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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느 저자 Sep 30. 2021

[여름호] 첫째주, 하다 : 파도를 읽고 타는 삶

여름호 첫번째 주제 : 파도

다시 돌아온 회사는 모든 것이 변함없었다. 빠르게 움직이는 타자 소리, 그 사이를 매섭게 비집고 오는 전화 소리, 간간이 들려오는 웃음 또는 한숨 그리고 누군가에게 보고 없이 온전한 나만의 공간인 내 책상까지, 모든 공간의 요소들이 어울려서 천천히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감성에 젖는 것도 잠시, 동료들과 오랜만에 안부 인사를 주고받고 자리에 앉아 가볍게 스트레칭을 한다. 모니터 옆 포스트잇에는 삐뚤삐뚤하지만 굵은 글씨로 한 문구가 적혀있다. "파도 같은 삶" 그 포스트잇을 떼어 내어 ‘같은’ 위에 엑스 표를 쳐본다. 하지만 곧 그것을 구겨서 버린다.

지난달에 처음으로 회사에서 장기 휴가를 받았었다. 그 당시 나는 두서없이 유럽 여행을 떠나기로 마음을 먹었다. 해외여행이 처음은 아니지만 ‘혼자’ 해외여행은 처음이라 꽤 설렌 마음으로 틈틈이 계획을 짰다. 여행을 안가도 일상을 여행처럼 보내면 된다는 합리화를 해왔지만, 막상 진짜 여행을 간다고 하니 들뜬 마음을 쉽사리 가라앉히기 힘들었다. 그렇게 비행기에 올라 포르투갈로 향했다.

보통은 스페인에서 시작해서 포르투갈로 간다고 하지만 포르투갈을 첫 여행지로 선택한 이유는 한 블로그 후기 때문이었다. 여행을 준비하던 시절 무작정 네이버에 유럽 여행을 검색하여 블로그를 뒤적거리면서 알게 된 블로그였다. 모든 게시물이 포르투갈에 관한 글이었는데, 특이하게도 글의 서두에 그날의 바닷소리를 첨부하여 들려준다. 내용에 딱히 매력적인 글이 없었으나, 항상 열 장 남짓한 서핑 사진이 첨부되어있다. 그리고 글의 말미에는 항상 ‘오늘도 읽고 탄다’라고 끝나는 게 특이한 점이었다.

마침 뚜렷하게 가고 싶은 곳도 없었고, 저 말을 하는 블로거가 한편으로는 오글거리지만, 한편으로는 꾸준히 100개의 게시물마다 저 멘트를 다는 이유가 궁금해서 무작정 첫 여행지를 포르투갈로 정했다.

오랜 비행기 끝에 포르투갈의 수도인 리스본에 도착했다. 사흘 동안 천천히 둘러보다가 근처에 위치한 서핑이 유명한 곳으로 향했다. 나는 그곳에서 1주 동안 서핑을 배울 예정이었다. 호스텔에 짐을 빠르게 풀고 나머지 수기 계약서를 작성하기 위해 예약한 서핑 가게로 향했다.

넉넉하게 다음날부터 시작하고 싶었지만, 초보자가 배우기에 좋은 파도 시간표에 따라 도착한 날에 바로 시작하는 코스를 진행하게 되었다.

내 담당 강사는 막스, 무척이나 활발하다. 뭐 사실 사람을 수없이 마주해야 하는 직업 특성상 더 그런 면이 있겠지만 유달리 텐션이 높은 분이었다. 내 영어 이름은 ‘닉’여 있는데, 그는 항상 나를 부를 때 “ 러블리 닉”이라고 꼬박꼬박 불러주었다. (계약서를 작성하는 내내, 그가 온갖 tmi를 말한 터라 나름의 친밀감을 유지하고 있었다. )

이론 수업 후 쉬는 시간, 혼자 온 사람은 나밖에 없던 터라 모래사장에 박힌 조개껍질을 멍하니 보고 있었다.

“ 러블리 닉 , 이리 와봐, ”

갑자기 막스가 나를 불렀고 나는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봤다. 그러자 그가 말했다.

“ 소개해줄 사람이 있어 ”

가볍게 모래를 털고 막스를 따라 가보니 한 동양인이 보드를 닦고 있었다.

“ 훈! 인사해, 여기는 닉이야. 닉도 한국에서 왔데 닉 , 여기는 훈이야. 여기서 강사과정을 배우고 있어”
“와 한국분이세요? 안녕하세요”
“아 네 안녕하세요.”

