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호 마지막 주제 : 작은 전시회
피곤한 몸을 이끌고 도착한 광장은 평일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비눗방울 놀이를 하는 아이들, 가만히 앉아 사랑을 나누고 있는 커플들, 물건을 들고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상인들, 피크닉을 하는 가족들, 홀로 끼니를 때우는 사람들까지. 서서히 붉은 빛으로 물들여지는 하늘을 배경 삼아 모두 그 순간만을 즐기고 있었다.
기나긴 여행 탓인지 유독 안 좋은 일이 연달아 일어난 탓인지, 요 한 달간 나는 많은 것에 지쳐있는 상태였다. 에콰도르 바뇨스에서 세상의 끝 그네도, 키토에서 적도 박물관도, 콜롬비아 보고타에서 유명한 그라피티 거리도, 멕시코 칸쿤에서 흔한 세뇨떼 조차, 아무 곳도 가지 않고 매일 숙소에만 박혀있었다. 귀국까지 일주일이 남았을 때, 드디어 한국행 비행기를 탈 수 있는 멕시코시티에 도착했다. 여전히 의욕이 없었던 그곳에서 북인도 동행이었던 부부와 재회했다. 숙소에만 있는 내가 안쓰러웠는지 둘은 나를 데리고 멕시코시티 이곳저곳을 관광했고, 한국을 떠나기 전날에 아침부터 여러곳을 돌아다닌 우리는 해가 지는 시간에 맞춰 마지막 코스인 소칼로 광장을 방문했다. 그렇게 마주한 소칼로 광장은 몸의 피곤함을 날려버릴 만큼 생기가 넘치던 곳이었다. 걱정, 근심, 온갖 부정적인 단어들은 잠시 재쳐두고 그 순간의 행복만을 취하던 수많은 사람을 보니 근 한 달간의 나의 여행이 너무나도 초라해 보였다.
학창 시절도, 직장생활도, 그리고 여행조차도 나는 반복될수록 시간의 소중함을 잊어버리고는 한다. 먹먹할 정도로 아름다웠던 광장을 보고 다시 한번 다짐해본다. 솔직히 매 순간을 소중히 할 수는 없겠지만, 가장 좋아하는 시간만큼은 오로지 즐길 수 있는 내가 될 수 있길. 문득 하늘을 올려다보다 발견한 노을만큼은 잠시 멈춰서 멍 때리며 바라볼 수 있는 내가 될 수 있길 바란다고.
이 전시회는 여행하는 동안 제가 유독 사랑했던 해 질 녘의 따스함을 담아낸 기록입니다. 잠시 부정적인 감정은 재쳐두고, 노을의 따스함과 저녁의 선선함이 흘러 들어가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Part 1, 해 질 녁의 따스함과 사랑에 빠졌다
호주의 하늘은 특별했다.
모든 게 신기하기만 했던 호주의 처음도, 어느덧 익숙해져 버린 호주의 풍경에도, 퇴근 후 지친 몸을 이끌고 숙소로 돌아가는 순간에도, 더 이상 호주는 지긋하다고 얼른 떠나기만을 바라던 때에도.
고개를 살짝 올려 바라본 하늘에는 언제나 세상에 있는 모든 따뜻한 색을 불러놓은 듯한 하늘이 펼쳐져 있었다.
해가 질 때쯤, 그 따스함은 정말 특별했다.
퇴근 후 씻고 침대에서 뒹굴거리던 중 야경을 보고 오라는 룸메이트의 말에 부랴부랴 카메라만 들고 천문대로 향했다.
트레인 타고 가는 길, 졸음이 쏟아지고 해질 시간까지 다가와 버려 괜히 왔나 라는 생각이 들었을 때, 도착역에서 문이 열리는 순간 하버브리지 뒤로 펼쳐진 핑크빛 세상.
비록 열심히 뛰어서 도착한 천문대는 이미 어두컴컴해져 버렸지만, 마법같이 펼쳐진 그 하늘은 그날을 특별한 하루로 만들기 충분한 순간이었다.
이제 오페라하우스와 하버브리지는 지겹다고 조금 더 먼 곳으로 관광을 떠나도, 저 멀리 시드니의 랜드마크가 보이면 괜스레 반가워지고는 했다.
호주를 떠날 때 아마 이곳에 다시 오는 일은 없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했었다.
시간이 흐른 지금, 가끔 시드니의 랜드마크 뒤로 펼쳐지는 호주의 노을이 그리운 거 보니, 언제가 한 번쯤은 다시 방문해도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하곤 한다.
역시 ‘아마’라는 건 없다.
Part 2, 여행과 카메라 그리고 노을
익숙하지 않은 언어, 너도나도 달라붙는 상인들, 교통질서라고는 없는 혼잡한 거리, 얼굴을 찌푸리게 만드는 고약한 쓰레기 냄새.
