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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느 저자 Oct 14. 2021

[여름호] 셋째주, 시언 : 벽을 오르는 일

여름호 세번째 주제 : free(자유주제)

숨을 고른다.
어렵사리 벽 틈으로 집어넣은 손에는 점점 힘이 빠지고 있다. 최대한 온몸을 벽에 가깝게 붙이며 다음번에 손을 뻗어 잡을 홀드를 눈이 빠져라 노려본다. 거리는 충분하다. 무게를 지탱하는 엄지발가락의 감각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다. 그나마 남은 힘을 짜내 발끝으로 보낸다. 마음을 다잡고 홀드를 향해 반대편 팔을 뻗는다. 동시에 몸이 기울어지며 돌아간다. 손가락 끝에 홀드와 벽 사이 빈 공간이 걸린다.
‘됐다!’
라고 생각하는 찰나, 무게중심을 잃은 몸은 가볍게 아래로 떨어진다. 푹신한 매트리스 위로 온몸을 던지며 한 바퀴를 데구루루 구른다.

“아쉽다. 거의 다 왔는데.”
“오른쪽 다리를 먼저 올리고 팔을 뻗어봐.”
“아니야. 내 생각엔 두 손을 합쳤다가 가야 해.”
“조금만 더 천천히 해보면 될 것 같은데요?”

바닥에 내팽개쳐진 상태 그대로 숨을 헐떡이는 내게 하나둘 사람들이 다가와 말을 건다. 원망스러운 눈빛으로 조금 전 놓친 홀드를 바라본다. 동그란 만두처럼 생긴 홀드가 왠지 약 올리는 것만 같다. 거의 다 왔는데. 될 것 같았는데.

“다음번엔 한다.”

몸을 툭툭 털며, 뒤편 매트리스로 가 자리를 잡고 앉는다. 조금 전까지 온몸을 다해 벽에 붙어있던 내 모습을 떠올리며 어떻게 해야 만두를 잡을 수 있을지 고민한다. 이미 앉아있는 사람들끼리는 토론이 붙었다. 이렇게 해보면 좋을 것 같은데. 아니야 이 방법이 맞는 것 같아. 떠드는 사람들 사이로 한 사람이 벌떡 일어나 내가 떨어졌던 벽 앞으로 걸어 나간다. 양손에는 흰색 초크를 잔뜩 묻힌 채로. 이래라저래라 각자의 의견을 내놓던 사람들은 이내 숨을 죽이고 다음 사람의 움직임을 관찰한다. 어렵게 잡아내면 다 같이 ‘나이스!’ 하고 반응하고, 아쉽게 놓치면 내가 놓친 것처럼 아쉬워한다. 그러다 마침내 목표 지점에서 두 손이 모이면 한마음으로 숫자를 센다. 하나. 둘. 셋. 그리고 마침내 박수가 이곳저곳에서 터져 나온다. 양손을 길게 뻗고 사뿐하게 벽에서 내려온 사람은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다시 ‘대기’ 매트리스로 돌아온다. 이미 성공한 사람은 축하를, 성공하지 못한 이는 자세를 어떻게 했냐고 묻는다. 이곳에 대기하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 서로를 처음 본 사람들이다.


