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호 마지막 주제 : 작은 전시회
제 여정을 축약하자면 여러 장면들이 간헐적으로 떠오르곤 합니다. 우리는 삶에서도 여러 장면들을 기억하며 살아갑니다. 대게는 그런 장면들로 우리가 이루어지곤 하지요. 제 여행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마치 영화가 하나의 씬, 하나의 시퀀스를 통해 펼쳐지듯, 잊을 수 없는 몇 가지의 장면들이 제 여행을 이루었습니다. 그 중 제게 가장 많은 것을 느끼게 했던 장면들을 나눠봅니다. 부디 즐겁게 감상해주시길 바랍니다.
1장. 나를 얼어붙게 하던 장면들
<히말라야의 여명, 네팔>
웅장한 설산 앞에 서면 저는 늘 한 없이 작은 존재가 되곤 했습니다.
하늘로 우뚝 솟은 채, 눈부시게 푸른 하늘 위로 승화되는 산의 새하얀 끝자락을 보고 있으면 온몸이 얼어붙었습니다. 그저 하염없이 작은 두 눈에 풍경을 담을 뿐이었지요.
특히나 땀을 뻘뻘 흘리고, 고산병을 견뎌내고 그 끝에서 발견한 설산은 절대 잊을 수 없는 장면이었죠.
"거대한 설산을 마주하고 나는 어떤 감정을 느낄까.
벅차오름? 슬픔? 기쁨? 성취감? 그리움? 복합적인 무언가?
뭐가 되었든 평생 기억날 감정임은 분명하겠지. 꼭꼭 눌러담아 마음 속에 머리에 온 핏줄에 그 감각을 새겨두리. 아아, 드디어 왔다 히말라야여 !"
- 히말라야 트레킹 중의 일기
<시나이 산의 돌산, 이집트>
<빙하, 아르헨티나>
<달과 사막, 이집트>
설산 외에도 지구의 너무나도 아름다운 풍경들을 볼 때마다 얼어붙곤 했습니다.
빙하 앞에서, 초원 앞에서, 사막 앞에서, 이해하기 어려운 지형들 앞에서 그러했습니다.
자연이란, 끝이 없는 시간의 산물인지라 감히 이해하기 어려운 무언가였습니다.
작은 존재의 심장으론 그 감정을 다 담을 수가 없어 표현 할 수 없는 감정에 하염없이 벅차오를 뿐이었죠.
그런 장면들은 하나의 삶을 너무나도 작게 만들기도,
또 이 삶을 정말 감사하게 만들어주기도 했습니다.
"아무튼 다이빙을 제외하고도 다합은 정말 즐거운 곳이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시간이 순식간에 사라지곤 했으니 여행자의 블랙홀이라 불리는 이름 값을 톡톡히 했다.
정말 이상한 곳이지, 바다 말고는 아무것도 없는데. 바다가 좋아, 다이빙이 좋아 이곳에 모인 여행자들 말고는 아무것도 없는데 다들 이곳을 좋아하게 된다는 것이.
이곳을 떠날 용기와 다짐들을 다 집어삼키는 무언가가 존재하는 게 분명하다.
여행자들이 이곳에서 찢은 비행기표만 합쳐도 나무 한그루는 훌쩍 자랄 양이니."
- 이집트 다합을 떠나며
<대륙의 끝, 남아프리카공화국>
저는 바다를 사랑합니다.
끝이 없는 수평선 넘어로 자꾸만 넘실대는 파도와 그 짠내음, 그 깊이에서 여러 생명의 기운이 가득 느껴지는 것을 좋아합니다.
바다는 정말 신기한 것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태초에 바다에서 난 존재라서 바다를 바라보며 안정감을 얻고,
하늘로 사라질 존재라서 하늘을 우러러 바라보는 것 같기도 합니다.
"서로가 기억하는 별자리의 이름을 떠올리며 별들 사이를 더듬어 찾아 서로에게 소개시켜주던 그 순간,
마음이 아릴정도로 행복해지는 노래들을 들으며 서로에게 감사하다고 고백하던 시간들."
- 판공초, 인도
<윤슬, 크로아티아>
2장. 나를 뜨겁게 하던 장면들
<아티스트, 태국>
여행이란, 결국 새로운 존재들과의 만남이었습니다.
저는 여행은 그 사람들과의 만남으로 이루어진다고 강력하게 믿고 있습니다.
그 만남은 지금까지도 이어지기도 하고, 그 날 하루의 단순한 인연이 될 때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어떤 만남의 형태든 그것들은 잊을 수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무엇 하나 귀중하지 않은 게 없었죠.
나와 같은 행성에서 살아가는 다른 존재와의 만남은 무척이나 떨리는 일이었습니다.
그 만남에는 저를 뜨겁게 만드는 무언가가 존재했습니다.
낯선 곳에서 또 다른 일상을 살아가는 누군가의 삶을 마주하는 것만큼 여행의 큰 가치가 있을까요?
<사랑, 여유, 젊음과 지혜>
- 터키, 크로아티아 그리고 이집트.
"미얀마도 내게 그렇게 기억되겠지. 잠잠한 평화 속에 어수선함과 열악함들.
친절한 미얀마인과 점점 문명에 녹아드는 도시들.
나는 오래오래 기억할 것 같다.
오랜 왕조의 모습이, 순수하고 때묻지 않은 “밍글라바”라는 한 마디에 해맑은 미소를 보여주는 사람들이 조금 더, 아니 아주 오래 남아있었으면 한다."
