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호 여섯번째 주제 : 일월(해와 달)
“언니는 4살 때 달님한테 뭐라고 기도했길래 내가 생겼어?”
“동생 갖고 싶어요, 동생을 보내주세요, 이랬겠지.”
“그게 끝? 놀이터도 같이 갈 거고, 인형도 양보할 거에요. 이런 거 없이?”
“ㅋㅋㅋㅋ 그런 거 없었고 담백하게 동생이 갖고 싶었어. 왜 그랬는지는 기억이 안 나. 술을 너무 먹어서 그런가, 나이를 먹어서 그런가.”
“그렇지 25년 전인데. 기억나는 게 이상하지.”
“아무튼 그 순간 엄청나게 진심이었던 것만 기억나. 시커먼 밤에 그 베란다 앞에서 달에다가 빌었고, 내 뒤통수 보고 엄마가 웃었던 것 같아. 아마도 아빠랑 엄마가 같이 한잔하고 있었겠지. 그땐 진짜 매일매일이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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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방 저 구석에 자리하는 다 헤진 앨범에서 아주 작은 나의 언니가 베란다 앞에서 기도하는 모습의 사진을 본 적이 있다. 작고 통통한 두 손을 모으고 두 다리를 가지런히 모아 무릎을 꿇고 눈과 입을 야무지게 꼭 닫고 있었다. 그 모습으로 매일매일 언니는 동생이 가지고 싶다며 그 까만 밤에 달님에게 빌었고, 경제적으로 힘들었던 부모님은 아이 계획이 없었으나 언니의 진심 어린 기도가 달을 거쳐 엄마와 아빠에게 닿았다. 그러니, 나는 엄마와 아빠와 언니의 사랑과 달의 축복으로 태어난 셈이다.
달은 그보다도 더 오래전부터 우리 가족의 역사를 다 알고 있다. 엄마와 아빠가 처음으로 단둘이 맥주 한 잔을 먹으며 서로에게 가만히 웃었을 때도 달은 가만히 그들을 비췄을 테다. 기다리던 엄마의 연락을 받은 아빠가 마르지 않은 패딩을 입고 주머니에 꼬깃꼬깃 남은 3천 원으로 산 꽃다발을 오른손에 쥐고 헐레벌떡 엄마의 집 앞으로 갔던 그 밤에도 달은 그 자리에 두 사람을 보며 웃었을 것이다. 뱃속의 언니와 엄마가 함께 싸우던 그 새벽도, 교통사고로 아주 작은 나의 언니가 쓰러져 응급실에서 엄마와 아빠가 간절히 기도했던 그 새벽에도,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나의 언니가 작은 나를 혼낸 후에 잠든 나를 어루만지며 미안해서 눈물을 흘렸던 그 밤에도.
그 역사가 가득히 담겨서 그런지, 어떠한 重力에 이끌려 우리는 달님에게 말을 건네곤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달이 둥그렇게 뜨는 날이면, 엄마가 달이 너무 예쁘지 않냐며 방에 널브러져 있던 가족들을 모은다. 그럼 우리는 못이기는 척 미적미적 나와 창 앞에 서서 고개를 들어 창을 본다. 달님, 오늘도 내가 기억하는 늘 같은 얼굴로 계시네요, 하고는 두 손을 모아 눈을 감는다.
가족 모두가 내 옆에서 눈을 감고 나면, 나는 기도문처럼 으레 읊는 말이 있다. “제가 옳은 방향을 바라보게 해주시고 좋은 선택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제 선택의 책임을 온전히 다하고 견딜 수 있게 도와주세요. 그리고 우리 가족 잘 돌봐주세요. 착하고 열심히 사는 사람들이에요. 우리 아빠 술 좀 덜 먹고 간도 덜 상하게 해주세요. 우리 아빠 늘 열심히 하시고 발로 뛰시는데 이번 일은 꼭 잘 되게 해주세요. 우리 엄마, 나랑 우리 언니 걱정 너무 많이 하면서 오히려 더 힘들어하셔요. 조금만 마음이 덜 힘들게 해주세요. 몸도 이리저리 아픈 거 같은데 덜 아프게 해주세요. 우리 언니도 하고 싶은 거 진짜 진짜 열심히 하는데, 꼭 언니가 하고자 하는 거 이루고 즐겁게 살게 해주세요. 내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이 세상에서 조금만 더 행복하게 해주세요.”
어느새 다 자라 이제는 어린아이가 없는 우리 집은 각자의 위치에서 각자의 경험과 생각으로 매일 밤을 지새운다. 그 어느 밤에 독서실 책상 위의 책들이 걷잡을 수 없이 커져 익사할 것 같았을 때, 도망치듯 나와 자전거를 낚아채 타고 달려가 대학에 붙고 말 것이라고 호수와 달에 외쳤던 역사. 그 아이와 손을 잡고는 볼이 붉어져 밤하늘에 시선을 돌렸던 따뜻하고 간지러운 밤의 역사. 아직 젊은 꿈을 꾸며 도전을 결심하면서도 현실과의 괴리에 가족에게도 벽을 짓고 남몰래 울었던 언니의 역사. 당신의 건강과 안위보다도 가족들 생각에 매일 걱정하다가도 영양이 담긴 맛있는 반찬을 만들고는 맛있어할 가족들을 상상하며 슥 웃음 짓는 엄마의 역사. 한 가정을 짊어지고 늘 무거운 한 걸음을 내딛지만 그 밤에 귀가하면 내색하지 않으며 실없는 개그를 날리는 아빠의 역사. 지금 이 순간에도 달은 늘 같은 얼굴로 우리 가족의 역사를 지나가면서 웃는다. 그 달의 거대한 크레이터 하나하나에는 그런 슬프고도 예쁜 역사가 담겨있기에 더욱 예쁘고 밝은 웃음이다.
저 달이 우리의 역사로 무거운 탓에 힘으로 바다를 당기고 민다. 달이 깎아지고 채워진다. 밤이 되면 어김없이 찾아와 매일 다른 곳에 자리를 잡고 묵묵히 우리를 내려다본다. 그러니 문득 외롭고 이 어둠의 끝이 보이지 않을 때, 고개를 들어 늘 같은 표정을 한 달님을 보아야겠다. 크레이터에 어여쁜 역사로 가득히 찰랑이는 빛을 마셔야겠다. 한 잔에 나의 꿈을 다짐하던 마음과, 한 잔에 나의 엄마와 아빠의 잔소리와, 한 잔에 언니의 위로와, 여러 잔에 그들의 사랑을. 언젠가 크게 쏟아질 듯한 빛을 뿜는 둥그런 달을 볼 때면 약속한 듯 고개를 들어 한 잔씩 머금고 이유 없는 웃음을 짓길, 그리고 포근한 자리에서 곤히 잠이 들어 가득한 꿈을 꾸길.
from. 하랑소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