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어느 저자 Oct 07. 2021

[여름호] 둘째주, 김라면 : 고목과 나비

여름호 두번째 주제 : free(자유주제)

  나무에 묶인 강아지를 보았다. 해가 이미 저물었고, 조명이 어두운 가게 앞이었던 지라 검은 털을 가진 강아지는 시선을 집중하지 않으면 알아챌 수 없을 정도였다. 강아지는 아주 얌전히, 익숙하다는 듯이 나무 아래 앉아있었다. 줄에 묶이지 않고 자발적으로 기다리고 있다는 듯. 버스가 신호를 기다리며 한참이나 멈춰 서있었음에도, 그 강아지의 주인이 밖으로 잠깐이나마 얼굴을 비치는 일은 없었다.   



오후 여섯 시 이십 분. 하연은 버스 안의 빨간색 전자시계를 보며 손톱을 물어뜯었다. 약속 시간이 십 분 남았고, 수희는 삼십 분 정도를 더 늦을 테지만, 초조했다. 약속 시간 정각에 딱 맞추어 도착할 것이 분명함에도.


수희는 중학생 때부터 알아 왔던 친구였다. 친구와 선생님들은 둘을 ‘고목나무와 매미’라고 불렀다. 물론, 고목나무는 하연이었다. 매미는 늘 자유로웠고, 나무는 항상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지만. 수희는 화려하고 자유로웠다. 사실 매미라는 별명이 어울리지는 않았다. 매미는 어디서든 존재감이 없는 하연에게 더 어울릴 별명이었다. 수희는 나비에 더 잘 어울렸다. 나비가 아니라면, 벌. 그것도 아주 화려한 색감의 말벌. 하연에게 붙어 다니기에, 하연이 ‘고목나무’이기에 수희에게 매미라는 별명이 붙었을 뿐, 어디에서나 수희는 화려한 나비였다. 매미를 가장한 나비.



여섯 시 이십 삼 분. 나비와 처음 대화한 것도 이렇게 어둑한 저녁이었다. 하연은 아무도 다니지 않는 굴다리 아래 멈춰서있었다. 굴다리 아래를 밝히는 희미한 등 때문에 바깥은 칠흑같이 어두웠다. 밖으로 나가기 두려울 만큼. 하연의 머리칼은 어지러이 흩어져 있었고, 교복 와이셔츠는 본래의 색을 알 수 없을 만큼 흙색 발자국으로 뒤덮여있었다. 붉은 기가 감돌던 볼이 퉁퉁 부어올라 입을 벌리기조차 힘든 상황이었다.


집에 가지 말까. 여기서 하룻밤을 보낼까. 굴다리 안으로 스멀스멀 기어 오는 어둠을 바라보면서 저도 함께 잠식되면 어떨까 생각했다. 어둠 속에 별빛이 반짝인다 생각했을 때, 눈 부신 빛이 하연의 시선을 하얗게 물들였다. 굴다리의 등보다도 밝은 불이 눈가에 깜박, 깜박. 눈을 찡그리며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불빛을 가렸다. 순식간에 불빛이 사라졌다. 조금만 더 머물러주길, 잠시나마 함께 있어 주길 바라며 홀로 아쉬움을 삼킬 때 나비가 날아왔다.


“너, 우리 반 애지?”



여섯 시 이십 오 분. 버스가 정거장에 멈춰 섰다. 내리려는 사람이 많아 이리저리 밀치고 밀쳐졌다. 하연은 밀쳐지는 사람이었다. 등 뒤에서 누르는 사람들 때문에 비틀거리던 하연은 결국 계단에서 발을 헛디뎌 떨어지다시피 버스에서 내렸다. 희뿌연 가로등이 지난날의 불빛 같았다. 잠시 멈춰서 고개를 숙였다. 발목 위에 빨갛게 긁힌 자국이 남았지만 부어오를 것 같지는 않았다. 잠시 발목을 살피는 새에 그 많던 사람들은 자신들의 길을 떠나고 없었다. 휴대폰 화면을 깨우며 식당 위치를 검색했다. 걸어서 일 분. 수희를 기다리기엔 식당 앞보다는 버스 정거장이 나을 것 같아, 얌전히 버스 정거장의 낡은 벤치에 앉았다. 또다시 기다림이 시작되었다.


자동차 헤드라이트가 손전등 불빛처럼 하연을 비추고 지나갔다. 깜박깜박. 눈이 아팠지만, 하연은 찡그림 없이 불빛을 마주했다.


“이거 내 손전등이야.”


그때 대화의 전부였다. 하연을 비추었던 손전등을 그녀에게 쥐여주고 수희는 미련 없이 뒤돌아섰다. 특별한 것 없이도 빛나는 아이. 모범생으로 유명하고, 선생님들도 좋아하고, 아이들이 친해지고 싶어 하는 그런. 하연은 그토록 겁내던 어둠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당당하게 걸어가던 뒷모습을 기억했다.



