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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느 저자 Oct 15. 2021

[여름호] 넷째주, 시언 : 어른스러운 사랑

여름호 네번째 주제 : 어른

 삐걱거리는 낡은 마루, 타닥거리며 타오르는 장작 소리, 은은하게 퍼져나가는 주황빛 백열등, 그사이 들려오는 기타 소리. 우리의 그 공간을 떠올리면 제일 먼저 생각나는 것들이에요. 당신은 주로 스팅의 노래를 연주하곤 했죠. 세상이 무너지는 마지막 순간이 온다면 꼭 스팅의 노래를 들으며 사라질 거라며, 그들의 음악적 철학을 연설하던 당신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네요.


우리가 따로 지낸 지 벌써 3년이나 지났어요. 우연히 당신의 최근 모습을 찍은 사진을 발견했었는데, 놀라지 않을 수가 없더군요. 덥수룩하게 기른 수염과 빠진 살 때문에 솔직히 처음에는 당신인지 알아보지 못했어요. 하지만, 여전히 고지식하게 입은 옷 스타일만큼은 변하지 않았더군요. 덕분에 형태는 조금 달라졌더라도 사진 속 사람이 당신이라는 걸 금방 알 수 있었어요. 특히나 초라하게 바뀐 행색 속에서도 반짝이는 눈빛이 당신이라는 확신을 줬죠. 하고 싶다던 일은 잘되어가나요? 눈빛을 보아하니 잘 되진 않더라도 노력하고 있다는 것은 잘 알겠어요. 당신은 그런 사람이니까요.

달라진 당신만큼이나 저도 많은 것이 변화했어요. 머리는 어느새 허리께까지 자랐고 발목까지 오는 원피스 대신 반바지를 즐겨 입고 다녀요. 온몸이 찐득거리는 게 싫어 여름을 싫어하던 제가, 온 세상이 푸르게 찬 모습이 좋아서 여름을 사랑하게 됐어요. 당신이 제게 늘어놓던 여름의 장점들이 이제야 이해가 되더라고요. 마루에 앉아 먹는 아이스크림이라던가, 풀벌레들의 온갖 불협화음으로 가득 찬 산책로 같은 것들 말이에요. 그중에서 가장 좋아하게 된 건 장대 같이 쏟아지는 비예요. 웃기죠? 비를 좋아한다던 당신을 그렇게 이해할 수 없었는데, 쏟아지는 비를 바라보며 따뜻한 커피를 내려 마시는 게 가장 좋아하는 일이 되어버렸어요. 지금의 제 모습을 본다면 당신이 꽤 놀랄 것이라고 자신할 수 있어요. 조금은 어른스러워졌다고 말해 줄지도 모르겠네요.


시답잖은 얘기들로 편지를 시작해서 미안해요. 오랜만이라 어떤 말을 하면 좋을지 알 수 없어서 그랬어요. 그래요. 갑작스럽게 답장을 보내는 이유가 궁금하겠죠. 기대했다면 미안하지만, 사실 그렇게 대단한 일은 아니에요. 어쩌면 당신은 이미 잊어버렸을 이유 때문이죠.

