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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느 저자 Oct 05. 2021

[여름호] 둘째주, 시언 : 초록빛 노을

여름호 두번째 주제 : free(자유주제)

다람쥐 몇 마리가 재빠르게 나무 위를 오른다. 작고 연약해 보이는 몸집으로 뾰족하게 튀어나온 나뭇가지 틈을 잘도 파고든다. 이파리만 무성한 진회색의 나무는 어딘가 흘러내린 듯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마치 땅에서부터 자란 게 아닌 하늘에서부터 자란 듯한 모양새였다. 그 위를 오르는 다람쥐는 오른다기보다는 휩쓸려가는 것처럼 보였다. 어느새 정상에 있는 나뭇가지 끝에 도착한 작은 물체들은 가만히 멈춰 서서 서로를 쳐다보는 듯했다. 짧은 신경전이 지나더니 다람쥐 무리 중 한 마리가 옆에 나무로 도약한다.


쉬익 -

퍽.


작은 물체는 잠시 공중을 날더니, 이내 나뭇가지에 도착하지 못하고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퍽. 하는 소리에 눈을 질끈 감았다. 다람쥐가 나무에서 떨어지다니, 아니 애초에 다람쥐가 나무 사이를 뛰어다니던가? 다시 눈을 뜨고 나무 위를 보니 다람쥐 무리는 떨어진 자신의 동료를 가만히 쳐다보고 있다. 그러고는 한 마리씩 도약한다. 아무렇지 않게 착지한 다람쥐들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사라진다.

자연스럽게 나무 끝으로 닿은 시선 끝에 빼곡하게 들어선 나무들이 보였다. 하나같이 흘러내리는 듯한 모습을 한 나무들은 그 잎이 무척이나 울창해서 하늘을 가리고 있었다. 햇빛이 거의 들지 않는 것을 발견했을 때, 주변이 매우 어둡다는 것을 알아챘다. 시간대는 분명 낮이지만, 주변은 온통 초록빛과 검정 그 사이의 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여기가 어디쯤인지 전혀 짐작도 못 하겠다는 생각이 들자 이번엔 후각이 반응한다. 짭짤한 소금 냄새가 희미하게 코를 찌른다.

- 어디선가 맡아본 냄샌데...

마치 바닷가에서 맡아본 냄새라는 생각이 들고 나서야 나무들 사이로 펼쳐진 바다가 보였다. 바다가 시야에 들어오자마자 발걸음이 움직여진다. 꼭 저 바다를 가까이서 봐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렇지 않더라도 이 음침한 곳에서는 답답해서 더 있지 못할 것이다. 그렇게 발을 떼는데, 아무렇게나 자란 풀들은 발을 감싸고 들어온다. 저곳에 가면 안 된다는 듯이, 보면 안 될 것이 존재한다는 듯이 다리를 휘감고 꽉 잡는다. 한 발, 한 발 내디디며 풀들을 쳐낸다. 평소에 걷는 것보다 훨씬 발걸음이 무겁다. 마치 중력이 강해진 것처럼.


힘겹게 도착한 바다는 바위로 둘러 쌓여있었다. 아니, 바위 속에 안겨있다는 표현이 더 맞을 것이다. 마치 초승달처럼 생긴 거대한 바위 둑은 바닷물이 들어오는 단 한 곳만 남긴 채 바다를 감싸고 있었다. 어느 각도에서 보면 호수라고 착각할 정도로 바닷물이 고여 있는 듯한 형태였다. 서로 꼭 맞물려 있는 매끈한 바위들은 처음부터 바다를 모아두기 위해 저곳에 존재했던 것 같다. 이곳에 바다를 모아두지 않으면 큰일이라도 날 것 같은 그런 느낌이 드는 모습이었다. 작게 일렁이는 바다 멀리 해가 지는 것이 보였다. 초록빛을 뿜는 해가, 바위 둑을 넘어가고 있었다. 초록빛이라니. 오로라일까? 아니, 오로라가 어떻게 생겼는지는 안다. 그런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게다가 해가 뿜는 초록빛이라니. 숲속에서 온통 초록빛이라 생각했던 것은 해가 잎 사이로 비집고 들어왔던 까닭이었다. 다시 돌아본 나무의 잎과 가지는 모두 진회색이었다.