여섯 시 삼십 이 분. 하연에겐 친구가 없었다. 버스 몇 대가 잠시 멈췄다가 떠났지만, 그 속에 수희는 없었다. 가까운 신호등이 노란색, 빨간색으로 바뀌는 것이 피부로 느껴졌다. 하연의 온몸을 물감으로 적셔놓은 기분이었다.


수희와의 만남 이후로도 바뀌는 것은 없었다. 하연은 화장실에 숨어 괴롭히는 사람들이 모두 하교하기를 기다렸다. 운이 좋지 않은 날엔 모두가 떠났는지 확인해보려다 들키기도 했지만, 웬만하면 조용히 넘어갈 수 있었으니까. 화장실 청소가 끝나자마자 날래게 하연은 화장실 비품실 칸으로 숨어들었다. 쪽창으로 보이는 하늘이 노랗게 물들자 화장실 안이 어둑해졌다. 작은 인기척도 내지 않으려 노력하며 비품실 문을 열자마자, 달칵, 화장실 불이 켜졌다.



여섯 시 삼십 오 분. 하연은 자신을 툭툭 치는 손길에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돌렸다. 백발의 할머니 한 분이 구부정한 허리를 붙잡고 서 있었다. 하연은 가방을 집어 들고 벤치에서 일어섰다. 온몸을 곧게 펴고 도로를 마주 봤다.


그날 화장실 불을 켠 것은 수희였다. 곧고 바른 눈으로 하연을 바라보며 “여기 있을 것 같았어,”라고 말했다. 그 뒤로도 수희는 하연을 찾아왔다. 화장실로, 체육관으로, 심지어 종례가 끝나기 전 교실까지. 같이 하교를 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눈도장을 찍듯이 찾아왔을 뿐. 덕분에 하연의 삶은 이전보다 훨씬 나아졌다. 나비가 죽은 나무에 관심을 기울이니, 나무는 나비를 기다리기 시작했다. 오늘은 몇 시에 올까. 언제쯤 올까. 어느 곳에서 나를 구해줄까. 마치 어린 왕자의 장미처럼. 수희는 더 자주 하연을 찾아왔다. 아예 대놓고 하연에게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기도 했다. 너는 내꺼야, 하고 여느 친구들이 장난스레 하는 말도 뱉기도 했다. 수희가 하연에게 관심을 보이자, 다른 이들도 하연에게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선생님도, 아이들도. 하지만 먼저 다가오는 이들은 없었다.



여섯 시 삼십 팔 분. 깜박거리는 초록색 횡단보도 불빛을 보고 뛰어오는 학생 둘이 보였다. 두 사람이 하연이 있는 곳까지 걸어오며 투닥거리는 말소리가 선명하게 들려왔다. 뭐가 그리 즐거운지, 까르르 웃고 서로에게 치대고 껴안기를 반복했다. 수희는 하연에게 다가오는 모든 이들을 쳐내려 애썼다. 하연이 자신의 것이라는 시답잖은 이유였지만, 하연은 좋았다. 행복했다. 누구의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친구가 생긴 것 자체가, 행운이었으니까. 그래서 모르는 척했다. 수희의 울타리 안에서, 그 애가 세상의 전부가 되도록 가만히 내버려 두었다.



여섯 시 사십 분. 길 건너편에 강아지 한 마리가 폴짝폴짝 뛰는 모습이 보였다. 주인은 시큰둥하게 강아지가 가는 길을 따라가고 있었다. 새하얀 털 뭉치가 뛰어오르는 모습은 멀리 서 있는 하연이 봐도 그 강아지가 얼마나 자유로운지 알 수 있을 정도였다. 검은색의 가는 끈이 보이기는 하는데, 바닥에 끌릴 정도로 길게 잡고 있는 게 분명했다. 새하얗게 빛나는 강아지가 도롯가에 내려가려는 모습을 몇 번이나 목격할 수 있었으니.


버스 한 대가 하연의 앞에 멈춰서서 사람들을 쏟아냈다. 하연의 옆에 서 있던 이가 사람들 사이로 들어갔다. 찾던 사람을 발견했는지, 다정하게 손을 내밀고 환하게 웃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수희는 다정하지 않았다. 모든 이들에게 다정한 수희는, 하연에게만은 다정하지 않았다. 수희가 세상의 전부가 되어버린 후에 하연은 수희를 찾아다닌 적이 몇 번 있었다. 고목나무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나비의 눈에는 성가심이 떠올랐다. 나비에게는 주기적으로 찾아가는 꽃들이 많았다. 꽃들을 다 돌보고 나면, 그제야 고목나무에게 돌아왔다.


수희의 약속이 취소된 날에, 수희의 친구가 먼저 하교한 날에, 수희의 수업이 늦게 마친 날에, 수희의 기분을 맞춰줄 친구가 없는 날에, 수희가 어떤 가면도 쓰지 않고 편하게 있고 싶은 날에. 수희는 아주 뜬금없는 시간에 연락을 해왔다. 오후 여덟 시쯤 저녁을 먹자고 한다던가 아침 아홉 시에 갑자기 만나자고 한다던가. 나비를 사랑한 하연의 대답은 한결같았다. 응. 좋아.


