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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느 저자 Sep 29. 2021

[여름호] 첫째주, 김라면 : 푸름과 흰

여름호 첫번째 주제 : 파도

소연은 늘 이야기했다. “나는 파도가 되고 싶어.” 싱긋 웃는 입가에는 옅은 보조개가 패여 있었다. 입꼬리 아래 하얀 점처럼. 그 보조개를 바라보며 왜? 하고 물었던 것 같다. 파괴적인 푸름과 알알이 부서져가는 흰 거품의 괴리감에서 그렇게 가라앉고 싶다는 답이 들려왔다. 소연은 거기에 부연설명을 덧붙이려다 입을 다물었다. 담담하고 처연한 눈이 가만히 나를 응시했다. 나는 시선을 돌렸다. ‘그렇게 살아’하고 말하려다 결국 다른 말을 뱉었다. 사람은 모두 그래. 열정적이다가 가련해지고, 그 강렬함 속에는 연약함이 있어. 소연은 대답이라도 하듯 눈을 천천히 깜박였다. 다시 그 부서질듯한 표정과 함께 흔들리는 목소리로 입을 뗐다. 그건 파도가 아니야.


“강나우님, 1번 진료실로….”

들려오는 목소리에 상념에서 깨어났다. 벽면에 붙은 전자 시계를 살폈다. 몇 월 며칠 몇 시를 알리는 붉은 숫자들이 소연의 기일이 며칠 남지 않음을 알렸다. 오늘도 파도를 보러 와줄거니? 소연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오늘도. 고개를 저으며 목소리를 떨쳐냈다. 아니.

간호사를 따라 진료실로 들어가자 늘 보던 의사가 서늘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검은 뿔테 안경 너머의 눈은 소연의 것과 닮아있어 향수를 불러일으켰다. 절대 부서지지 않을 것만 같은 눈.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어요.”

소연은 바다를 사랑했다. 정확히는 파도를. 사람이 혼잡한 여름날을 제외하고 거의 매 주 파도를 보기 위해 바다로 향했다. 그 곁에는 항상 내가 있었다. 소연이 가자고 해서, 내 기분이 좋지 않아서, 그녀를 혼자 두면 안될 것 같아서, 그저 바다가 보고 싶어서….

“얼굴은 동그란데, 약간 각졌어요. 사각 턱을 가졌죠. 피부는 까무잡잡한 편이고, 머리카락은 새카맣고. 저보다 한뼘 정도 더 커요.”

소연은 평범했다. 아주 미치지도, 미치지 않은 것도 아닌 아주 평범한 상태. 마르지도 않았고, 살집이 있지도 않았다. 그녀가 눈에 띄는 이유는, 파도 앞에 섰을때의 반짝이는 갈색 머리칼과 세상에서 제일 환한 미소를 짓는 모습때문이었다.

“엊그제는 같이 바다에 갔는데, 종일 모래사장에서 뛰어다녔어요. 모래찜질도 하고, 수영도 하고, 튜브에 몸을 맡겼다가 한참을 떠내려가기도 했죠.”

모래사장 위를 걷고, 쪼그려 앉아 파도를 구경했다. 강렬하게 밀려왔다가 흩어지듯 사라지는 것을,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온종일 그 위에 누워있기도 했다. 푸르렀다 하얗게 변하는, 촉촉하게 스며드는 짙은 모래 위에서 바닷물을 한참이나 머금고 있기도 했다. 소연은, 늘 같은 미소를 짓고서 바다, 아니 파도를 즐겼다. 축축히 젖은 땅 위에 누워 밀려오는 거품에 머리카락이 온통 젖어버려도, 옷과 신발이 무거워져도,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그사람은 수영을 잘해요. 제가 멀리 떠내려가면, 바다 속 깊은 곳에서 수영을 해, 어느 순간 나타나 저를 놀래키죠. 그리고 구해주곤 했어요.”

그럴거면, 바다에 들어가지 그래. 소연은 깊은 바다 위 흔들리는 물결보다 모래사장 위의 흰 거품을 좋아했다. 사람들 같지 않아? 그렇게 물어오면 나는 그저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는게 전부였다.

“친구들 모두가, 부러워해요. 잘생겼고, 다정하고…. 회사에서 정말 유명해요. 엘리트라고. 대부분의 일은 그사람이 다 하는 것 같아요. 얼마전에 큰 계약도 따왔다고, 응.”

사람들 같아. 거품은 언젠가 바스스 사라질 것, 저 멀리 도망가는 푸른 것들은, 결국 따라올 본성과도 같지 않느냐고, 내 감상평을 이야기 한 적이 있다. 하얀 거품으로 일어나 다가오는 사람에게 과시를 하고, 들킬새라 도망가는 모습을 닮았다고. 소연은 고개를 저었다. 그건 파도가 아니야.

“저도 좋아요. 아주 이상적인 사람이니까.”

너는 파도가 왜 좋아. 그렇게 물었던 적이 있었다. 소연은, 부서지니까, 하고 답했다. 부서지는 게 왜? 그 자체로 오롯이 부서지니까. 그걸로 그 역할을 다하니까.

“이상적인 사람이요? 당연히, 저에게 잘해주고…. 네. 잘해주죠….”

소연은 파도를 만날 거라고 했다. 그렇게 파도가 될 것이라고. 네가 생각하는 파도와 같은 사람은 어떤 사람인데? 소연은 지난 질문과 같은 답을 했다. 망설임없이 부서지는 사람.

“흰 거품 같아요. 멋있죠…. 그 속 푸른 이면 속에는 아직 뭐가 있는 지 잘 모르지만, 바다에서 흩어지는 거품만큼 아름답다고 생각해요. 그게, 제 기준이니까…. 남들이 하는 만큼은 잘해주니까. 전화하고, 함께 저녁을 먹고, 일을 잘하고, 지위가 높고….”

바다 깊숙히 그토록 많은 것을 포용하고서 어떠한 생색도 없이 한들한들 움직이고, 누군가와 가까워질때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강력해지고. 맞닿는 순간에 그렇게 포근하게 부서져 스며드는 사람.

“…파도와 같은 사람이에요.”

소연은 평생을 파도를 찾아다녔다. 그러다 마음 속의 파도에 잠식당해 온전히 파도가 되어버렸지만.

“저는 파도를 찾고 있었어요.”

여전히, 친구를 보고 계신가요? 의사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눈을 감았다.

“아뇨. 그건 파도가 아니었어요.”


<끝.>


from.김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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