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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느 저자 Oct 01. 2021

[여름호] 첫째주, 시언 : 물결치는 아드리아

여름호 첫번째 주제 : 파도


발끝을 살랑거리며 간지럽히는 시원한 감촉에 정신이 번뜩 들었다. 습관처럼 팔을 뻗어 머리맡에 둔 핸드폰을 찾아 더듬거렸다. 딱딱한 핸드폰의 감촉 대신 하루 동안 달궈진 뜨거운 모래가 손을 감쌌다. 예상치 못한 감촉에 화들짝 놀라며 일어났다. 핸드폰은? 핸드폰은 어디에 있지?

툭.
몸을 일으키며 나를 덮었던 수건이 둔탁한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둔탁한 소리? 그제서야 한바탕의 수영을 마치고 해변에 눕기 직전, 수건 아래 핸드폰을 감춰두었던 것이 생각이 났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휴대폰 케이스 뒤편에 넣어둔 현금을 확인했다. 손에 꼭 쥐고 잤던 작은 카메라도 다시 한 번 확인했다. 그러다 부질없는 검사를 반복하는 나의 행동에 회의를 느꼈다. 대체 뭘 그렇게 불안해하는 걸까.
고개를 들어 주변을 살폈다. 아까 전까지 파도를 막는 모래성을 만들던 금발 머리의 가족들은 언제 갔는지 사라졌다. 모래성이 있던 자리에는 그 사이 차오른 물이 하얀 거품을 내뿜으며 창작의 흔적들을 지워갔다. 나의 발을 간지럽히던 정체도 바로 그것이었다. 수건과 옷가지를 챙겨 물이 닿지 않는 곳으로 옮길까 생각하다가 그냥 그렇게 있기로 했다. 이대로 물속에 잠겨도 나쁘지 않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내가 뭘 하는 거지?’
불가리아를 지날 때쯤부터 머릿속을 후벼 파는 이 질문은 매일 나를 괴롭히고 있었다. 오늘도 분명 그랬다. 하루 종일 수영을 하겠다고 마음먹었는데, 그놈의 ‘꼭 봐야하는 것’에서 벗어나지 못해 올드타운을 한 바퀴 둘러보고서야 해변가로 향했다. 나는 왜 아직도 그렇게 대담하게 용기 내어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고르지 못하는 걸까. 대체 왜 불안해하는 걸까. 자꾸만 공간을 넓혀가던 고민은 이제 여행의 존속을 위협할 정도가 되어가고 있었다. 눈부시게 아름답다는 아드리아 해를 눈앞에 두고서도, 그 속에서 온종일 수영을 했는데도, 나는 이 아드리아 해가 아름답다는 것조차 확실하지 않았다. 나는 왜 여행을 떠나왔을까. 무엇을 찾고 싶은 걸까. 나는 이러고 있어도 괜찮은 걸까.
 

*


학교 동기였던 T는 내가 건넨 ‘지금쯤이면 인도가 여행하기 좋다.’ 라는 말 한마디에 일말의 망설임 없이 인도행 비행기를 끊었다. 그의 급진적인 선택에 나는 뜨억-했지만, 내심 그런 결정을 내릴 수 있는 그가 부러웠다. 채식도시 푸쉬카르에서 만난 T는 정말이지 후회없는 삶을 사는 사람이었다. 나를 잠깐 만나고 바라나시로 향하려던 그는 우리가 보여준 사진을 보고 북인도행을 결정해버렸다. T와 여행하는 내내 나는 그가 포기해버린 바라나시가 자꾸만 아쉬워 괜히 괜찮냐는 말을 여러 번 물어봤다. 정작 아무렇지도 않았던 T는 그럴 때마다 내게 최고의 선택이었다며, ‘뭐 어때.’ 하고 말하곤 했다. 자신의 불안과 걱정, 계획과 미래에 대해 냉소적으로 대하는 그의 모습은 정말 커보였다. 그에겐 하고 싶은 걸 추진하는 자신감과 실행력, 하기 싫은 걸 하지 않을 수 있는 용기, 현재에 충실할 수 있는 집중력이 있었다.

