윤발, 장국영, 유덕화 등을 주연으로 한 갱영화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롱코트를 입고 라이터 대신 위조지폐로 빨간 말보로에 불을 붙이며 의리 앞에선 죽음도 마다하지 않던 선글라스 낀 이들은 동시대 10~20대 남자들의 우상이었다.

홍콩 도심

그 모습에 매료돼 춥지도 않은 홍콩에서 왜 롱코트를 입었는지 홍콩에는 총격전이 일상화돼 있는지 같은 건 생각도 하지 않았다.


뭐든 그들의 ‘멋진’ 모습을 따라 하는 게 그들처럼 멋있게 보인다고 생각할 때 아니었던가.

드래곤스백 트레일 도중 내려다본 섹오비치

가난한 학생 시절 언감생심 홍콩 여행은 꿈도 못 꾸고 그저 할 수 있었던 건 시장에서 산 싸구려 롱코트를 입고 빨간 말보로만 줄곧 피워댔을 정도였지만 그래도 그 아류인생이 즐거웠던 시절이었다.


나와 같은 ‘아류’ 인생(하류는 아니었다)을 조금이라도 살아봤을 사람들은 아마 그 시절 홍콩누아르 영화를 최소한 비디오테이프로라도 빌려서 모두 섭렵했을 것이다.


세월이 흘러 세기가 바뀌었고 마치 맺힌 한이라도 푸는 듯 돈이 모여지면 뻔질나게 홍콩을 찾았다. 교통카드기능도 있고 편의점 등에서 편리하게 사용할 수 있는 옥토퍼스카드의 충전액은 항상 채워 놓았다.

홍콩섬 코즈웨이베이

사실 항공비와 호텔비가 목돈이었고 나머지는 소소한 식비가 전부였으니 경비 자체가 그리 많이 들지는 않았다. 쇼핑을 하지 않으면 홍콩에서 돈이 그렇게 많이 들 일이 없으니 말이다.


홍콩 지하철 노선은 다 외우고 다녔고 이스트레일 종점 로우(Lo wu)까지 가서 중국 심천에 놀러 간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드래곤스백 트레킹

한국에서 김밥을 사서 N21번 버스를 타고 자정이 넘어 호텔에 도착하자마자 냉장고에 넣고 그다음 날 드래곤스백(Dragon’s back)이나 옹핑트레킹 할 때 갖고 가서 먹기도 했다.


그만큼 물리적이나 심리적 거리가 가까웠던 건 마음속에 담아뒀던 홍콩 누아르시절의 애상이 한몫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홍콩섬 전경

그래서인지 견자단 주연의 영화 ‘열혈검사’에서도 ‘어김없이’ 등장하는 홍콩의 야경을 보면서 잠시 잊고 지냈던 홍콩이 새삼 떠올랐다.


홍콩 야경에 하이라이트인 ‘심포니 오브 라이트’는 2004년부터 시작됐다.


명당은 침사추이 하버시티쇼핑몰 쪽이지만 이제는 홍콩의 야경만 넋 놓고 쳐다보고 있을 때가 아니란 생각이 들어 살짝 우울한 것도 사실이다.

홍콩섬 야경

전 세계에 유래를 찾아볼 수 없었던 일국양제라는 특이한 시스템이 유명무실해졌기 때문이다.


홍콩 반환을 앞두고 1982부터 2년여에 걸쳐 열린 영국과 중국의 협상에서 양국은 일국양제 원칙에 합의했다. 즉, 홍콩이 반환돼 중국의 일부가 되더라도 정치적으로 공산정권이 아니라 민주체제, 경제적으로는 자본주의 체제를 50년 동안 유지할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1997년 홍콩의 중국반환과 더불어 슬금슬금 시작된 중국의 자치권강화로 2014년 우산혁명과 같은 홍콩시민의 반발에도 중국이라는 큰 물결에 홍콩은 지금 '목'까지 잠식된 상태다.

침사추이 뒷골목

나아가 반정부 행위 처벌을 강화한 홍콩 판 국가보안법이 2024년 3월 23일부터 시행에 들어가면서 이제 우리가 알던 홍콩은 외형만 남을 가능성이 높게 됐다.


