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어느 날에 쓴, 이야기의 일부가 될 글을 퇴고하며
탄핵 후 첫 주말.
비가 내린 뒤여서 하늘이 맑았다. 신랑과 아침을 챙겨 먹고, 집 근처 영화관으로 향했다. 이번에 볼 영화는 ‘승부‘였다. 바둑을 소재로 했으며, 배우 이병헌과 유아인이 주연으로 출연했다. 지난번에 <고독한 미식가 더 무비>를 볼 때도 그랬듯이, 뭣도 모른 채 좌석에 앉았다. 잠자리 안경을 쓰고 말없이 마주 앉은 아저씨들, 한쪽에서 집을 만들면 상대가 이를 견제하길 반복하며 대국이 진행된다는 것, <응답하라 1988>에서 택이가 프로 바둑 기사였다는 것. 이것이 내가 아는 바둑의 전부였다. 그래서 이 영화도 처음에는 거의 아무 생각 없이 보기 시작했다.
그런데 웬걸. 영화는 정적이면서 동적이었다. 머리가 좀 큰 뒤에 봐서 그런 것인지는 몰라도 어렸을 때 보던 것과 달랐다. 바둑판을 사이에 두고, 서로가 상대의 수를 간파해 내는 과정은 생각보다 긴장감 있었다. 무엇보다 이병헌과 유아인이 각각 연기한 조훈현과 이창호에도 점점 몰입이 됐다. 바둑이 보면 볼수록 검도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에는 기본을 배우는 것에서 시작해, 시간이 지날수록 자신만의 바둑 스타일을 찾아가는 것이 그랬다. 검도로 치면 기본기와 이를 바탕으로 자신만의 검풍을 만들어 가는 과정인 ‘수파리’이다. 이창호가 조훈현 수하에서 바둑을 배우면서 그의 바둑 스타일에 의문을 제기하고, 느려도 자신만의 바둑 두는 방법을 만들어가는 과정이 인상적이었다. 조훈현이 제자 이창호에게 대국에서 패한 뒤 정신적으로 방황하다가 밑바닥에서부터 재기하는 과정도 그랬다. 자신의 대국들을 하나, 하나 복기하고, 때로는 제자의 바둑 스타일도 모방하면서 다시 정상으로 올라오는 것을 보며 짜릿하기도 했다.
각자의 상황과 위치는 달랐지만, 이들에게 공통점이 있다면 자신의 바둑을 찾기 위해 처음부터 다시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창호는 어렸을 때부터 동네에서 바둑 신동이란 소리를 들으며 자만했지만, 상경해서 조훈현에게 얄팍하게 계산하며 바둑을 두지 말라고 매섭게 혼난 뒤, 모든 것을 처음부터 다시 다져 나갔다. 체력과 바둑을 대하는 태도부터 시작해 하나, 둘씩 자신을 가다듬고 그러는 동안 자신감을 잃어버리고 숨기도 했다. 조훈현도 바둑 황제의 자리에 있다가 제자에게 지고, 자신이 밑바닥에서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단 것을 받아들이지 못해 분노와 좌절로 몸부림치던 시절이 있었다. 그런 둘의 모습을 보며, 처음 검도를 배우기 시작했을 때가 떠올랐다. 남들보다 느려서 같은 동작도 몇 번씩 더 연습해야 했고, 남들이 잘한다고 칭찬을 받을 때 제대로 치라고 혼만 나고, 나는 아닌가 보다- 속상해서 울고 운동도 포기하고 싶었던 때.
그러다 목에서 뭔가 걸리는 것이 느껴졌다. 조훈현이 이창호를 떠나보낼 때, 그동안 칭찬 한 번 제대로 한 적 없다며
“너는 나의 자부심이었어. “
라고 말할 때였다. 이창호가 과거의 나였다. 이창호가 과거의 나여서 놀랐다. 3번째 시합을 앞두고 연습하면서 매일 혼날 때, 실력은 늘지도 않는 것 같고 혼나기만 하니까 의욕도 떨어졌을 때, 검도를 대충 배우면 안 된다고, 칭찬만 들으면 실력이 늘지 않는다고 관장님께서 말씀하셨던 것이 생각났다. 그리고 몇 달 뒤, 결혼식을 앞두고 그동안 고비들을 잘 넘겼다고 하신 것도. 처음에는 살고 싶어서 죽도를 잡았지만, 그 뒤에도 모든 것이 처음이었다. 남들보다 몸이 느리고, 급에서 단으로 올라갈수록 벽이 느껴져서 때로는 놓고도 싶었다. 그때마다 내가 왜 처음으로 죽도를 잡았는지 떠올리면서 버텼다. 시험도 포기했는데, 이것마저 내려놓으면 아무것도 아닌 게 된다고 죽도를 잡고 몇 번이나 생각했는지 모른다. 조훈현의 한 마디가 그렇게 이창호를 움직이고, 과거의 나를 불렀다.
그렇게 영화 한 편을 보며, ‘처음’을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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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 제목-중단세 (프로크리에이트, 과슈 브러시로 채색)
* 그림 속 영화 ‘승부’ 포스터 출처 : Google 이미지 검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