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학교 다니다 초등학교 졸업한 현직 초등교사가 말하는 학교 이야기
공개수업 이야기를 하다 보니 준비하면서 겪었던 작지만 큰 불편함이 떠올랐다. 당시 내가 근무하던 학교는 본관이랑 후관이 약 20m가량 떨어져 있는, 70년도 넘은 유규한 역사를 자랑하는 학교였다. 한 번은 복도를 지나는데 웬 지렁이가 공중에서 꿈틀거리며 상승하는 장면을 목격했다. 꿈인가 싶어 옆에 있던 다른 선생님한테 샘도 저게 보이냐고 물었다. 둘은 멍하니 서서 대략 5초 정도 매우 활발히 꿈틀거리며 꾸준히 상승하는 지렁이를 봤다. 둘은 동시에, 그 지렁이가 쥐의 꼬리고!! 쥐가 복도 벽을 타고 열심히 열심히 오르는 중임을 깨달았다. 화들짝 놀라거나 기겁하는 대신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 오래된 학교엔 오래 산 쥐들이 정말 별 짓을 다하고, 나도 별꼴을 다 보는구나. 여기서 차로 10분 정도 가면 엊그제 개교 103주년 기념행사를 했다던 학교가 있던데, 혹시 모르니 쥐랑 친해져야겠네.
오래된 학교랑 공개수업 준비의 불편함이랑 어떤 상관관계가 있을까? 칠판이나 티비가 없는 것도 아닌데. 하지만 프린터가 없다면 어떻게 될까? 그렇다. 당시 학교에 프린터는 딱 4대. 교장실, 교무실, 행정실 그리고 복사실에 있었다. 게다가 그 4곳은 모두 본관 1층이다. 내가 수업하는 교실은 후관 2층. 이제 충분한 상관관계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나를 죽이지 못하는 불편함은 나를 강하게 만들었다. 수업에 필요한 활동지나 평가지는 반드시 전날까지 완성한 뒤 내 이메일로 보내야 했다. 그래서 미리 수업을 계획하고 동학년 선생님들과 협의하며 자료를 만들고 공유해나갔다. 드디어 출력하러 복사실에 간다. 컴퓨터에 앉아 로그인을 하고 메일을 열어 자료를 내려받은 뒤, 인쇄 버튼을 누르기 전 마무리 확인도 필수. 하지만 주어진 시간은 길어야 2분이다. 학교에 교사는 20명인데 그들이 쓰는 프린터에 명령을 내릴 유일한 컴퓨터를 내가 쓰고 있기 때문이다. 1교실 1프린터는 선택이 아닌 필수다.
그렇게 강해진 나는 5년 뒤 새로운 학교에 갔다. 2010년대 중반임을 감안할 때 1교실 1프린터를 기대한 내가 그리 잘못되거나 이상한 사람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 학교엔 매우 이상한 교장이 살고 있었다. 교실은 오로지 수업만을 위한 공간이고 모든 수업 준비나 업무처리들은 학년 연구실에서 하라는 명령과 함께 프린터를 학년 연구실에만 둔 것이다. 그 연구실도 무슨 사무실처럼 칸막이로 나눠놓았다. 컴퓨터 책상 3개를 놓고 그 사이에 파티션까지 들어오니 사람이 지나다닐 공간이 매우 좁았다. 누가 앉아서 일하면 나는 몸을 옆으로 돌려야만 통행이 가능했다. 70년 된 학교에 사는 쥐가 된 기분이었다.
하지만 교장은 강해진 나를 과소평가했다. 대충 눈치를 보고 분위기를 살핀 후 시원한 바람이 부는 가을이 왔을 때 나는 동학년 교사들을 선동하여 반란을 감행. 사무실을 가로지르고 서로를 가리던 파티션을 모조리 분리(파손)하여 폐기물 창고로 옮겼다. 컴퓨터 책상 3개 중 가장 큰 녀석도 함께. 남은 2개의 책상은 좌우 벽으로 붙이고 중앙에는 원탁을 놓았더니 비로소 우리에게 서로를 볼 수 있는 연구실이 생겼다. 그 후 이 반란은 학교 전체로 퍼져 모든 연구실의 파티션은 숙청당했고, 1교실 1프린터가 가능한 세상이 왔다.
내가 어떤 세상에 살게 될지, 나는 모르고 결정할 수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어떤 세상을 사는지는 나에게 달렸다. 약간일지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