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시간의 긴 이동 끝에 도착한 바라나시 기차역엔 이제 막 해가 뜨는 시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릭샤 꾼들이 우글거렸다.
마이 프렌드.
투 헌드레드.
원 헌드레드.
‘고돌리아?’ 라고 묻는 내 한 마디에 어느새 내 주변을 둘러싼 릭샤 꾼들은 자기네 마음대로 흥정을 하기 시작했다. 마치 경매장을 방불케 하는 가격경쟁은, 200루피에서 시작한 가격이 반값으로 내려가기에 이르렀고, 내려가는 가격이 마음에 들지 않은 릭샤꾼들은 한 명씩 내 곁을 떠나갔다. 결국 마지막에 남은 몇 명의 릭샤 꾼 중 나의 ‘80루피?’에 ‘노 프라블럼’을 가장 먼저 외치는 릭샤 꾼이 낙찰을 받는 식의 시스템인 것이었다. 그렇게 낙찰 받은 릭샤 꾼은 3키로가 넘는 거리를 나와 짐을 태운 채 맨발로 패달질을 하며 달려간다.
자전거 뒤에 거대한 유모차를 단 것 같은 비주얼의 일명 ‘인력자전거’인 릭샤는 인도의 가장 기본적인 이동 수단이다. 보통은 먼 거리를 이동할 땐 오토바이로 바뀐 ‘오토릭샤’를 타는데, 편리하고 빠르다는 장점도 있지만 무엇보다 머리에 맺힌 땀을 닦아가며 힘겹게 패달질 해가는 릭샤 꾼에게 미안한 감정이 들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거리가 애매한 곳을 혼자 이동할 때 오토릭샤는 가난한 여행자에게 부담스러운 존재가 되었다.
바라나시 역에서 고돌리아로 향하는 이 길이 바로 그러했다. 80루피, 고작 망고 주스 두 개 밖에 사먹지 못하는 그 가격에 할아버지뻘인 릭샤 꾼의 힘겨운 패달질을 바라보고 있자면, 이 가격이 적당한 걸까 하는 생각이 매번 들곤 했다. 아무리 밟아도 제 속도가 나지 않는 릭샤를 오토릭샤들은 가볍게 슝- 하고 지나쳐버렸고, 그 뒤에 앉아 들썩이는 엉덩이를 부여잡은 나는 편하게 더 비싼 돈을 버는 오토릭샤 꾼과 내 앞의 릭샤 꾼의 행복도가 차이가 많이 날지 고민해보곤 했다. 생각이 꼬리를 물어 나와 릭샤 꾼의 행복도를 비교해보다, 행복의 기준에 대해 고민해보려는 찰나 릭샤는 정확한 목적지에 나를 데려다 주었다.
갠지스 강의 첫인상은 말 그대로 대단했다. 기도를 하는 인도인들, 강에서 수영을 하는 이들, 멍하니 앉아 강을 바라보는 이들, 길거리 곳곳에 누구의 주인인지 알 수 없는 똥들, 병든 강아지와 소, 하늘 위를 날아오르는 까마귀 떼, 그럼에도 아름다운 색감을 가진 언제지어진지 모를 고풍 있는 가트들.
‘아 여기가 인도구나. 진짜 인도구나’
상상만 했던 풍경을 직접 마주하는 건 언제나 소름이 돋는 일이었다. 나는 바라나시에 머무르며 장소에도 인격이 존재할 수 있음을 알았다. 여기는 공간이 온 몸으로 ‘내가 인도의 핏줄이다.’라고 소리치고 있는 장소라는 걸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아직 가시지 않은 새벽의 시원한 공기가 좋아 가트 주변을 천천히 거닐고 있을 때였다. 가트 넘어 한 쪽에서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을 보았다. 불을 피웠을 때 나는 연기와 다른, 어딘가 복잡하고 끈적거리는 여태껏 본 적 없는 짙은 검은색의 연기였다. 나는 직감적으로 그 연기가 누군가의 삶과 깊게 연결되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본능적으로 발걸음을 옮겨 연기를 향해 걸었다. ‘버닝 가트’, 바라나시의 화장터를 직접 보는 순간이었다.
