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3월 27일 수요일
손자는 할머니가 세상을 떠나기 전에 증손주를 볼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다행히 결혼 후 아이가 바로 들어섰고 딸아이가 태어난다. 아이는 누가 봐도 아빠가 누구인지 알 수 있을 정도로 손자를 빼닮았다.
할머니는 아들이 아닌 것이 좀 아쉬웠는지 다음에는 꼭 아들을 낳으라고 말한다. 손자는 아들을 언제 낳을 수 있을지 모르니 오래 사시라고 한다. 손자는 할머니의 건강상태가 늘 마음에 걸려, 언제부터인가 오래 사시라는 말을 자주 하게 된다.
그렇게 첫 아이를 품에 안은 손자는 그 아이가 너무도 신기하고 사랑스러웠다. 아이를 바라보고 있자니 많은 생각이 떠오른다. 아이를 낳아서 기르다 보면 비로소 어른이 된다는 말을 많이 들었고, 그 말을 살아오면서 이해할 수 없던 것들에 대한 이해의 폭이 넓어진다는 의미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손자는 아이를 낳고 기르면서 오히려 자신의 아버지를 더 이해하기 어려워진다. 어떻게 이렇게 사랑스러운 자식을 어머니에게 맡겨놓고 남보다 못하게 대했는지 도무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따뜻하게 대해준 기억도 없고, 생일을 챙겨주거나 선물을 사준 기억도 없다. 오로지 자신을 혼내고 때리던 기억밖에 남아있지 않다. 그리고 생각하게 된다. 자신은 아버지에게 있어 삶의 오점이며 지우고 싶은 흔적일 것이라고.
반면 삼촌들이 느끼고 말할 정도로 할머니의 손주에 대한 사랑은 극진했다. 어떻게 자식들보다 손주를 더 사랑하게 되었을까? 할머니는 오랜 기간 치매를 앓게 되는데, 요양원에 계시는 할머니에게 사람들이 누가 보고 싶으냐고 물어보면 늘 큰 손자라고 답을 했다고 한다.
사랑을 주어야 마땅한 사람으로부터는 버림을 받고, 또 누군가로부터는 지극한 보살핌과 사랑을 받는다. 이 세상에는 일반적인 섭리가 적용되지 않는 사각지대와 그 사각지대를 비추는 빛이 공존하는 것 같다. 어쩌면 사랑이라는 것에 있어서도 총량의 법칙이 적용되는 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