처음 겪어보는 당황스러움, 불안함, 짜증 등 다양한 감정들이 휘몰아치던 인도에서의 첫날, 어색한 모든 풍경 속에서도 저 멀리 지는 해를 보니 내심 안심이 됐다.
드디어 여행의 시작이었다.
인도는 수많은 도시의 수만큼 다양한 풍경이 존재했다.
그리고 그 다양한 풍경 속에서 서로 다른 아름다운 노을을 간직하고 있는 곳이었다.
바라나시는 작은 나룻배를 타고 일출과 일몰 투어를 신청할 수가 있다.
졸린 눈을 이끌어 바라본 갠지스강 위에서 펼쳐지는 주황빛 하늘과 잠시 길을 잃어 바다를 찾아 헤엄치는 돌고래를 만나서인가, 일출만큼 기대했던 일몰은 크게 아름답지 않았다.
하지만 작은 실망감에 뒤돌은 순간 보이던 풍경은 나도 모르게 뛰쳐나가 카메라 셔터를 누를 수 밖에 없었다.
지금도 여전히 이 사진은 내 가슴을 벅차오르게 하고 심장을 뛰게 한다.
해 질 녘, 그 따스함은 해가 지는 앞선 풍경 뿐 아니라 보이지 않는 뒤편 또한 존재했음을 깨닫게 해준다.
여행의 초기, 나는 항상 카메라와 함께였다.
어디서든 내 시선을 따라 셔터를 눌렀고, 사진을 남겼다.
카메라 뷰파인더 속 세상은 대부분 따뜻함으로 채워지곤 했다.
나는 이 혼잡한 나라가 뭐가 좋다고 다시 되돌아온 것 일까. 아름다운 노을을 보여주는 날보다 흐린 하늘이 대부분인 곳, 하지만 그 흐린 날 속에도 자기 나름의 주황빛을 보여줘서 일까.
무엇 때문인지는 몰라도 내가 좋아하는 사진들 중 대부분은 이 나라에서 발견한 따스함이었다.
Part 3, 취향에 취하다
카메라 렌즈가 고장 났다. 운 좋게 몇 주 뒤 렌즈를 다시 구할 수 있었지만, 예전보다 카메라를 드는 일이 적어졌다.
카메라 뷰파인더 속 세상이 아닌 내 눈으로 바라본 세상은 또 다른 모습이었다. 사진으로 회상하는 추억보다 덜 생생하겠지만, 그 순간을 추억하다 보면 가슴이 더 울컥거릴 때가 많다.
인도에서 만났던, 가진 카메라라곤 두 눈 밖에 없던 친구가 있었다. 그 친구는 자신의 두 눈과 휴대폰 하나로도 자신만의 세상을 담는 친구였다. 그 친구를 보다 보면 목에 걸린 카메라가 유독 무거워질 때가 많았다. 굳이 거창하게 아니더라고 충분히 나만의 세상을 담을 수 있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후 나는 카메라를 잘 챙기지 않게 되었다. 눈으로 담는 일이 더 많아진 여행이 됐고, 순간을 남기고 싶다는 욕심이 꿈틀대면 휴대폰을 들었다. 유명한 랜드마크보다는 내 눈에 잠시 머물렀던 사소한 순간들을 담았고, 어느덧 내 사진첩은 나의 취향이 한껏 묻은 사진들로 채워졌다.
Part 4, 어느 날의 일기
용량이 부족합니다
또다시 떠버린 알람에 사진첩을 들어가 본다. 사진 찍기를 좋아하지 않았던 과거의 나는 64기가 핸드폰을 선택했고 그로 인해 매번 알람을 받고 사진첩을 들어가고 알람을 받는 생활을 반복 중이다. 클라우드로 옮기면 되는데 열악한 와이파이는 그걸 허락해주지 않는다. (귀찮기도, 항상 까먹기도 하고)
이제는 여행 사진으로만 가득 차 있는 나의 사진첩 깊숙이 남아있는 과거 사진은 참 어색하기만 하다. 어느덧 화장기 없는 얼굴이, 산발인 머리가, 매번 같은 옷을 입고 작은 가방 대신 빵빵한 배낭 하나 매고 있는 내 모습이 그리 익숙할 수가 없다.
용량이 부족합니다.
내 머릿속의 용량도 언젠가는 부족해 찬란했던 과거를 지워버리는 날이 올까. 그게 아쉬워 우리는 각자의 클라우드에 기억을 저장하고 틈날 때마다 꺼내 보는 걸지도 모른다. 나이를 먹어간다는 것은 매번 부족한 용량으로 무엇을 클라우드 속에 잠재울지의 고민의 연속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훗날 그 추억을 벌판 삼아 살아갈 수 있도록. 그러니 바란다. 훗날 꺼내 본 나의 클라우드가 희로애락의 다양한 색깔로 채워져 있기를, 그중에서도 즐거웠던 사소한 순간들이 촘촘히 채워져 있기를.
- 19.07.20 in Turkey, Istanbul
from.은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