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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느 저자 Oct 06. 2021

[여름호] 둘째주, 은희 : 기분 좋은 소음

여름호 두번째 주제 : free(자유주제)

“안녕히 가세요!”

출근길, 버스정류장에 도착할 때마다 인사를 건네는 기사 아저씨를 보고 의아한 마음이 생겼다. ‘아침부터 저러면 힘들지 않나? 딱히 대답해주는 사람도 없는데.’
아저씨의 목소리가 아침 풍경의 당연한 소음처럼 들릴 때쯤, 드디어 목적지에 도착해 뒷문에 섰다. “안녕히 가세요!” 버스에 내리는 순간 그 소음은 어느덧 기분 좋은 바람으로 바뀌어 몸속을 훑고 지나갔다. 문득 기사 아저씨는 자신의 인사 한마디의 힘을 알고 있는 사람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팍팍한 현실의 출근길 안에서, 자신이 내뱉는 짧은 한마디가 누군가에게 기분 좋은 아침의 시작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그걸 몸소 실천할 수 있는 대단한 사람이라고. 떠나가는 201번의 버스를 보니, 괜스레 오늘 하루가 모든 잘 풀릴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나는 애초에 ‘인사’와는 거리가 먼 아이였다. 앞에 나서서 큰소리로 안녕하세요를 외치기보다는 부모님 다리 뒤에 숨어 상대방을 힐끔힐끔 쳐다보는 소심한 아이였고, 그 아이는 자라서도 수많은 사람 속에서 혼자만 만세를 외치는 사람이 되길 원하지 않았다. 웬만하면 많은 사람과 인연을 맺기를 꺼렸고, 그 방법은 ‘인사’를 하지 않는 것이었다. 엘리베이터에 같이 탄 이웃에게 인사를 건네지 않는 것, 친하지 않은 학교 친구를 밖에서 마주했을 때 인사를 하지 않는 것. 그렇게 인사라는 벽을 세워 나를 둘러싼 작디작은 공간을 지키기 급급하며 살아왔다.
가끔 텅 비어버린 공간이 몹시 외로워 보일 때쯤, 벽 건너편의 세상이 안전하다 느낄 때쯤, 문을 활짝 열어놓고 생활을 할 때도 있었지만 그건 말 그대로 가끔 뿐이었다. 대부분은 작은 창문을 통해 인사를 건네며 생활을 유지했고, 믿을 만한 소수의 사람이 왔을 때야 굳게 닫힌 문을 잠시 열어 손님을 맞이했다.

그렇게 홀로 공간에 웅크려있다 보면 갑자기 들려오는 소음에 깜짝 놀랄 때가 있는데, 그 소음을 따라가면 오래된 벽에 생긴 틈새를 발견하곤 한다. 엘리베이터에 타자마자 인사를 건네는 이웃, 눈을 마주치지 않은 나에게 다가와 반갑게 인사를 하는 학교 친구, 버스에 내리는 나에게 크게 인사를 외치는 기사 아저씨. 그 소음은 벽의 틈새를 통해 새어 들어왔고, 틈새를 바라보다 보면 당황스러운 마음은 곧 기분 좋은 바람으로 인해 입가의 미소로 변하곤 했다. 뭐, 잠시간의 바람을 느끼고 난 이후에는 틈새를 복구하기 바빴지만 말이다.


살아가다 보면 가끔 기분 좋은 소음을 내는 사람들이 등장하곤 한다. 우연히 그런 사람들을 마주할 때마다, 벽으로 둘러싸인 작은 공간이 답답해지곤 했다. 보이는 틈새마다 못질하는 내가 한심스러웠고, 창문과 문을 꼭 걸어 잠가 타인과 거리를 두는 내가 딱하기도 했다. 그들처럼 나도 밖으로 나가 만세를 외치는 사람이 되어야 하지 않냐는 압박감이 들기도 했지만, 시간이 조금 지나고 나면 역시 나는 그런 사람이 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여전히 나는 이 작은 공간 안에서 편안함을 느끼고, 내 사람이 아닌 타인이 이 공간을 침범하는 것을 꺼린다. 이 사실은 앞으로도 변함이 없을 테지만, 가끔 발견한 틈새를 웃으며 넘어갈 수 있는 유연함 정도는 가져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작은 창문과 문은 조금 더 크게 확장하고 때때로 열어두어 환기하며, 벽의 틈새로 기분 좋은 소음이 새어 들어오면 낯선 타인을 초대해보기도 하는, 그런 유연함이 조금씩 조금씩 쌓이다 보면 나의 공간은 지금보다 더 포근해지지 않을까 하는, 그런 생각을 해본다.

from.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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