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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영호 Jun 16. 2024

감정

2024년 6월 16일 일요일

완벽하게 찬란한 여름의 정취 속에 도저히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쇼팽 : 녹턴 No.20 C# Minor’를 들어본다. 첼로의 묵직한 음색은 마음속 깊이 묻혀있는 슬픔을 끌어올리고, 바이올린은 비애와 비통함을 길어 올려 가슴을 찢고, 피아노는 모든 슬픔과 한(恨)을 위로하듯 부드럽게 첼로와 바이올린의 울림을 어루만진다.


짙푸르던 하늘빛은 태양의 강렬한 열기로 창백해졌고, 듬성듬성 떼어진 구름들은 힘을 잃고 축 쳐져 느릿느릿 흘러간다. 햇빛을 머금고 생기가 넘쳐나던 나무들도 권태로이 몸을 움직이며 사색에 잠긴 듯이 보인다.


음악 하나에도 다양하고 복잡한 파동이 일어나는 감정을 보고 있으면, 과연 나 자신을 감정의 주체라고 말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스스로 연주할 수 없는 감정에 따라 세상과 나의 삶이 달라 보이고, 때로는 빠지고 싶지 않은 고통 속으로 끌려 들어가는 현상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감정은 내 안에서 일어나지만 의지가 관여할 수 없는 영역, 어찌 보면 잠재의식과 본능에 좌우되는 영역으로 도저히 어찌할 수 없는 영역으로 치부하고 살아야 하는가? 감정이라는 악기의 연주자가 될 수 없다면, 더 편안하고 아름다운 소리를 낼 수 있도록 악기를 고칠 수 있는 것은 아닐까?


이 세상에 태어나면서 부여받은 감정이라는 악기의 원형은 완벽한 것이지 않았을까? 그러했던 악기가 지금까지의 삶의 역사로 인해 변형되고 변질되었다면, 원형의 상태로 되돌릴 수는 없더라도 개선할 수 있지는 않을까?


나에게 있어서는 쌓인 세월만큼이나 지난한 과정이 되겠지만, 아름다운 소리와 울림이 있는 감정의 악기를 가질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해 본다.


[마태복음 6:22-23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몸이 밝을 것이요. 눈이 나쁘면 온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둠이 얼마나 더하겠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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