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어느 저자 Oct 06. 2021

[여름호] 둘째주, 만춘 : 지현의 이야기

여름호 두번째 주제 : free(자유주제)

 어쩐지 구름이 심상치 않더라니, 버스 창문에 빗자국이 새겨지기 시작했다. 지현은 아침에 우산을 챙기라던 현수의 말을 듣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그렇다고 모처럼 연차를 내고 쉬고 있을 현수에게 데리러 와달라고 연락을 하려니 미안해졌다. 때마침 핸드폰 진동이 울렸다. 현수였다.


 '버스 정류장이야. 고마워해도 됨.'


 저 멀리 한 손에는 지현이 좋아하는 노란색 우산을, 다른 한 손에는 검은색 커다란 장우산을 들고 서있는 현수가 점점 가까워졌다. 버스가 멈춰 서자 지현은 아이처럼 천진한 표정으로 현수의 우산 아래로 들어갔다. 둘은 나란히 집까지 걸어갔다. 현수는 이럴 거면 굳이 우산을 두 개나 가지고 올 필요가 없었겠다고 생각했다.


 "샤워는 나 먼저 할래." 현수가 말했다.

 "같이 할까?"


 지현의 말을 듣자마자 현수는 화장실로 들어가 문을 잠갔다. 지현은 피식 웃으며 거실 바닥에 드러누웠다. 차가운 바닥에 살이 닿자 소름이 돋았다. 이내 몸에 힘이 빠지면서 나른해졌다.


 지현은 문득 옛날 생각이 났다. 오전 동안만 자율학습을 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토요일이었다. 그날도 비가 내리긴 했지만 우산을 쓰기에는 애매한 안개 같은 봄비였다. 지현은 가방에서 접이식 3단 우산을 꺼냈다. 이렇게나 엄마의 잔소리가 고마울 때가 없었다. 그런 지현의 곁에 현수가 멈춰 섰다. 현수는 어느 여고에나 한 명쯤은 있을 법한 짧은 머리에다 남자애처럼 하고 다니는 아이여서, 학교에서 현수를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지현은 현수에게 대뜸 말을 걸었다.


 "같이 쓰고 갈래?"


 현수는 당황한 표정으로 지현을 쳐다봤다. 그도 그럴 것이 지현과 현수는 여태 단 한 번도 같은 반이 된 적이 없었고, 인사를 하며 지내는 사이는 더더욱 아니었다. 그저 아파트 같은 동에 살아서 종종 마주치는 것이 전부였다. 그사이 혼자 쌓아온 내적 친밀감 때문이었을까. 지현은 뜬금없는 자신의 용기가 황당했다.


 "고마워. 같은 동에 살지?" 현수가 웃으며 답했다.

 "응. 어차피 같은 동이니깐."


 지현의 3단 우산은 둘이 쓰기에는 비좁았다. 현수는 어정쩡하게 지현의 곁에 서서 걸었다. 둘은 각자의 한쪽 어깨가 젖으면서도 서로에게 몸을 기울일 수가 없었다. 말 한마디 없이 걷던 둘은 118동 지현이네 라인에 먼저 도착했다. 지현은 현수에게 우산은 쓰고 가고 나중에 돌려달라고 말하고는 도망치듯 계단을 올라갔다.


 주말이 지나고 월요일 2교시 쉬는 시간에 지현의 반으로 현수가 찾아왔다. 현수는 가지런히 접힌 우산과 곰 젤리를 건넸다. 지현은 웃음이 터졌다.


 "곰 젤리 싫어해?" 현수가 물었다.

 "아니, 뭔가 안 어울려서."

 "뭐가?"

 "그냥... 넌 이런 거 안 좋아할 것 같았어."

 "내가 무뚝뚝해 보여서?"

 "약간?..."

 "곰 젤리, 맛있는걸."

 "좋아해, 곰 젤리."


 그날부로 둘은 인사를 주고받기 시작했고, 종종 등하굣길을 함께했다.


지현은 늘 이 작은 도시를 떠나 서울로 갈 거라고 말했다. 서울에 가서 지방에서는 좀처럼 열리지 않는 전시회도 보러 가고, 주말이면 지하철을 타고 여기저기 예쁜 카페를 찾아다니고, 좋아하는 인디 가수의 공연도 가보고, 그래서 자기는 꼭 서울에 있는 K 대학교에 합격하고 싶다고 현수에게 이야기했다. 눈을 반짝이며 재잘거리는 지현과 달리 현수는 그저 지현이 하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웃어주었다. 지현은 그런 현수의 웃음이 참으로 어른스럽다고 생각했다.


 수능 전에 치는 마지막 사설 모의고사 날이었다. 3교시 영어 시험이 끝나고 쉬는 시간이 되자 담임 선생님께서 K 대학교에 지원한 사람들은 교무실로 내려오라고 했다. 지현을 포함한 3명의 학생이 담임 선생님의 모니터 앞에 둘러섰다. 선생님은 K 대학교에 가장 가고 싶어 했던 지현의 이름과 수험번호부터 입력했다. 모니터 정중앙에는 빨간 글씨로 불합격이라고 적혀있었다.


 일순간에 들뜬 분위기는 정적에 휩싸였다. 친구들은 지현이 불합격이면 우리도 불합격이겠다며 위로 아닌 위로를 건넸지만 지현을 제외한 나머지 2명은 모두 합격이었다. 지현은 애써 웃으며 친구들을 축하해 줬다. 당장이라도 울음이 터져 나올 것만 같았지만 선생님께 정중히 말씀드리고 조퇴를 하기로 했다.


 지현은 교실로 돌아가 서둘러 가방만 챙겨서 현관으로 내려갔다. 하필이면 소나기가 내리고 있었다. 지현은 아랑곳하지 않고 비를 맞으며 집으로 걸어갔다. 지현의 분함과 억울함이 섞인 눈물이 빗물과 함께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처량한 열아홉 소녀의 뒤에서 누군가 다가와 우산을 씌워줬다. 현수였다. 둘은 각자의 어깨를 꼭 붙인 채 서로에게 몸을 잔뜩 기울였다. 지현은 참았던 울음이 터져 나왔다. 현수는 소리 내어 엉엉 우는 지현의 어깨를 꼭 붙잡아 주었다.


 '덜커덕.'


 뽀얀 수증기가 새어 나오며 화장실 문이 열렸다. 목이 늘어난 반팔 티셔츠를 입고 젖은 긴 머리를 수건으로 돌돌 말아올린 현수가 나왔다. 지현은 그런 현수를 빤히 쳐다보다가 말했다.


 "고마워."

 "뭐가?"

 "항상."


 지현은 현수의 수건을 휙 풀어버리고는 화장실로 도망갔다.



from.만춘

이전 08화 [여름호] 둘째주, 은희 : 기분 좋은 소음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