그 날 이후로 매일 같이 화장터를 보러 나왔다. 노란, 주황, 흰색 천들로 감싸진 시체들을 무덤덤하게 옮기는 인도인들, 그 안에서 타고 있는 시체들, 나무 향과 뒤섞인 타는 냄새, 불게 타오르는 불과 주변을 가득 매운 검은 연기. 그 모든 광경은 늘 신기하고도 놀라웠으며, 두려우면서도 슬펐다.
힌두교를 뿌리로 삼는 인도인들은 회귀사상을 믿는다. 죽고도 다시 태어난다는 믿음 속에서 다음 생을 위해 현생에 업보를 쌓지 않으려 조심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혹시라도 업보를 쌓게 되었다면, 혹은 인간으로 태어날 수 있을지에 대한 믿음이 부족하다면 그들에게는 또 다른 선택지가 있다. 시바 신의 몸이자 힌두교의 근원지인 갠지스 강에 몸을 담구면 그 업보가 모두 사라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바라나시에 ‘죽으러’ 온다. 몇날 며칠이 걸려서, 지금껏 모아온 돈을 다 써가며 자신의 재 가루를 갠지스 강에 뿌리러 이번 생의 마지막을 이곳에서 보내기 위해 바라나시로 모이는 것이다.
다음 생의 존재를 믿는 이들에게 죽음이란 슬프기만 한 일이 아니었다. 그들에게 고통 없는 죽음은 행복한 죽음이 되기도 했으며, 죽음을 기다리는 일은 새로운 생을 기대하는 또 다른 시작을 준비하는 시간이었다. 화장터에서 눈물을 흘리는 이를 보며 인도인들은 말한다고 한다. 왜 우냐고. 이게 우리의 삶인데, 너도 나도 언젠간 이곳에 누워있을 건데. 울지 말고 이 사람이 네게 어떤 의미였는지, 너는 어떤 의미로 살아가야할 지를 생각해라고. 눈물은 흘리지 말라고. 그들은 삶이 끝날 수 있음을 일찍이 인정했으며, 그렇기에 무덤덤하게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 그들의 죽음을 매일 같이 바라보는 일은 너무도 많은 생각을 들게 했다. 그들의 죽음은 다음 생의 확신이 있기에 신비로웠고, 사람의 육체가 너무도 연약하게 타버린다는 사실이 놀라웠으며, 나또한 언젠가 저 육체들처럼 타 없어질 거라는 사실에 두려웠고, 내게 죽음은 언제나 슬픈 일이었기에 슬펐다. 이곳에서 죽음을 기다리며 매일 같이 누군가의 육체가 사라지는 모습을 바라보는 어느 인도인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좋은 삶을 살아 새로운 삶에 힘든 일을 없앤다’는 힌두교의 교리처럼 나의 지금의 삶이 새로운 삶에 영향을 미치길 바랐을까. 죽고 다시 태어나는 당연한 순서를 아무렇지 않게 받아드렸을까. 현생은 힘들고 어려우니 다시 태어나지 않게 해달라고 빌었던 이는 없었을까. 그들도 두렵진 않았을까. 나도 다음 생을 살 수 있다고 믿는다면, 보다 더 행복한 삶을 살아갈 다음 생의 ‘나’를 위해 현생을 베풀며 살 수 있을까.
하루는 갠지스 강에서 수영하던 한 아낙네가 물에 빠져 죽어, 옆 화장터로 옮겨졌다고 하는 소식을 들었다. 죽음은 이렇게도 갑작스럽고 언제 찾아올지 모른다. 나는 어쩌면 죽는 순간까지도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매일 같이 버닝 가트 한 구석에 앉아, 한 줌 재가 되어 연기 속으로 날아오르는 그들의 육체가 내뿜는 검은 연기를 눈과 코가 매운 줄도 모르고 마구 마셔댔다. 마치 그들의 영혼을 받아들이고 싶어 하는 것처럼, 온 몸으로 연기를 맞으며 하염없이 그들의 장례식을 지켜봤다.
갠지스엔 항상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from.시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