파도가 만들어낸 하얀 거품 사이로 집게발이 유독 큰 게 한 마리가 돌아다닌다. 게가 걷는 곳을 따라 시선을 옮기니 아주 작은 해변이 있었다. 폭은 길어야 서른 걸음이 채 안 될 것 같은 아주 작은 해변. 손톱 끝처럼 생긴 그 해변 한가운데에 나무로 지은 통나무집이 있었다. 이번에도 발걸음은 자연스럽게 옮겨졌다. 짙은 갈색의 무늬가 화려하지 않은 통나무가 지붕에 대충 올려져 있고 나무 사이 작은 틈들을 넓은 나뭇잎이 막고 있다. 젖은 모래도 곳곳에 보이는 거로 봐서 비 때문에 보수 공사를 틈틈이 하는 듯해 보였다. 벽면은 지붕보다는 조금 연한 색의 나무로 만들어졌다. 그나마 색채를 지닌 것이 이 공간에서 유일하게 활기를 띠는 장소처럼 보였다. 도대체 이런 곳에 누가 살까. 이렇게 비현실적인 공간에 누가 산다는 사실도 잠시, 내가 아닌 누군가가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조금의 안도가 생겼다.


“아저씨.”


작은 외침에 소리가 나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발목까지 내려오는 흰 원피스를 입은 소녀가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옷과 대조되는 새까만 머리칼, 검은색의 감정 없는 눈동자, 붉은 입술과 새하얀 피부. 이 공간과 너무도 어울리지 않는 소녀의 모습은 어딘가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


“또 왔네요.”

“...나를 알아?”

“당연하죠. 매일 오시는걸요.”


내가 매일 온다니. 상상으로도 이런 장소를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 여행이라면 치를 떠는 내가 이런 곳에 올 리가 없는데. 애초에 여기가 지구가 맞긴 할까? 좀 전의 익숙한 느낌은 매일 왔기 때문일까.


“내가 매일 와?”


소녀는 대답 대신 해변으로 걸어갔다. 유일하게 맑은 빛을 가진 존재가 사라지자 공간의 침울함이 느껴졌다. 불쾌한 기분이 싫어 소녀를 따라갔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소녀는 계속해서 걸었다. 고작 서른 걸음이면 끝나는 해변을 S자를 그리며 왔다 갔다 걸었다. 두어 번 따라 왕복하던 나는 자리에 멈춰서 소녀의 움직임을 지켜봤다. 소녀는 S자는 점점 바다로 가까워져서 파도와 맞닿을 것만 같았다. 소녀는 거기서 멈춰 섰다.


“저 빛이 보여요?”


수평선 끝을 바라보며 소녀는 물었다.


“여기엔 초록빛 노을이 져요.”

“어째서 노을이 초록빛일 수가 있는 거지?”

“아저씨는 노을을 제대로 바라본 적이 있어요?”


잠시 고민을 해봤다. 내가 사는 곳은 노을은커녕 햇빛 한 번 보기도 힘든 곳이다. 워낙 높은 고층 빌딩들 사이에 둘러싸여 사는 삶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애초에 하늘을 바라볼 여유 따위는 없었다. 정신 차리면 바깥엔 어둠이 깔리는데, 노을을 제대로 쳐다본 적이 있을 리가 없었다.


“아니. 내가 사는 곳에는 노을을 보기가 좀 어렵거든. 그런데, 그렇다 하더라도 노을이 초록빛이 아니란 것쯤은 알아.”


소녀는 여전히 아무 어조도 감정도 없이 바다 끝을 바라보며 얘기했다.


“원래 노을에는 많은 색이 있어요. 빨간색도 있고 노란색도 있고 분홍색, 다홍색, 파란색, 보라색도 있어요. 노을은 태양이 떠나가기 전에 최대한 자기를 표현하는 방법이에요. 마치 사람이 죽을 때 자기도 모르는 여러 가지 색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것과 같아요. 태양은 매일 죽거든요. 매일 죽으면서 자기를 알리는 거예요. 사실 이런 색도 있었다고, 숨겨진 모습을 보여주는 것과 같죠. 그래서 태양도 자기가 무슨 색을 비출지 몰라요. 노을이 질 때는.”