“너는 걔가 왜 좋아?”


고등학생처럼 보이는 여학생들이 조잘거렸다. 두어 차례 비워졌던 버스 정거장은 다시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단발머리의 아이가 얼굴을 붉히며 답하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때, 나 구해줬거든.”

“으, 그거 하나 때문에 좋아한다고?”


응. 하연이 속으로 답했다. 그 이유 하나로 전부가 될 수도 있는걸. 마치 줄에 묶인 강아지처럼. 가로등에 기대서며 선명하게 붉은 신호등을 마주 봤다.



여섯 시 사십 오 분. 수희는 아주 조금씩 하연의 시간을 갉아먹었다. 처음에는 오 분, 다음은 십 분, 그다음에는 십오 분.


아까 봤던 새하얀 강아지가 횡단보도를 건너고 있었다. 길고 가는 끈이 강아지와 주인을 이어주고 있었지만, 강아지는 자유로웠다. 강아지는 코를 킁킁거리며 자신의 옆을 지나가는 사람의 냄새를 맡았다. 주인은 줄을 대강 잡아당기며 강아지에게 주의를 주었지만, 잠시였을 뿐 강아지는 다시 날쌔게 걸음을 옮겼다. 새하얀 솜뭉치가 하연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나무의 삶은 바뀐 것이 없었다. 매일같이 옆에 달라붙어 있는 매미가 하나 있다는 것 외에는, 어떠한 것도 바뀐 것이 없었다. 오는 길에 보았던 강아지를 떠올렸다. 그도 하연과 같았을까. 주인이 그의 세계의 전부일까. 그래서 그렇게 스스로 나무에 매인 채 앉아있었을까.


주행 신호가 녹색불로 바뀌자, 차들이 내는 속력이 거친 바람이 되어 날아왔다. 나무들이 흔들리고, 잎이 떨어졌다. 솜뭉치가 여기저기 기웃거리는 모습이 보였다. 주인은 한 손에 휴대폰을 들고 손가락을 움직이느라 바빴다.


여섯 시 사십 칠 분. 강아지가 차도에 내려섰다. 십 초. 주인이 고개를 살짝 들어 줄을 잡아당겼다. 삼십 초. 작은 강아지는 줄에 이끌려 인도의 경계석에 몸을 살짝 부딪쳤다. 사십 초. 흰 털의 동물이 검은 길 위에서 과감하게 걸음을 옮겼다.


여섯 시 사십 팔 분. 자동차를 위한 신호등은 녹색이었다. 녹색으로 물든 작은 생명체는 거침이 없었다. 검게 터져 나오는 비명들 사이에서 하연은 바스러진 녹색을 본다. 짙푸른 몸이 검게 사라지고 있었다. 마치 아스팔트에 흡수되듯이. 여전히 검은 끈의 끝은 주인과 이어져 있었다. 과연 솜뭉치는 끝까지 주인을 바라보고 있었을까. 하연은 고개를 돌리지 않고 강아지를 바라본다. 버스가 시선을 가릴 때까지 계속.



“미안, 미안. 또 늦어버렸네. 많이 기다렸어?”


버스의 뒷문이 열리자 빛나는 나비가 날아들었다. 자연스럽게 나무에 안착한다. 하연은 자신의 옆에 달라붙어 웃음 치는 나비를 바라본다.


여섯 시 오십 분. 신호에 멈춰선 차들의 붉은 브레이크 등이 시선처럼 그들에게 달라붙는다. 검게 태어나 붉게 물드는 것이 좋을까, 푸르게 태어나 검게 사라지는 것이 좋을까. 경고음처럼 깜박거리는 붉은 조명에 수희의 미소가 검게 도드라진다. 이 미소 뒤에 숨은 목줄은 누구를 매고 있는 것일까. 하연은 숨이 막힌다.


줄에 매여 얌전히 기다리던 강아지는, 붉은 조명 아래 주인만을 바라보던 새카만 강아지는, 푸른 신호등 아래 검게 사라지던 강아지와 다른 걸까. 끝까지 끊어지지 않은 검은 목줄 아래 파스스 흩어지던….


고목나무는 그저 수희가 이끄는 대로 움직인다. 여태 그랬던, 의문도 가지지 않았던 나무는 새파란 신호등 아래에서 멈춰 선다. 보행 신호인지, 주행 신호인지는 모른다. 그저 푸르다는 것뿐. 나는 고목나무가 아니었을지도 몰라. 나무가 따라오는 지도 모르는 채 날아가는 나비를 본다. 온몸을 옥죄는 기다란 끈이 보이는 듯하다. 나비만이 놓을 수 있는, 검고 긴 사라지지 않는 끈. 하연은 가벼운 발걸음으로 뛰어가는 수희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수희가 하연의 이름을 부를 때까지. 가만히 멈춰서서, 그저 바라만 봤다.



나무는 푸르렀다.



from.김라면

이전 06화 [여름호] 둘째주, 하다 : 여름깃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