우리가 서로를 떠나게 된 이유를 기억하나요? 당신은 제게 늘 어른스러운 사랑을 하고 싶다고 얘기했어요. 저는 당신과 만나는 내내 그 ‘어른스러운 사랑’이 무엇일지 한참을 고민했었죠. 당신은 ‘사사로운 일에 신경 쓰지 않는 관계’가 어른스럽다고 했고, ‘지나치게 자주 연락하지 않는 사이’가 어른스러운 사랑이라고도 했죠. ‘각자의 삶을 존중할 줄 아는 관용’이 있어야 한다고 말했으며, ‘현재보단 미래를 고민할 줄 아는 것’이 어른스러운 것이라고 말했어요. 나는 혼란스러웠어요. 당신이 말하는 ‘어른스러운 사랑’은 여러 가지 모습을 하고 있었거든요. 어른스러운 사랑을 하기 위해선 ‘어른’이 되어야 한다는 당신의 말에 ‘어른’은 무엇일까 하고 떠올렸던 적도 많았죠. 나는 당신에게 어른스러워 보이고 싶어서 처음으로 굽이 높은 구두도 신어봤고, 평소에 읽지도 않던 책들을 읽기도 했어요. 매번 당신이 무얼 하고 있을지 궁금해하는 것도 참아보았고, 보고 싶다는 말도 최대한 안 하려 했었죠. 하지만, 그럴수록 나는 ‘사랑이 정말 어른스러울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모든 일에 당신이 중심이었던 당신과 다르게 나는 당신이 나의 중심이었어요. 당신과 나누는 사사로운 모든 대화와 행동이 신경 쓰였고, 지나칠 만큼 자주 연락을 주고받고 싶었죠. 당신의 삶을 분명 존중했지만, 그 안에 제가 녹아있길 원했으며, 당신과 그리는 미래 그리고 그보단 지금 당장 함께 있는 그 순간들을 더 소중히 여기고 싶었어요. 다른 사람에겐 못해도 서로에겐 어리광을 피울 수 있는 존재가 되길 원했고, 힘들고 어려울 땐 하염없이 눈물 흘릴 수 있는 편한 상대가 되길 원했죠. 당신은 아름다운 얼음 조각처럼 우리 사이를 조각하고 싶었고, 나는 모닥불처럼 우리 사이를 뜨겁게 달구고 싶어 했죠. 결국 우리는 어울릴 수 없는 사이였던 거예요.


이미 지나버린 이야기를 굳이 꺼내 드는 이유는 바로 그것 때문이에요. 당신에게 “빌어먹을 기타연주는 때려 치고 제발 내 얘기 좀 들어줘.”라고 소리치던 밤 당신은 아무 말 없이 기타를 내려놓으며 제게 “네가 조금 더 어른스러운 사랑을 경험하면 좋겠어.”라고 말했었죠. 그 말이 이별을 뜻하는 줄 알았던 건, 당신이 집에 돌아오지 않은 지 삼 일째 됐을 때였어요. 그제야 저는 제 짐을 챙겨 그 공간을 빠져나갔죠. 당신이 아끼던 스팅의 앨범을 가져간 건 미안해요. 마음 한편이 구멍이 난 것처럼 허탈해서 견딜 수가 없었어요. 그렇게라도 해야 구멍이 메워질 것만 같았어요.

작년에 보내주신 편지는 잘 읽었어요. 잘 읽었을 뿐만 아니라 열 번도 넘게 읽었어요. 당신은 답장도 없는 제가 편지를 읽었을지 안 읽었을지 궁금했겠지만, 저는 당신이 이 편지를 읽을지가 그렇게 궁금하지는 않아요. 미안하지만, 함께 보내줬던 공연 티켓은 친한 동생에게 대신 줬어요. 당신을 마주할 자신이 없었거든요. 그동안 하고 싶었던 얘기들을 마구 쏟아내서 공연을 망쳐버릴 것만 같았어요. 그래서, 그 감정을 정리하고 차분히 편지를 보내기 위해 꽤 오래 기다렸어요. 아주 늦은 답장을 보내게 되어 미안해요. 하지만, 이제야 당신의 마지막 말에 답변을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당신이 말한 ‘어른스러운 사랑’, 나는 여전히 하고 있지 않아요. 하지만, 나는 불행하지도, 가엽지도, 그렇다고 어른이 아니기도, 제 자신이 아니지도 않아요. 몇 번의 사랑을 거치면서 여전히 뜨겁게 사랑했고, 그게 저의 사랑 방식이라는 걸 알게 되었죠. 당신이 그러지 않았던가요? 스스로를 잘 아는 게 중요한 일이라고. 저는 어른스럽지 않을진 몰라도 나 자신을 잘 알게 되었어요. 그리고 그런 제가 정말 좋아요.


충분한 답변이 되었을까요?

마침 창밖에 장대 같은 비가 쏟아져 내리네요. 이만 커피를 내려 마시러 가야겠어요.

부디, 당신도 당신의 모습을 꾸준히 사랑할 수 있기를, 당신만의 사랑을 이어갈 수 있기를 바라고 있을게요.



당신을 아이처럼 사랑했던,

S.



*추신: 가져갔던 스팅의 앨범을 같이 첨부해서 보내요. 당신 생각이 날 때마다, 몰래 여러 번 돌려 들었어요. 이제는 듣지 않아도 될 것 같아요. 고마웠어요.



from.시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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