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질랜드 워홀기, 첫번째
마침내 오클랜드행 비행기 탑승 안내가 방송됐다. 승무원도 승객도 너나 나나 할 것 없이 나른한 하품을 빠르게 삼키고 분주하게 움직인다. 이에 따라 나도 펼쳐 놓았던 짐들을 하나씩 배낭에 넣으면서 다소 소란스러운 마음도 함께 눌러 담기 시작했다. 다 싼 배낭과 우쿠렐레를 메고 자리에 놓고 간 것은 없는지 바닥까지 꼼꼼히 살 핀 후에야 천천히 발걸음을 옮긴다. 그러면서 한 손으로 핸드폰을 켜고 사운드 클라우드 앱에 들어가, 황소윤의 혼자남아를 찾아 1곡 반복으로 설정하고 나서야 비로소 탑승구에 오른다.
이건 5년 전 세계여행을 하던 때부터 지금까지, 수십 번의 비행기를 타기 직전에 한 번도 빼먹지 않고 하는 습관이다. 이렇게 하면 비행시간 내내 한 노래를 끊김 없이 들을 수 있다. 물론 결제한 음악앱의 다운로드 기능을 쓰면 번잡스러운 이 행동을 하지 않아도 되지만 나는 사운드 클라우드에만 있는 이 노래만을 듣기 위해 매번 이 일을 반복한다.
언젠가
이 밤에 나 혼자 남아
슬픈 영화를 보며 울다
말 한마디 없는 이곳을 떠나겠지
그리고 옆 사람과 가벼운 눈인사 후에 설레는 마음으로 비행기 벨트를 맨다. 침묵 속의 웅성임 가운데 비행기는 이륙하기 시작하고 몸이 한번 크게 울렁거린다. 와중에도 언제나 그러하듯이 조용하게 익숙한 멜로디가 귀에 흘러 들어온다.
나의 외로움만 혼자남아
다 떠나고 없는 집을 보다
말 한마디 없는 이곳을 떠나겠지
눈을 감고 노래를 따라 언젠가 혼자 죽음을 맞이하는 나를 상상한다. 마지막 잎새에 나오는 주인공 마냥 혼자 침상에 누워, 죽음의 바로 직전에 지난 삶을 헤아리는 그 순간을 말이다. 나는 그때 무슨 생각을 할까? 과거의 나를 두고 후회할까 혹은 참 잘 살았다며 기꺼이 눈을 감을까. 짧은 생각이 끝나면 당장의 삶이 암울해지는 게 아니라 되려 담담한 의지가 차오르고 숨도 가지런해진다. 마치 죽음 앞에서 모든지 할 수 있다는 듯이. 남들이 말하는 내 낭만은 이렇게 죽음 앞에 둬야 자유롭게 제자리를 찾고 생생하게 살아냈다.
이 밤에 나 혼자남아
이 밤에 나 혼자남아
이 밤에 나 이 순간을 기억해 외로이
지금보다 훨씬 더 어렸을 적에 나는 혼자 멋있고 당당하게 걷는 사람보다 수십 명 의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사람을 동경했던 것 같다. 그런 사람이 지금껏 자신의 세상을 올바르게 쌓아왔다고 보았다. 그런 편견을 가진 나였기에 원하든 원치 않든 무리에 속하려고 노력했고 수많은 사람들에게 둘러싼 모습만 남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뭐, 어쩌면 사람의 종특이기도) 하지만 개성시대가 도래할 시점, 혼자서 무언가를 하는 게 ‘멋’이라는 인식이 박혔고 그 ‘멋’을 유지하기 위해 우습게도 나는 무리를 떠나 어딘가 위태로워 보이고 애써 강한 척하는 나에게 반해 혼자 다니기 시작했다. 부끄럽게도 진심으로 ‘혼자’가 좋아서 다니는 게 아니라 그저 그런 나에게 취해 스스로 포장하여 다녔다.
그런 가난한 마음을 깨달은 건 지난 4개월 간 동남아시아를 다니면서였다. 한 달은 다양한 사람들에게 둘러 싸이고 또 다른 한 달은 주로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는 다소 극단적인 인간관계 속에 살았다. 재밌게도 이에 따라 나의 상태도 크게 변했는데, 전자에서는 무언가를 안 해도 마음이 충만했고 후자에서는 일상 일기가 불안일기로 변할 정도로 무료하고 권태로웠다. 그렇지만 혼자만의 시간을 살아가고 있는 내가 제법 쿨하다고 느끼면서도 사람들의 관심을 느끼고 싶은 상반된 심리가 유독 SNS 를 많이 하게 했었다. 하지만 그런 순간들을 깔쌈하게 찍어 SNS에 올렸다가도 하루 중 행복했던 5분정도의 찰나 순간을 24시간처럼 박아두는 인스타 스토리 설정이 나의 모순된 마음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그런 나를 두고 내가 ‘추잡스러워’ 견딜 수가 없어 다시 지우곤 했다.