몇 주 전부터 나가고 있는 암장은 신비로운 곳이었다. 알록달록, 울퉁불퉁, 이렇게 저렇게 제멋대로, 하지만 분명하게 생긴 홀드들이 벽면을 가득 채우고 있는 곳. 사람들은 저마다 각자의 방법으로 그 홀드들을 잡거나 밟으며 옆면이나 위로 나아갔다. 누군가는 게처럼 조급하게 움직였고, 누군가는 거미처럼 우아하게 움직였고, 누군가는 어릴 적 만화에서만 보던 타잔처럼 자연스럽게 움직였다. 어릴 적 놀이터를 꽤 주름잡았던 나는 정글짐이나 구름사다리를 마구 누볐던 나를 떠올리며 호기롭게 타잔처럼 움직일 나를 상상했다. 하지만, 삼십 킬로가 넘게 불어버린 체중을 지탱할 힘은 함께 성장하질 못했었다. 나는 마치 새끼 게처럼 조급하고 약하게, 하지만 절대 그처럼 빠르지는 않게 옆과 위로 나아가는 연습을 했다.
벽면에 붙어있는 일에는 아주 많은 요령이 필요했다. 팔 힘과 다리 힘이 필요했고, 나아가기 위해서는 등과 골반을 이용해야 했다. 엄지발가락에 온 체중을 실어 작은 홀드를 밟고 버텨야 했고, 손가락을 이용해 온 체중을 버텨야 하는 상황도 많았다. 더 이상 나아갈 힘이 없어 팔에 힘을 쭉 빼고 벽면에 붙어있자니, 여름철 고목에 붙어있는 매미들이 떠올랐다. 매미들에게는 나무에 붙을 힘과 힘차게 울부짖을 힘도 있었다. 강한 곤충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잡생각이 들고 나면 십중팔구 바닥에 떨어지게 되었다.

암장의 신비로움은 바로 거기서 나왔다. 게처럼 벽을 타는 사람이든, 거미처럼 움직이는 사람이든, 타잔처럼 자유롭게 누비는 사람이든 벽을 오를 때는 자신이 오르지 못했던 길을 찾아 오른다. 처음 오르는 벽은 몇 번이고 떨어지게 되어있다. 중요한 건, 몇 번을 떨어져도 다시 오른다는 것이었다. 벽을 오르는 일은 여러 번 떨어지는 일과 비슷하기도 했다. 여러 번의 추락을 경험하고 나면 떨어지는 일은 두렵지 않아진다. 여러 번 바닥을 구르고, 손가락의 껍질이 벗겨지고 나서도 끊임없이 도전한다. 오히려 어떻게 잡아야 할지, 무게 중심을 어떻게 움직여야 할지, 손의 위치를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한 감각만 늘어날 뿐이었다. 아무렇지 않게 툭툭 털며, ‘다음번엔 한다’고 다짐하고, 까진 손가락에는 밴드를 감는다. 한계를 뛰어넘기 위해 두려움과 통증은 뒤로 한 채.

벽에 붙어있지 않을 때는, 모두가 같은 사람이 되었다. 매트리스 바닥에 앉아 함께 고민하고 토론한다. 물어보지 않아도 먼저 나서서 알려준다. 하지만, 벽에 붙는 순간 모두가 조용히 한다. 길을 찾아가는 건 오롯이 자신의 몫이다. 누구도 알려주지 않는다. 지켜보는 이들은 답을 알지만, 스스로 헤쳐나갈 힘을 기대한다. 그리고 스스로 길을 찾게 되었을 때, 그 누구보다 자신의 일처럼 기뻐한다. 그러니, 암장이라는 공간은 신비로운 장소일 수밖에 없었다.
쭈뼛거리며 암벽 아래 서면 암장의 모든 사람이 나를 주목하는 듯한 부담이 느껴지다가도 홀드를 잡고 출발하는 순간, 자신의 손과 다리만 보이게 되는, 정말이지 희한한 스포츠였다.

마감 시간까지 도전했던 문제를 풀지 못한 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함께 암장을 다니는 형들에게 말했다.
“정말 할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아쉽다.”
형들은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말했다.
“다음번에 하면 되지.”

다음번에 도전하면 성공할 것이라는 믿음. 될 때까지 도전할거니까 할 수 있다는 그 말이 참 좋았다. 정말로 다음번엔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검은 티에 군데군데 묻은 흰 초크 자국과 손가락에 감긴 밴드들이 훈장처럼 보여 괜히 가로등 불빛 아래로 걸었다. 밤이 지나는 게 아쉬워 발걸음은 느적하게 걸었지만, 마음은 어딘가 포근하게 차오르고 있었다.

 


from.시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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