그렇게 그와 첫 만남이 시작되었다.

그의 정확한 이름은 박정훈, 포르투갈에 온 지는 이제 1년이 다 되어간다고 하였다. 원래는 영국에서 바텐더로 일을 하다가 그만두고 이 곳으로 여행을 왔는데, 서핑에 빠져서 이곳에 무기한으로 머물고 있다고 한다.

간단한 인사를 한 후, 어색한 공기에 못 이겨 그와 헤어지고 나는 곧 막스를 따라 바다 실습을 나갔다. 처음에는 막스가 뒤에서 물결을 읽고, 타이밍에 맞춰 내 서프보드를 밀어줬다. 그리고 나면 내가 속으로 3초 센 후에 일어서는 방식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때마다 한 번도 일어서지 못했는데, 순간마다 온갖 이유로 실패했다.

막스는 그럴 때마다 웃으면서 “ 잘했어”라고 도닥였지만 다른 수강생들이 일어나는 모습을 보면서 조급한 마음을 숨길 수 없었다.

내 순서를 기다리는 동안 서프보드에 기대서 눈을 감고 바다에 둥실 떠 있던 중이었다. 그때 누군가가 서프보드를 톡톡 두드렸다.

훈이였다.

“잘 되어가요?”
“ 아니요. 한 번도 일어서지 못했어요.”
“괜찮다면 제가 좀 알려줄까요?”

훅 들어오는 친밀감에 조금 당황했지만 다른 수강생들 앞에서 매번 실패하는 내가 너무 창피했던터였다.

“ 전 좋죠! 근데 막스가,,”

그러자 곧 그는 큰 소리로 막스를 불러 나를 가리켰다.
막스는 알겠다는 의사로 엄지를 들어 올렸다.

“ 갈까요?”

그를 따라 사람이 없는 바다로 향하는 길, 옆을 보니 그가 만들어낸 물길을 따라 내 물길이 합쳐진다. 정적 속에서 손 장구로 만들어낸 물소리만 들려 점점 어색하게 느껴질 때쯤 그가 물장구를 멈추고 말문을 열었다.

“파도가 오랜 여행을 하면 물결이 된다는 말이 있어요. 어쩌면 여행으로 지쳐 힘이 빠진 것일 수도 있고, 혹은 너무 많은 것을 알게 되어서 힘을 뺀 것일 수도 있어요. 어쨌든 그런 파도도 육지가 보이면 남은 힘을 쥐어짜서 달려와, 둘이 아스라질 듯이 서로를 껴안죠. 그 순간이 파도가 파도가 되는 순간이에요.
그러니까 우리는 파도가 힘을 쥐어짜려고 한 순간을 읽어야 해. 바로 파도가 육지를 본 순간이지. 우리는 조금이라도 파도가 마음이 동요되는 순간에 바로 달려가 그의 마음을 따라 올라 타야하는 거야.”

갑자기 자연스럽게 나오는 반말에 속으로 조금 놀랐지만, 외국이니까 그럴 수 있지, 하면서 나도 편하게 말을 하기 시작했다. 그는 막스가 해줬던 것과 달리 처음에 나에게 우글거리는 파도의 마음을 읽는 방법을 가르쳤다. 한동안 육지를 등지고 나란히 서서, 타이밍을 재는 연습을 했다. 저 넓은 수평선을 바라보면 파도가 넘실넘실 달려온다. 유독 한 녀석이 벅찬 심정을 못 감추고 총총 달려오면, 그 파도를 내가 읽고 속으로 하나 둘 셋을 센다.

일어서려는 욕심을 버리고 무작정 타이밍에 맞춰서 손 장구를 하고 달려가기를 수십 번 연습을 했을 때였다. 아무 생각 없이 파도를 읽고 달려가는데, 갑자기 행동이 앞서서 앞발을 들어 올렸다.

“어~어? ”

일어나기까지는 성공했으나 그것도 5초도 안 돼서 다시 바다로 안기고 말았다. 그래도 지금까지 했던 것 중에 최장 시간이었다. 바다에 나와서 훈을 바라보니 훈이 해맑게 웃으면서 손뼉을 쳤고 햇살에 그 모습이 반사되어 보였다. 나는 그 모습에 한 아름 다가가 하이바이브를 했다. 그 5초의 짜릿함이 원동력이 되어 계속해서 나를 일으켜 결국 2시간 동안 바다에서 끊임없이 파도를 읽고 그를 따라갔다. 그 이후에 다시 선 적이 없었으나, 그런데도 해냈다는 생각이 가득 찼다.