그래. 나는 아직도 혼자에 ‘몰입’하여 시간을 보낼 수 없었다. 그 순간마저도 누군가의 온기가 필요했고 그 온기를 화답하는 나를 통해 삶을 굴렸다. 누군가는 나에게 MBTI에서 극 E에 해당하기에 어쩌면 불가능한 이야기라고도 했지만 그럼에도 나는 혼자서 시간을 ‘온전히’ 이왕이면 ‘잘’ 보내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나는 시시때때로 변하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런 내가 싫었다. 비단 주변 사람의 변화가 아니라 공간적인 변화에도 나의 마음은 한없이 넓어지다가 보이지 않을 만큼 줄어들었다. 대표적으로 한국에 있을 때와 타국에 나왔을 때, 나의 마음의 여유가 크게 차이 났는데, 한국에 있을 땐 널뛰는 마음이 수십가지 행동을 해야만 가려졌다면 타국에선 몇 가지 행동만 해도 쉽게 걷혔다.
‘환경 따라 쉽게 약해지는 내가 과연 강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라는 의문이 한동안 머리속에 자리 잡았고 끝에 아니라고 대답했다. 진정한 강함은 주변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내 안으로부터 온다고, 그러기 위해서 철저한 고독을 견뎌야 하고 그러한 자만이 환경이 바뀌어도 상황이 닥쳐도 개인의 고요의 바다를 유지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계속해서 낯선 땅에 나를 계속해서 밀어 넣었다.
이런 나를 두고 누군가는 나에게 의미 없는 짓을 한다며 멍청하다고 말할 수도 있다. 내가 생각해도 키보드 위를 한동안 서성일 정도로 다소 오글거린다. 그러니까 지금까지 쓴 내 말을 요약하자면
(무협소설의 주인공처럼) “사형, 청명하다, 이제 혼자가 되어 천하제일로 강해지기 위해 저 황량한 세상을 향해 한걸음 내딛겠습니다. “
말을 당차게 해도 막상 상대방에게 모진 말을 듣는다면 아마 나는 애써 달갑게 받으며 말할 것이다.
하다 : (떨리는 목소리로, 시선을 마주치지 못하고) 그래 사실.. 그런거야, 사는게 뭐………멍청하고 멍청한 짓을 반복하다가…… 죽는거지..
그래, 물렁한 내 내면은 여태 나의 삶에 대해서 정확하게 말했으면서도 누군가에게 섣불리 단언할 만큼의 확신이 없다. 나 또한 내 부족함을 너무나도 알기에. 이런 말하는 지금 이 순간도 이따금 겉멋이 들어 한껏 차오르는 나에 대한 뽕을 계속해서 인지하고 한 번씩 브레이크를 걸면서 글을 적는 것이다.
그렇지만 뭐, 누군가가 헛되다고 말할지라도 포기하지 않고 고민하며 살아간다. 사실 살아간다는 게 그렇지 않나. 비록 불확실성이 가득한 세상에서 죽음 외에 완벽한 결과 값을 도출하는 게 어려울지라도. 우리는 그저 도달할 수 있다고 믿는, 그 허상 된 희망을 잃지 않으면서 거듭하여 고뇌하고 노력하며 결과가 아닌 그 과정 속에서 의미를 찾으며 진실된 내 삶을 비로소 완성시키는 것 말이다.
언제나 이 곳에 나 혼자 남아
휑한 주위를 둘러보다
혼자 덩그러니 바라보는 너(나)의
흔적들과 함께 남아
두 손을 꼭 잡고 춤을 추다
혼자 남겨진 날 발견하곤 했지
그러기에 나는 꾸준히 언젠가 내 안의 힘이 단단해질 거라 믿으며 멈추지 않고 나를 정적 속에 밀어 넣고, 겉 멋으로 다니는 순도 70% 정도 ‘혼자’ 지만 계속해서 나를 황무지로 떨어뜨려 언젠가 무의식적으로 팍! 진실되게 행동하는 순간에 가까워지기를 바란다.
남은 건 나 혼자뿐
그저이 정적 속에
몸을 던져내
이 순간을 기억해 외로이
비행기가 착륙 안내가 들림과 동시에 모두의 엉덩이가 들썩거린다. 가방을 열어 꺼내놓은 소지품들을 차곡차곡 넣는다. 동시에 금세 들뜬 마음을 다시 담는다. 그 가운데에서 헤드폰에서 일정한 소리가 들린다.
이 밤에 나 혼자 남아
이 밤에 나 혼자남아
이 밤에 나 이 순간을 기억해 외로이
단숨에 일시정지 버튼을 누르고, 걸음을 옮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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