세계 각국은 외국인의 홍콩 여행과 비즈니스 모두 영향을 받게 될 것이라는 전망을 내놓고 있다. 다행스럽게도 아직까지는 일반 여행자들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것 같다.

스탠리의 머레이하우스

하지만 이런 제도적 변화는 수치화돼서 현실로 나타나고 있어 우려스러운 것도 사실이다.


2025년 UN의 행복보고서에 따르면 홍콩은 조사대상 147개국 중 88위에 이름을 올렸다. 5년 연속 하락한 것으로 홍콩은 이번 조사에서 역대 최저 순위를 기록했다. 참고로 중국이 68위였다.


홍콩 사람들이 다시 예전처럼 행복해질 수 있을까.

홍콩은 지금 멈추어 서 있는 걸까

홍콩보안법 때문에 이야기가 길어졌다.


사실 홍콩은 야경보다 쇼핑 천국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생산공장이 없다 보니 시민들의 의식주와 관련된 제품들 거의 전부를 수입에 의존한다. 이는 홍콩의 지리적, 사회적 여건과 무관하지 않다.


홍콩의 면적은 제주도만 하지만 인구는 12배 정도 많은 750만 명가량 된다.

홍콩섬과 침사추이를 왕복하는 스타페리

문제는 홍콩 전역에 이 인구가 흩어져서 살면 그나마 좀 낫지만 홍콩 인구 대부분은 구도심인 침사추이와 홍콩섬, 신계 등에 모여 산다. 홍콩 면적의 3분의 2 이상이 습지와 산이어서 사람이 살기에 적합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 살 곳도 모자랄 판에 공장을 짓는 건 언감생심 무리다. 그러다 보니 홍콩에 수입되는 공산품은 세금을 물리지 않는다. 홍콩 전 지역이 면세구역이란 말이 나오는 이유다.


하지만 담배, 알코올 30% 이상 술, 메틸알코올, 탄화수소 등 4개 품목은 소비세 형식의 세금이 부과된다.

가장 큰 세금이 부과되는 단 하나의 상품은 바로 자동차다. 등록세 명목으로 고율의 세금이 붙는다.


주차비용도 엄청 비싼 만큼 홍콩에서 차를 몰고 다니는 사람들은 중산층 이상이라고 보면 된다.

란타우 옹핑 트레킹

쇼핑보다 홍콩을 더 매력적으로 만드는 데는 트레킹루트도 한몫을 차지한다.

특히 이제는 많이 알려진 드래곤스백의 경우 아시아 최고의 트레킹코스 중 하나로 유명하다.


케이프 콜린슨 화장장에서부터 토테이완까지(혹은 반대방향으로) 섹오산 길을 따라 바다를 보며 걷는다. 중하급 코스지만 풍경도 좋고 바닷바람도 제법 있어 땀을 닦으며 걷기에 괜찮은 코스다.

빅토리아피크에서 내려다본 홍콩 전경

케이프 콜린슨 화장장이 그렇듯 홍콩 대부분 화장장은 도심에 있다. 아파트가 바로 보이는 곳도 있다. 우리나라 같으면 절대로 볼 수 없는 곳에 위치해 있다는 말이다.


홍콩 사람들은 죽은 영혼들이 이웃에 사는 사람들을 도와준다는 믿음을 갖고 있어서 화장장이 가까이 있어도 크게 개의치 않는다.


그것보다는 인구가 많다 보니 그와 비례해 사망자수 역시 적지 않아 화장장에서 제때 수용이 쉽지 않은 게 더 문제다. 그러다 보니 홍콩의 화장장은 ‘대기’가 필수다.

소호 미드레벨 에스컬레이터 옆 상가

요즘은 많이 나아졌다고 하는데도 2024년 1월에 한 달을 기다렸다는 블로그 사연이 있을 정도다. 과거엔 평균 3개월이 걸렸다고 한다. 화장을 하기까지 오랜 시간 기다리다 보니 정작 장례식을 치를 때 우는 사람을 찾아보기 힘들다. 기다리는 동안 슬픔이 희석되기 때문이다.


홍콩 누아르 영화의 장례식장 장면에서 우는 모습을 보기 힘들었던 건 냉혈한 갱의 죽음이라서가 아닌 것이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죽은 자와 산 자의 유쾌한 공존, 멕시코 시티(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