밤이 되니 낮에 가파르게 올라왔던 파도가 슬금슬금 스사라졋다. 파도 소리를 굳이 소리로 표현하면 찰싹,철썩 같이 ‘ㅊ’으로 표현되곤 한다. 하지만 밤이 되면 파라솔이 없는 ‘ㅅ’ 으로 변한다. 스사삭, 서서석같이 말이다.

우리는 그 앞에 앉아 맥주 한 캔과 함께 파도가 스사삭거리면서 아스라지는 장면을 바라봤다. 그는 핸드폰 카메라를 켜고 그 모습을 영상으로 담아내고 나는 그 옆에서 그 화면에서 보이는 파도를 보았다. 그리고 다 찍었는지, 카메라를 끄고 맥주를 한 모금 마신다.

“파도를 보면 우리가 진짜 우주에 살고 있구나라고 새삼 다시 느껴”라고 그가 말했다.

“왜?”라고 내가 물었다.

“ 파도가 생기는 이유 중의 하나가 달의 중력이 지구의 바닷물을 끌어당기면서 생기는 거잖아. 달의 영향력이 지구에 미치는 것을 눈으로 보는 거로 생각하니까 기분이 이상해지더라고”

“ 그러네, 그렇게 말하니까 우리가 참 작아보인다. 마치 거대한 세트장에 있는 작은 소품같아” 라고 말하고 나니 갑자기 무언가가 가슴 언저리에 얹힌다.

이에 따라 잘 안들렸던 주변의 소음이 하나 둘씩 사라지기 시작하면서 오로지 파도소리만 스석거린다. 이에 천천히 동화될 쯤 그 정적을 깨고 갑자기 그가 말한다.

“그럼 바다가 달로 인해 생기는 감정이 파도인건가?”

“ 엥 ? 뭐야, 낮에 말한 파도랑 육지의 로맨스는?”

“ 아, 무슨 소리야 음,, 파도랑 육지 사이는 우정 아닐까?”

“ ㅋㅋㅋㅋㅋㅋ”
“ㅋㅋㅋㅋㅋㅋㅋ”

우리는 그 뒤로 시답지 않지만, 우리만 할 수 있는 이야기를 주고받다가 동이 트기 직전에 수다를 멈추고 각자 숙소로 들어갔다. 그러고 이후로도 그와 꾸준히 연락을 주고받고 매일 바다에서 해가 지는 것을 함께 바라보면서 이야기를 나눴지만 딱 그뿐이었다.

막스가 여러 차례 우리 둘 사이에 뭐가 있는 거 아니냐고 물어봤지만 둘 다 말없이 고개를 절레절레할 뿐이었다.

그가 딱히 싫었던 것은 아녔다. 오히려 좋았다. 하지만 언제 어떻게 내 마음을 표현을 해야 할 지 몰랐고, 무엇보다 그의 마음도 어떤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나는 이런 부분에 있어서 바보였고 그랬기에 나란 안개에 가려 그를 향한 내 마음을 제대로 읽지 못한 것일 수도 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마지막 날, 떠나는 버스 앞에서 그에게 그간 고마웠다는 편지를 건네주고 하고 싶은 말이 목 밑까지 차올란 채로 그를 쳐다봤지만 결국 그 문턱을 넘지 못했다. 포옹은 너무 오버인가 싶어서 간단한 악수를 한 채 버스에 올라탔다. 바로 버스가 출발했고, 나는 너무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을 정도로 손을 흔들고 또 흔들고 그가 작아질 때까지 흔들었다.

나는 마지막 서핑 수업 때 처음으로 파도에서 일어서서 육지에 안길 때까지 함께했다. 하지만 또 다른 의미로 나는 끝끝내 내 파도를 읽지 못해 일어나지 못했다.

그 후에 그와 종종 인스타를 통해서 연락했지만 그마저도 점점 느려져 이제는 연락을 잘 안하게 되었다. 뒤늦게 안 사실은 알고 보니 그가 내가 유심히 보던 블로거였다는 것이다. 그 당시에 알았다면 운명이라며, 다른 감정으로 그 사실을 대했겠지만, 지금은 잠깐 놀랄 뿐 "그랬구나"라며 고개를 끄덕일 뿐이였다.

그렇게 나의 유럽 여행이 끝이 났다.

책상 밑 선반에서 포스트잇을 새로 꺼내, 여전히 삐뚤삐뚤하지만 굵게 적어본다.
“ 파도를 읽고 타는 삶 ” 라고



from.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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