‘태양이 매일 죽는다’니. 소녀는 여전히 바다를 바라보며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초록색은 태양의 약점이에요. 태양은 초록빛을 비추는 법이 없어요. 매일 죽는 그 순간조차, 초록빛을 숨겨요. 가장 부끄럽고 숨기고 싶은 약점이니까요. 그래서 노을에는 초록빛이 없는 거예요. 하지만, 여기는 초록빛 노을이 져요. 이곳은 초록빛 노을이 져도 되는 곳이에요.”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늘어놓는 소녀였다. 그 거대한 빛을 내뿜는 태양에 약점이 있다니, 하늘을 뒤덮은 초록색의 빛이 더욱 침울하게 느껴졌다.


“이곳은 약점이 모이는 곳이에요. 태양부터 바다, 바위, 모든 것의 약점이 모이는 곳이에요. 이 아이도 누군가의 약점이에요. 얘는 여기서 ‘허영’이라고 불려요. 누군가의 약점이 형상화 한 것이죠.”


소녀는 좀 전의 집게발이 유독 큰 게를 가리키며 얘기했다. 자세히 바라본 게의 몸집은 집게발에 비해 너무도 작았다. 작은 몸집으로 거대한 집게발을 들고 어렵사리 걸어가는 게는 희한하게 걸었다. 조금 걷고, 집게발을 딱딱하고 부딪히고 다시 걸어갔다. 마치 거대한 집게발을 과시하는 듯한 움직임이었다.


“그러고 보니, 숲속에서 만난 다람쥐들이 조금 이상했어.”

“아, ‘비겁’을 만났나 보네요. 나뭇가지를 넘어갈 수 있는 친구들은 ‘비겁’, 그러지 못한 친구는 ‘두려움’이라고 불리죠.”


나무 아래로 떨어지는 다람쥐의 모습이 떠올랐다. 싸늘하게 먼저 건너지 못한 동료를 바라보던 ‘비겁’들의 눈과 ‘두려움’이 바닥에 부딪히며 나는 소리가 떠올라 온몸에 소름이 돋는 기분이 들었다.


“너는 누구야? 너도 누군가의 약점이야?”

“아니요.”


소녀는 더 이상의 설명을 하진 않았다. 소녀가 누군가의 약점이라면, ‘무채색’이 더 어울릴 듯했다. ‘무미건조함’, ‘싸늘함’ 이런 것도 약점이 되려나. 그나저나, 약점이 모이는 곳인데 약점이 아니라면 소녀는 왜 여기에 있는 걸까. 그렇다면 나도 누군가의 약점이 되었는지 궁금해졌다.


“나도 누군가의 약점인 걸까?”

“그건 아니에요. 아저씨는 일주일째 여기 나오고 있어요. 이곳에 왔으면 약점을 두고 가야 해요. 아저씨는 약점을 내려놓지 못해서 매일 오는 거예요.”

“나의 약점?”


순간적으로 회사 면접을 보던 순간이 떠올랐다. ‘지원자의 단점을 말해보세요.’ 하는 질문을 던지던 무표정의 면접관들과 숨 막히던 분위기가 떠올랐다. 내가 그 질문에 뭐라고 대답했더라. 대답을 하긴 했었던가.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약점이 없는 것 같아. 나는 왜 여기에 오게 된 걸까?”

“그걸 찾고 있을지도 모르겠죠. 아니면, 그게 약점이거나.”


“시간이 다 되어가네요.”


어느새 주변의 초록빛이 옅어지고 있었다. 끝이 보이지 않은 칠흑 같은 어둠이 점점 공간을 집어삼켰다. 바다 바위 둑 근처의 바다에서는 한 마리의 고래가 솟아올랐다. 공중에서 한 바퀴를 돌고, 큰 소리를 내며 바다로 떨어졌다. 나무들의 잎이 흔들리는 소리가 커지는 것 같았다. 어디선가 정체 모를 생명체의 소리도 들리는 것 같았다.


잠겨가는 어둠 속에서 소녀는 마지막으로 말했다.


“걱정 마세요. 늘 여기에 있을 거니까. 언제든지 찾을 수 있게, 누구든지 나갈 수 없게.”



from.시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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