- 미얀마를 떠나며
<삶을 축약한 기차, 인도>
"나에게 이곳은 견디는 장소가 아니다.
이동하며 만나는 수많은 인도인의 삶을 접하고 바라볼 수 있는 장소. 물론 먼지를 잔뜩 뒤집어쓰고 땀 범벅이 되어 누워있는게 전부지만, 잠깐 잠깐 접하는 이들의 삶과 내 삶이 크게 이질적이지 않아서, 그들의 공간에 내가 녹아드는 느낌이 좋아서 나는 이곳을 좋아한다."
- 인도의 슬리핑 기차에서,
"자유로운 동물들을 바라볼 때 무언지 알 수없는 쾌감을 느꼈다.
이들이 불행하지 않은 동물이라 너무나 기뻤고 스스로 잘 살아가는 힘들을 지닌 존재라 신비로웠다.
새끼 코끼리를 보고 환호했고, 사자의 갈퀴를 보며 기뻐했다.
그들의 터전은 깨끗하고 넓었으며 동물의 삶은 그의 비해 너무도 짧아보어 더욱 반짝였다."
- 케냐의 대초원에서
<코끼리와 나, 태국>
<잔잔한 여유, 탄자니아>
<물결, 크로아티아>
<선, 네팔>
<영원, 페루>
<죽음의 순간들,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 인도>
"나를 스쳐갔던 수많은 죽음들이 떠오른다.
어쩌면 여행에서 내가 가장 많이하게 된 생각은 삶과 죽음이 아닐까.
미래고 목표고 복잡한 걱정 따위는 생각도 나지 않는다. 당장 내가 살아있다는 것, 그것에 감사함을 느끼는 나날들이 왜이리 많은지.
먹고, 숨쉬고, 느낄 수 있는게 왜 이리 고마운지."
- 총탄 구멍이 가득한 도시, 사라예보에서.
3장. 나를 알아가던 장면들
<하늘 호수, 인도>
여행 중에는 '나'를 떠올리는 시간이 정말 많습니다.
정확히는 나를 마주하는 시간이 많다고 할 수 있겠네요.
앞서 봤던 여러 장면들, 광활한 자연 앞에서, 혹은 어떤 누군가의 삶 앞에서 자꾸만 고민하게 되는 건
결국 '나'의 삶 입니다.
대자연 앞에서는 잔뜩 발가벗겨진 나의 알맹이 그 자체를 마주하게 됩니다.
또 다른 삶 앞에서는 나는 어떤 존재이고, 어떤 삶을 살아야하는가에 대한 끝도 없는 고민이 들게 되지요.
그 무수한 질문들 앞에서 정답을 발견하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나'와 조금 더 가까워진 건 확실합니다.
취향과 신념, 가치와 자신감.
'나'와 마주하며 얻었던 여러 가치들을 소개합니다.
<산토리니의 석양, 그리스>
<모래 언덕, 나미비아> (왼), <자유, 아르헨티나> (오)
"왜 이렇게 대했을까, 왜 이렇게 행동했을까, 왜 더 사랑하지 못했을까, 왜 이렇게 말을 했을까.
지난 과거에서 못난 모습이 가장 먼저 떠오르곤 한다.
나는 지금의 내가 성숙하다 여기지만, 그때의 나는 늘 어리숙하고 약했다.
여전히 많은 두려움도, 관계를 대하는 법도, 대화의 방법도 무지했음을 인정하고 그러지 않아야겠다는 다짐을 다시 한 번 해본다."
- 마지막 날에,
<나, 그리고 나>
<고요, 이집트>
"굳이 무언갈 이뤄내지 않아도 괜찮다고 나를 다독일 수 있는 힘이 어디서부터 생긴 걸까. 좀 더 객관적으로 나를 바라보고 떠나보낼 수 있는 힘이 생긴 것 같다. 느리게 움직이는 스포츠라 그런지 조급해하지 않는 방법을 배운게 아닐까. 그래도 언젠간, 빠른 시일 내에 다시 다이빙을 배우고 더 깊게, 잘 하고 싶다.
...
어쩌면 행복에는 그렇게 큰 조건이 필요없는 것 같다.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엄청난 자연 하나만으로도 행복해지니, 아주 사소한 것들에도 행복을 느끼게 되니. 가진게 많아질 수록, 자연이 감춰질 수록 행복은 어려운 것일 수도 있겠다. "
- 다합에서,
"며칠 전까지 고상하게 떠있던 손톱달은 어느새 꽤 차 며칠 뒤면 반달이 될 듯 싶다.
그 옆엔 금성도 아주 반짝이며 떠있다. 한국에 돌아간 뒤에도, 언제나 달과 별은 여기를, 다녀온 모든 곳을 환하게 비추겠지. 모양과 형태와 밝기는 조금씩 다르겠지만.
나도 한국에 가면 많은 것이 달라지겠지. 배낭을 메는 법도, 허름한 곳에 자는 법도 까먹을지 모를것이다. 깔끔한 옷을 입고 단정한 머리를 하고, 값진 음식을 찾아 먹을 것이다.
그래도 저 달이 언제나 떠있듯 나의 여행을 기억할 것이다. 꿈 속에 살았던 그 모든 나날들을 마음 한켠에 방을 만들어 그 추억들로 꾸며둘 것이다. 여행이 미치도록 그리울 때면 고개를 들어 달과 별을 바라보아야겠다. 그 달을 내가 다녀온 모든 곳을 여전히 밝게 비추고 있을테니, 그 달을 빌려 그 기억을 떠올려야겠다.
여행의 마지막 밤이 지나간다."
from.시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