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호] 셋째주, 시언 : 다리 위의 사담(上)

봄호 세번째 주제 : 대화

by 어느 저자

#1

검은색의 무대 배경, 그 중간엔 철제 다리의 난간이 무대 왼편에서부터 오른편까지 놓여있다.
무대 가운데엔 가로등이 놓여있다.
가로등을 중심으로 빛이 희미하게 퍼져나간다.
빛의 경계가 희미해지는 위치에 베이지색 낚시 조끼를 입은 ‘영감’이 낚싯대를 들고 빨간색 작은 빨간색 접이식 캠핑 의자에 앉아있다.

(음향: 간간히 파도치는 소리가 들려온다.)

진화: (무대 왼쪽에서 ‘진화’가 걸어 들어온다. 무대 가운데까지 와서 가로등 아래 멈춰 선다. 가져온 가방을 내려놓고 가방에서 소주 한 병을 꺼낸 뒤, 담배를 꺼내 입에 문다. 라이터를 찾으려 주머니를 뒤적거리지만, 발견하지 못한다) 아씨...
진화: (입에 물었던 담배를 다시 주머니에 집어넣고, 꺼내둔 소주를 열어 벌컥벌컥 마신다. 반쯤 마시고는 소주병을 다시 내려 둔다. 멍하니 정면을 잠시 바라보다가, 이내 결심한 듯이 뒤돌아 난간으로 걸어간다. 신발을 벗어 가지런히 놔두고 난간을 올라가려고 한다.)

영감: 죽을라고?
진화: (몸이 반쯤 난간을 넘어갔다가, 깜짝 놀라 뒤로 넘어지며) 악!! 누...누구세요?
영감: 죽으려면, 다른 데 가서 죽어. 고기 도망가니까.
진화: (몸을 털며 일어나면서) 허. 참나. 간 떨어지는 줄 알았네. 할아버지, 언제부터 여기 계셨어요?
영감: 나야 항상 여기 있었지.
진화: ...다 봤어요?
영감: 다 봤지 그럼.
진화: 아씨. 쪽팔리게. (영감 옆으로 다가가며) 음침하게 왜 거기서 그러고 있어요?
영감: 음침하기는. 술 처먹고 뒤지려는 년이 더 음침하지.
진화: 그러고 보니까, 뭐라고요? 죽으려면 다른 데 가서 죽으라고? 그게 지금 자살하려는 사람한테 할 말이에요?
영감: 내가 죽나? 네가 죽지. 죽더라도 남한테 피해는 주면 안 되는 것이야.
진화: 그건 제가 알아서 하고요. 진짜 어이없는 할아버지네.

진화, 내려뒀던 가방으로 걸어가 거리에 풀썩 앉는다. 반쯤 남았던 소주병을 들고는 만지작 거린다.

진화: 아, 진짜 할아버지 때문에 다 망했잖아요. 다 망했어요. 전부 다.
영감: 나는 죽지 말라고 안 그랬어.
진화: 타이밍이라는 게 있거든요? 이제 다시는 못해요. 자살이고 뭐고. 아 뭐 솔직히, 저기 난간 넘어갔더라도 뛰어내렸을 거란 자신은 없는데, 아무튼 할아버지 탓이에요. 제가 어떻게 용기 내서 여기까지 왔는데.
영감: 그럼 목숨 살려줬으니 고마운 줄 알아야지.
진화: (손에 들린 소주병을 한 모금 마시고는 정적이 흐른다)...낚시 재밌어요?
(대답없는 영감)
진회: (큰 소리로) 아 낚시 재밌냐고요!
영감: 기차 화통을 삶아 먹었나? 왜 소리를 지르고 지랄이야.
진화: 됐고요. 할아버지. 이것도 인연인데, 저랑 술이나 한잔해요. 솔직히 고기도 안 잡히잖아요.
영감: 볼일 끝났으면 돌아가. 시끄러워서 고기 다 도망가겠네.
진화: 그놈의 고기. 제가 광어고 우럭이고, 사줄 테니까 술 한잔해요. 어서요. 빨리요.

영감, 못 들은 척을 한다.

진화: 저, 할아버지만 아니었으면 이미 저 아래로 떨어진 거라니까요? 할아버지가 말 걸어서 산 거니까, 책임지셔야죠. 뭐 다른 거 안 바라니까. 그냥 술 먹어요 술. 술 먹으면서 저랑 말 좀 해요. 그거면 돼요.
영감: 거참. 술 못 먹어서 죽으려고 했나. 이만 돌아가.
진화: 아, 얼른요. 저 왜 죽으려고 그랬는지 궁금하지도 않아요?
영감: 하나도 안 궁금혀.
진화: 아 몰라. 저 할아버지랑 술 먹기 전까지 안 갈 거니까. 그런 줄 아세요.
영감: ...다금바리.
진화: 다금바리?
영감: 다금바리로 사줘.
진화: 그게 뭔데요?
영감: 있어. 고기.
진화: 알겠어요. 사줄게요 사줘.
영감: ...인삼주.
진화: 네?
영감: 나는 인삼주만 먹어.
진화: 겁나 까다로우시네. 여기서 인삼주를 어떻게 구해요.
영감: 저기 아래 야채가게 옆 슈퍼에서 팔아.
진화: 허 참나. 알겠어요. 잠깐만 기다려봐요.

진화, 무대 왼편으로 사라진다.
암전.

#2

무대에 조명이 들어오고 가로등 아래 커다란 인삼주 하나가 놓여 있다.
진화는 바닥에, 영감은 낚시 의자에 앉아 서로 마주보고 있다.

