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호] 다섯째주, 시언 : 나에게 하는 용서

겨울호 다섯번째 주제 : 용서

by 어느 저자

슬며시 열어둔 창가에서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는 밤이나 유달리 달빛이 밝은 날. 그날따라 라디오에서 기타 선율이 잔잔한, 내 취향의 모르는 노래가 흘러나오는 날. 또 마침 할 일이 없고 내일은 쉬는 날인 그런 날. ‘센치’라는 이름의 방문객이 방문을 두드리기 시작하는 그런 날이면 나는 그 손님을 맞이하기 위해 편의점에서 만 원에 네 캔짜리 맥주를 사 들고 책상 앞에 앉는다. 어떤 날은 영화를 보기도 하고, 보고 싶었던 드라마를 보기도 하고. 보통은 노랫소리와 진한 인센스 향에 취해 코끝이 간질거리는 기분을 참아가며 세상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 구경하는 재미를 즐기곤 한다. 그렇게 손님과의 대화가 짙어질 때면 특정 기억들이 서서히 떠오르기 시작한다. 왠지 입술을 굳게 닫고 턱을 괴고 생각에 잠기게 만드는 그 기억들. 아직도 나를 괴롭히는 기억들. 떠올리기만 해도 나를 부정하고 싶은 장면들이 머릿속으로 재생되고 나면 생각한다.


‘그때 왜 그랬을까.’


나는 나를 용서하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은 없다고 자주 생각한다.

용서의 대상은 과거의 나, 용서를 해주는 입장은 현재의 나. 과거의 부끄럽고 추악한 나 자신이 떠오를 때마다 심장이 쪼그라드는 기분이 든다.


‘안 돼. 그 말 하지 마.’

‘거기서 그러면 안 돼.’

‘지금 꼭 그렇게 해야겠어? 다시 생각해봐.’


과거의 나의 입에서 자동으로 흘러나오는 말과 부메랑처럼 반복되는 행동들을 아무리 뜯어말려도 소용이 없다. 그리고 그 결과는 너무도 선명하게 보인다. 시간을 되돌릴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어떤 잘못을 먼저 고쳐야 할까. 우선순위를 정해보다가 도무지 결론이 나지 않아서 타임머신이 없는 게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아냐. 그래도 타임머신은 있어야 할 것 같은데, 무언가 하나쯤은 되돌려야 하는데’

인생에도 게임처럼 세이브가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던 현재의 나는 결론을 낸다. 이건 아무리 생각해봐도 절대 용서가 불가능한 일들이다.


사실 과거의 내가 용서를 바라는 일은 인생을 좌지우지할 만큼의 거창한 잘못은 아니다. 화에 못 이겨 해서는 안 될 말을 상대방에게 했다던가, 보내지 않아도 될 문자를 보냈다던가, 그로 인해 누군가와 영영 멀어져 버렸다던가 하는 일들. 혹은 아주 가까운 사람들을 소홀하게 대했다던가, 아주 먼 사람에게 무례하게 굴었다던가, 과하게 오버했던 순간이나 참석하지 않았어야 할 자리들도 생각난다. 뱉었던 말로 인해 후회되기도 하지만, 하지 못했던 말로 인해 아쉬운 순간들도 있다. 이건 얘기할 걸, 말해줄 걸, 먼저 사과할 걸. 과거의 나는 항상 속이 좁고 옹졸하기 그지없으며 무식할 만큼 과감하고 생각 없이 말을 뱉는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게 현재의 나의 삶을 통째로 바꿔버리진 않았다. 따지고 보면 아쉬운 일에 조금 더 가까운 것 같기도 하다.

그걸 알면서도 현재의 나는 도저히 용서해 줄 마음이 없다. 아니, 쪼그라든 심장에 그 결정권이 있는 게 문제다. 그의 잘못이 방금 전에 일어난 듯 아른거린다.


다른 이가 나에게 잘못을 하고 용서를 구한다면 용서를 해주면 그만이다. 도저히 용서해줄 수 없는 행동이라면 그 사람과 보지 않으면 그만이다. 그가 어떤 생각을 가지고 그랬는지, 왜 내게 용서를 구하는지 알 수는 없지만 간단명료하다. 하지만, ‘나’는 그럴 수 없다.

원치 않아도 ‘과거의 나’는 ‘현재의 나’를 만들어냈다. ‘현재의 나’는 또 다른 ‘과거의 나’를 만들어낼지도 모른다. 내가 용서를 해주지 않아도 그 인연은 끊을 수가 없다. 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또다시 심장을 쪼그라들게 만들어도 어쩔 수 없다. 그저 ‘미래의 나’가 그 기억을 떠올려주길 바랄 뿐이다. 하지만 제일 큰 문제는 ‘미래의 나’가 기억력이 그다지 좋지 않다는 것이다. 분명 그 기억을 여러 번 떠올려왔음에도 불구하고 ‘미래의 나’는 숱한 ‘과거의 나’가 저질러왔던 실수를 반복할 것이다. 그리곤 결국 턱을 괴고 생각에 잠겨 떠올리게 될 장면의 수를 늘릴 것이다. 그러니 더더욱 용서하기는 힘들다. ‘현재의 나’는 부디 ‘미래의 나’가 그 실수의 빈도만큼은 줄여달라고 바라고 다짐한다. 다시 한번 그러면 내가 사람이 아니라며 큰소리를 땅땅 친다.


혹자는 이런 행동을 ‘이불 킥’이라고 표현하더라. 많은 이들이 침대에 누워 자꾸만 아른거리는 기억에 ‘과거의 나’를 용서하지 못한 채 발길질을 마구 해대는 장면이 상상되었다. 과거를 향한 발차기와 미래를 위한 발차기 중에 어떤 게 위력이 강할지 궁금했고, 곧바로 침대에 누워 이불을 마구 발로 찼다. 기억이 떨쳐질 때까지, 아무 생각도 들지 않을 때까지 힘껏 찼다. 쪼그라든 심장이 조금 펴지는 느낌이 들었다. 펄럭이는 이불과 소리 없는 아우성이 괜히 위로가 되었고, 조금은 너그러워진 기분이 들었다. 가빠진 숨을 고르며 다시 침대에 누워 눈을 감는다.


아까 전의 기억 속 공간이 나타난다. 하지만 아까 보았던 장면은 반복되고 있지 않다. 과거의 나는 그때 당시의 건방진 눈빛은 온데간데없이, 어리숙하고 풀죽은 눈빛으로 나를 마주 본다. 그러더니 그 작은 몸을 쭈뼛대며 말한다.


“미안해. 그때는 그렇게 될 줄 몰랐어.”


그보다는 훨씬 대인배인 현재의 나는 고민한다.

과거의 나와 비교해보자니 현재의 내가 막 그렇게 나아진 것 같지는 않다. 키가 조금 자라고 목소리가 조금 중후해지고 읽어낸 책이 몇 권 더 늘어난 것 같다. 지혜나 통찰 같은 건 여전히 생기지 않았다. 신중함과 인내심은 조금 늘어난 것 같기도 하지만, 그만큼 해야 할 말을 아끼는 경우도 많아졌다. 그래, ‘과거의 나’도 그러고 싶어서 그런 건 아니겠지. 사실 제일 괴로운 건 계속해서 그 장면을 반복할 너 일 텐데. 자세히 보니 풀 죽어 있는 눈이 조금 슬픈 눈으로 보이는 것 같기도 하다. 그 눈이 마음을 움직였다.


“휴...그래. 알겠어. 다시는 그러지마.”


나는 한껏 가벼워진 기분으로 잠에 들었다.



from.시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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