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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느 저자 Oct 17. 2021

[여름호] 넷째주, 만춘 : 다시, 지현의 이야기

여름호 네번째 주제 : 어른

 그런 아침이 있다. 실컷 자려고 알람도 꺼놨건만 눈이 저절로 떠지는 이상한 아침이. 지현은 다시 잠들기 위해 애를 쓸수록 정신이 맑아졌다. 결국에는 체념한 듯 기지개를 쫙 펴고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딱히 해야 할 일은 없었다. 빨래도 이틀 전에 했고, 현수가 설거지를 미룰 리도 없었다. 배가 고파진 지현은 부엌으로 향했다. 냉장고 문을 여니 초코 우유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어제저녁 편의점에 들러 2+1으로 사서 현수와 하나씩 마시고 남은 녀석이었다. 지현은 식탁에 앉아 초코 우유를 마셨다.


 다 마신 우유팩을 깨끗이 씻어 식기 건조대에 널어두고 욕실로 갔다. 머리만 감을까 하다가 샤워를 해버렸다. 샤워를 마치고 거실 바닥에 앉아 드라이기로 머리를 말리다가 지현은 문득 밖으로 나가고 싶어졌다. 하루 종일 누워있기, 멍하니 앉아있기 대회가 있다면 절대 지지 않을 자신이 있던 지현이었지만 모처럼 샤워한 게 아까워서라도 나가고 싶어졌다.


 지현은 집 근처 정류장의 버스 시간을 확인했다. 이십 분 뒤에 2000번 버스가 도착할 예정이었다. 이사 온 지 벌써 3년이 다 되어 가지만 단 한 번도 종점인 꽃바위까지 가본 적이 없었다. 과연 꽃바위는 어떤 곳일까, 꽃처럼 생긴 바위라도 있는 걸까, 하며 궁금해하곤 했지만 굳이 가보고 싶은 정도는 아니었다. 그러나 오늘이야말로 그곳에 가보리라 다짐한 것이다.


 고양이가 그려진 에코백에 책 한 권과 물 한 병, 지갑과 핸드폰을 넣었다. 슬리퍼를 신으려다 샌들을 신었다. 현관 문을 열자마자 습함이 몰려왔다. 다시 들어갈까 했지만 오늘은 꼭 꽃바위에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딱 맞게 도착한 2000번 버스에 올라탄 지현은 맨 뒷자리에 앉아 멍하니 창밖을 바라봤다.


 꽃바위 까지는 정확히 한 시간하고도 십오분이 걸렸다. 종점 차고지답게 버스들이 잔뜩 줄을 서있기는 했지만 꽃바위는 보이지 않았다. 어쩌면 바닷가에 있는 바위가 아닐까 싶어 지현은 건물들 사이로 슬쩍 보이는 바다로 향했다.


 해가 정확히 지현의 정수리 위에 떠있었다. 이러다가 바다는커녕 바닥에 쓰러지겠다 싶었던 지현은 문을 활짝 열어둔 가게 그늘로 몸을 피했다. 커다란 창 너머로 바다가 보이는, 카페이기도, 펍이기도 한 가게였다.


 부드러운 웃음을 가지신 아주머니가 지현을 맞아주었다. 지현은 분명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시키려 했지만, 냉장고 안에서 열을 맞추어 서있는 맥주들 중에서 스텔라와 눈이 마주쳐버렸다.


 천장에 붙어있는 여러 나라의 국기들과 벽에 전시되어 있는 프리미어 리그 유니폼들. 가게 곳곳에는 여행의 흔적들이 묻어있었다. 지현은 멋들어진 청화백자 화분에 심어진 상추가 가장 마음에 들었다.


 "혼자 여행 왔나 봐요?" 스텔라 한 병과 땅콩을 건네며 아주머니가 말했다.

 "그런 셈이죠. 사장님은 해외에 많이 가보셨나요?"

 "저는 이 앞에 보이는 그리스에 제일 많이 가봤죠."


 아주머니는 가게 테라스 너머로 보이는 바다를 가리키며 말씀하셨다. 넘실거리는 파도에 비치는 햇살과 이따금씩 들려오는 갈매기 울음소리. 아쉽게도 지현은 그리스에 가본 적이 없어서 비교해 볼 수는 없었지만, 이보다 더 멋지기야 할까 생각하며 맥주를 들이켰다.


 테라스에 나가보니 옆으로 작은 간이 해변이 보였다. 비좁은 해변은 사람들로 가득 차있었다. 아이들을 데려온 가족들이 대부분이었다. 다들 행복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개중에는 이십 대 초반으로 보이는 무리도 보였다.


 스무 살 지현은 넷이서 함께 쓰는 기숙사에 살았었다. 한 방에 살며 친해진 친구들이 중간고사가 끝나면 제주도에 가자고 했다.


 '제주도는 자주 가봐서, 그리고 엄마가 집에 좀 내려오라 시네.'


 거짓말을 했다. 실은 돈이 모자랐다. 친구들이 고기 국수를 먹고 카멜리아 힐에서 예쁜 사진을 찍고 있는 동안, 지현은 방에 혼자 남아 덩그러니 누워있었다. 익숙하지 않은 외로움이었다.


 기숙사 밖으로 나간 지현은 무작정 걷기 시작했다. 아무 가게에나 들어가려 했지만 용기가 나질 않았다. 결국 제일 만만한 편의점에 들어가 술이 진열되어 있는 냉장고 앞에 섰다.


 스무 살 지현은 술에 대해 아는 바가 없었다. 수많은 맥주들 중에서 무얼 골라야 할지 고민하다가 새하얀 배경에 새빨간 로고가 그려진 맥주를 집었다.


 방으로 돌아온 지현은 책상에 앉아 맥주를 땄다. 처음으로 혼자 술을 마신, 고독과 마주한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안주도 없이 두 캔을 비운 지현은 헛헛한 마음으로 침대에 누웠다. 술기운 덕에 외로움이 두려움이 되기 전에 잠들 수 있었다.


 "참 여유롭죠?" 아주머니가 말했다.

 "그러네요. 맥주도 맛있었고요."


 지현은 계산을 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를 타러 갔다. 이번에도 맨 뒷자리에 앉았다. 돌아가는 길은 더 짧게 느껴졌다. 집에 들어가기 전에 편의점에 들러 아이스크림을 샀다.


 "어디 갔다 왔어?" 거실에서 TV를 보고 있던 현수가 말했다.

 "꽃바위. 근데 꽃바위는 못 봤어."

 "혼자서도 잘 노네."

 "응, 나 이제 다 컸어. 아이스크림 먹을래?"

 "좋지."



from.만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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