진화: (억지로 술잔을 부딪치며) 짠! 크. 이 맛이지. 혼자 마시면 통 이런 맛이 안 난다니까요. 할아버지는 성함이 뭐예요?
영감: 그냥 영감이라고 불러.
진화: 하하. 그래요 영감님. 저는 ‘진화’에요. ‘진실할 진’에 ‘말씀 화’. 진솔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이 되라고 부모님이 지어주신 이름인데, 이름처럼 살다 보니 그냥 말 많고 진지한 사람이 되어있더라고요. 뭐. 요즘 말로 ‘진지충’이라고 하는데, 무슨 말인지 알아요?
영감: 뭔...충?
진화: 그러니까. 매사에 진지한 사람한테 ‘벌레 충’을 붙여서 마치 해로운 것처럼 표현하는 말이에요. 제가 그렇게 불려요. 진지충이라고.
영감: 그려? 진지하면 좋은 거 아녀?
진화: 영감님은 여기 시골에 살아서 하~나도 모르는 거예요. 요즘 애들은 안 그래요. 조금이라도 진지한 얘기를 꺼냈다 하면, 분위기 깬다고 꼭 한 소리 들어요. 진지충이라고. 근데, 제가 생각해도 제가 조금 유별나긴 해요. 이상한 걸 자주 물어보곤 하거든요.
영감: 뭘 물어보는 데 그려.
진화: 그러니까요. 제가 호기심이 조금 많아요. 어릴 때부터 질문하는 걸 정말 좋아했었는데, 누군가를 만나면 그 사람의 생각이 너무 궁금한 거예요. 그런 거 있잖아요. 어떤 사람이 무슨 생각을 하며 살아가는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 그 사람에게 죽음은 뭔지, 사랑은 뭔지, 삶은 무엇인지.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는 무엇인지. 그런 본질적인 질문들 말이에요. 저는 누군가를 알아가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하거든요. 또 그런 생각들을 나누고 듣는 일이 정말 재밌기도 하고요.
영감: 피곤한 년이구만. 나한텐 묻지 마라.
진화: 에이. 저 요즘엔 안 물어봐요. 아무도 대답해주지 않거든요. 언젠가는 ‘의미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푹 빠져있었던 적이 있었어요. 친구들에게 얘기했죠. ‘의미란 있는 걸까?’ 의미라는 단어 자체도 사람이 만들어 낸 건데, 의미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닐까? 예를 들면, 감정 같은 거 말이에요. 사랑의 의미는 무엇일까? 사람들은 사랑을 한다고 말을 하는데, 어떤 의미도 없는 것을 느끼고 있다고 말 할 수 있을까? 결국 사랑도 우리가 ‘사랑’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만들어냈기 때문에 ‘사랑한다’고 할 수 있는 건 아닐까? 그러니까 친구들이 그러더라고요. 조용히 하고 술이나 먹으라고요.
영감: 볼 만하네.
진화: 또 어떤 날은 한 친구의 취직을 축하해주려고 모인 자리였어요. 술이 어느 정도 들어가자 제가 친구에게 물어봤죠. ‘너는 왜 그 일을 하는 거야?’ 그 순간, 자리가 조용해졌어요. 다행히 다른 친구가 애써 분위기를 무마하고 넘어갔죠. 그러고 술이 더 들어가자 저는 더 심한 질문들을 늘어놓기 시작했어요. ‘너의 삶의 목표는 뭐야?’, ‘어떤 사람이 되기 위해서 이 일을 선택한 거야?’, ‘오늘이 너의 가장 기쁜 날이야?’ 그러자 친구가 ‘그만 좀 해. 씨발’이라고 하더니 자리를 박차고 나가더라고요. 그리곤 다른 친구들도 하나둘 일어나더니 결국 저만 남았어요. 사실, 저도 그게 무례한 질문일 거라는 걸 알았어요. 그렇지만, 저는 그게 애정의 표현이었어요. 그 친구에 대해서 더 알고 싶었던 거죠. 혼자 하기 어려운 질문들에 대해서 같이 고민해보고 싶었고, 진심으로 그 친구가 원하는 목표와 부합하는 삶을 살아가길 바라는 마음에서 물어본 거였어요. 단 한 번도 그런 얘기를 나눠본 적이 없었으니까요. 영감님도 그런 질문들을 들어본 적이 있었나요?
영감: 거 질문하지 말라니까. 원래 이 나이가 되면, 삶의 목표 같은 건 중요하지 않아. 숨이 붙어있으니까 살아가는 거지. 너는 생각이 너무 많아.
진화: 그런가요? 왜 그런 말도 있잖아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영감: 염병을 떨고 있네. 생각이 많으면 그냥 머리만 아픈 것이야. 간단하게 사는 것이 제일로 좋아.
진화: 그래도요. 간단하게 산다고 해서 간단하게 생각하기는 쉽지 않잖아요. 늘 걱정하고 고민하고 생각하는데, 왜 대화는 그런 얘기들을 안 나누는지 모르겠어요. 요즘 사람들은요, 자기 생각을 절대 말하지 않아요. 내가 아무리 누군가와 친하게 지낸다고 해도, 그 사람의 속마음을 모르겠어요. 혼자 생각하고 말아요. 저는 그 생각을 뱉었을 뿐이에요. 공유하길 바랐을 뿐인데, 어느 순간 주변에 아무도 없더라고요. 어쩌면 저는 시대를 잘못 타고 태어났는지도 모르겠어요. 20세기의 사람들은 자유롭게 생각을 나눴던 것 같은데, 요즘엔 생각은 감추는 게 미덕이 되어버렸어요.

영감. 인삼주를 진화에게 따라준다.

영감: 근데, 그래서 왜 죽으려고 했댜?
진화: 아. 그건 그러니까요 -

암전.




다리 위의 사담(下)에서 계속.

다리 위의 사담(下)는 5주차에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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