하루는 정전으로 숙소의 에어컨이 꺼져버려 도저히 잠을 잘 수가 없었던 날이었다. 더위에 견딜 수가 없어 나온 마당에는 이미 T가 흔들의자에 앉아 ‘너도?’하는 표정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옥상은 시원하다던데?”

“올라갈까?”


T와 함께 올라간 옥상은 확실히 바람이 어느 정도 불어 그나마 더위가 해소되는 듯 했다. T는 잠도 날아갔는데, 대화나 하자며 옥상 위 난간에 아무렇지 않게 걸터앉았다. 나는 예의 ‘뜨억’하는 표정을 하며 괜찮냐고 물었고, T는 또 한 번 ‘뭐 어때’하는 표정으로 괜찮다고 말했다. 나는 두려움에 빳빳해져버린 다리를 겨우 움직여 난간에 걸터앉을 수 있었다.

그날 밤에 우리는 참 많은 대화를 나눴다. T는 내게 왜 여행을 떠났냐고 물었고, 나는 모르겠다고 답했다. 그리고 T는 내게 아무도 모르지만, 언젠간 그 이유를 여행 중에 깨닫게 된다고 말했고, 나는 그럴 수 있을까. 하고 답했다.


*



해수평선 끝자락에 걸릴 듯 말듯 한 해는 여전히 따가울만큼 뜨거운 빛을 내리쬐고 있었다. 따뜻한 색을 가진 아드리아의 바다는 해가 낮아질수록 그 색조가 더 뚜렷해지고 있었다. 그 강렬한 색체들 속에 모든 것이 묻어가는 느낌이 들었다. 나의 하루는 이렇게 강렬하진 않았는데. 모래 속에 파묻어뒀던 맥주를 한 모금 마셨다. 켁. 뜨거운 모래에 달궈진 맥주는 최악의 맛이었다. 맥주 탓인지 혼자 맥주를 마시는 탓인지 입안에서, 비어버린 속 안에서 자꾸만 씁쓸한 맛이 났다.

수영도, 석양도, 내가 상상하던 모든 것이 있는데 왜이리 기쁘지 않은지 도저히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T가 가졌던 자신감과 실행력, 용기와 집중력, 나에 대한 믿음과 신념, 멈추지 않는 끈기 같은 것을 몇 년쯤 뒤엔 갖출 수 있을까. 여행의 목적이 사실은 이러한 것들을 찾아 나섰던 건 아닐까. 여행이 끝날 땐 후회 없는 삶을 살고 있을까. 좋아하는 일을 좇아 살기 위해서 뭘 해야 할까. 그래, 우선은 미적지근한 맥주를 버려버리고 시원한 맥주를 마셔야겠지. 내일도 아름다운 아드리아가 펼쳐질 거니까. 내일은 정말 하루 종일 수영을 해야지.

수건과 옷가지를 챙기고, 맥주 캔을 찌그러뜨리고, 몸에 묻은 모래를 털고 일어설 준비를 했다.


해는 어느새 아드리아 해 저 편으로 사라져가고 있었다. 이전의 눈부심은 잃은 채로, 붉게 타오르며 마지막 빛 한줌을 아드리아에 펼치고 있었다. 물결치는 아드리아 위로 윤슬이 이리저리 일렁거렸다. 나는 마치 일렁이는 등불에 넋이 나가 주변을 서성거리는 나방처럼 넋을 놓고 빛의 움직임을 지켜봤다. 파도가 치는 방향마다 사라졌다가 제자리로 돌아오는 빛들이 내 처지와 비슷하다고 생각하면서. 아드리아에 갇혀버린 빛들이 안타깝다고 생각하면서.

그때, 물결치는 빛들 사이로 긴 머리칼의 여인이 솟아올랐다. 물결은 흩어졌고, 빛은 새로운 파도를 따라 이리저리 퍼져나갔다. 여인은 아드리아 저편으로 사라져갔고, 반짝거리는 아드리아는 황홀하게 아름다웠다.



from.시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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