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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느 저자 Oct 08. 2021

[여름호] 셋째주, 은희 : 비를 피할 수 없다면

여름호 세번째 주제 : free(자유주제)

솨아아-
장마의 시작이라도 알리듯 세차게 비가 내린다. 퇴근길, 마음 단단히 먹고 우산을 펼쳤다. 하지만 역시는 역시라고, 건물 밖을 나선 지 고작 몇 발자국이건만 우산은 나를 지켜주지 못했다. 축축하게 다리에 달라붙은 바지를 보니 샌들을 신고 나와 다행이라는 생각만 들었다.

누군가가 나에게 비를 좋아하느냐 물어본다면 내게 피해가 되지 않는 비를 좋아한다, 답하고는 했다. 비를 좋아하지만 전제 조건이 붙는다. 그 조건은 ‘내 몸은 뽀송한 상태를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비를 맞지 않은 상태로 내부에서 비가 오는 바깥 풍경을 바라보던가, 샤워 후 침대에 가만히 누워 비 오는 소리를 듣던가. 이것으로 비를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한 건 비 오는 풍경 한가운데에 있는 건 그다지 선호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신발이 젖어 무거워지는 것도, 눅눅한 바지가 다리에 달라붙는 것도, 높은 습도로 인해 몸이 찝찝해지는 것도. 조금이라도 내 몸을 지켜줄 수 있는 우산이 없는 상황이라면 먹구름 가득한 하늘이 괜히 미워지기도 한다.
그렇지만 가끔, 정말 아주 가끔 비 오는 순간이 좋아질 때가 있다. 여전히 우산은 나를 지켜주지 못했음에도, 집에 도착하기까지 꽤 많은 시간이 남았음에도, 높은 습도에도 불구하고 몸이 한껏 가벼워지곤 하는데 그런 순간을 되돌아보면 내가 어찌할 수 없을 정도로 세찬 비가 내릴 때가 대부분이었다. 고작 몇 발자국 움직였다고 온몸이 젖어 들고 비로 인해 앞의 시야가 전혀 보이지 않는, 거센 빗소리에 괜히 겁이 나는 상황. 그럴 때면 헛웃음이 나오곤 했다. 거대한 자연 앞에서 먼지만큼 작은 존재가 된 것만 같아서, 그런데도 비를 맞지 않아야겠다는 어리석은 생각을 한 내가 어이가 없어서. ‘그래, 이건 어쩔 수 없지.’ 상황을 인정해버리니 오히려 이 거센 비가 반가워졌다.

어리석게도 나는 상황의 심각성을 마주해야지만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일이라는 걸 받아들인다. 비가 조금 오나 세찬 비가 오나 내가 노력한다고 비를 그칠 수 없는 일인데도 비가 조금 오게 되면 작은 기대를 하게 되는 것이다. 우산을 쓰면 비를 맞지 않을 수 있지 않을까, 조금만 조심히 걸으면 발이 젖지 않을 수 있지 않을까. 결론은 지나가는 자동차가 내뱉는 물세례를 받던가, 고인 웅덩이가 생각보다 깊던가, 그게 아니더라도 건조했던 앞머리가 축 처져버려 다운된 기분으로 건물 안에 들어섰다. 언제나 결론은 똑같음에도 어리석게도 항상 바라게 되는 것이다. 이번에는 괜찮을 거야, 라고.

종교를 믿지 않지만 책을 읽다 유독 마음을 울리던 문장이 하나 있었다.

신이여, 바라옵건대 제가 바꾸지 못하는 일을 받아들이는 차분함과 바꿀 수 있는 일을 바꾸는 용기와 그 차이를 늘 구분하는 지혜를 주옵소서.
- 니버의 기도 -


이런 일이 생길 때마다 이 문장이 생각나곤 했다. 나는 왜 내가 관여할 수 없는 자연에 혼자 열을 내는 것인가. 비가 내려 몸이 젖는 것이 당연하다는 걸 인정해버리면 찝찝했던 비는 전과 다르게 색다른 풍경을 선사해주곤 했다. 더웠던 열기를 식혀주고 물에 한껏 젖은 풀 내음은 더 진해져 주변을 감싸며, 건물에 부딪히는 빗소리와 걸을 때마다 찰랑거리는 웅덩이 소리, 거리 곳곳에 보이는 색색의 우산들은 오감을 즐겁게 만들어준다. 그리고 이 풍경은 세찬 비가 주는 것이 아니라 ‘비’ 자체가 주는 풍경이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내리는 비를 받아들이고, 색다른 풍경을 볼 수 있는 시선을 바꾸는 것뿐이다.
이토록 간단한 걸 매번 실패하고는 하지만, 그래도 생각날 때마다 바라보려고 한다. 어느 날 길을 걷다 갑자기 내리는 소나기에 비를 맞지 않으려 건물 안으로 뛰어가는 사람보다는, 비가 선사하는 시원함을 온몸으로 느끼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오늘도 니버의 기도를 되새겨본다.


from.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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