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밀양>은 '밀양'이라는 소도시에서 벌어진 유괴 사건을 다룬다. 끔직한 사건과 이를 대하는 피해자의 고통이라는 표면적인 이야기의 심층에는 인간의 주체성과 부조리한 삶에 대한 인간과 신의 존재에 대한 고찰이 존재한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세상으로 떨어져 나와'삶'이라는 것을 겪게 된다. 인간의 삶에는 필연적으로 고통이 존재하며 이러한 고통은 보통 세상에 뚝 떨어져버린 인간에게는 그 당위성을 이해하기 힘든 불가해한 괴로움이다. 이러한 고통은 인간에게 이유도 영문도 모르게 부과되고, 그 무의미성은 의문으로 이어진다. 인간의 삶과 삶을 넘어 인간 실존의 문제로 확장된다.
인류는 대를 이어 인간 고통에 대해 고민해왔으며 그에 대한 답으로 '신'의 존재를 구성해냈다. 무신론적 사고방식에는 이견이 있을 수 있으나 종교나 신앙이 기본적으로 인간의 마음의 위안과 의존을 위해 구성된 산물임은 분명하다. 종교마다 차이가 있을 수 있으나 기본적으로 종교는 신이라는 절대자를 앞세워 인간 의지와 무관하게 주어지는 고통에 당위성과 이유를 부과한다. 그편이 이해할 수 없는 인간의 삶을 부조리가 아닌 신의 섭리로서 받아들이기 쉽기 때문이다. 작품에서 주요 소재로 등장하는 기독교는 이러한 특성을 아주 잘 반영하는 종교이다. 기독교적 가치관 속에서는 신은 세상의 만물을 관장하고 모든 것의 원인이 되는 절대자이다. 그러나 이러한 기독교적 교리는 자가 모순이라는 당착에 이르게 된다.
영화 <밀양>과 원작 소설인 <벌레 이야기>는 작품 속 실질적 주인공인 유괴당한 아이의 엄마의 말과 행동을 통해 주제 의식을 표현하고자 한다. 아이의 엄마(<밀양>에서 정해진 '신애'라는 이름으로 이하 통칭) 신애는 아이의 죽음을 계기로 비종교인에서 기독교인이 된다. 소설에서는 아이의 명복을 위해 기독교인이 된 것으로 나오지만, 본질적인 이유는 직면할 수 없는 압도적인 고통에서 벗어나 마음의 위안을 얻기 위함이다. 상술했듯이 종교는 고통 그 자체 이상으로 그 고통의 불가해성에서 나오는 또 다른 고통을 해소해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국 신애는 종교를 통한 구원을 포기한다. 그 이유는 언급한 종교의 자가당착성에 있다. 절대자는 고통으로부터 인간을 구원해주는 동시에 그 고통을 부과한 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종교를 믿는 이들은 그러한 모순을 역시나 한낱 인간은 이해할 수 없는 신의 뜻으로 합리화한다. 밀양 속 김집사의 '세상 모든 일에는 주님의 뜻이 있다'라는 대사처럼 말이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용서를 요구한다. 종교가 인간의 마음의 평안을 위해 고안되었다는 논리에 입각하면 용서는 미워하는 마음에서 유발되는 상처를 해소하기 위한 시도라고 생각할 수 있다. 유괴범을 두고 저주와 살해의 말을 퍼붓는 신애의 말을 생각해보면 신애 역시 미워하는 마음에서 비롯한 괴로움을 해소하고자 종교적 가치관에서 비롯한 용서를 시도한다.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은 유괴범을 용서하려고 다가간 신애에게 유괴범은 이미 하나님으로 부터 용서를 받았다고 말한다. 피해 당사자인 신애의 용서가 아닌 신의 용서를 통해 구원을 받았다고 이야기한다.
종교적 용서는 인간의 용서와는 다르다. 종교적 용서는 인간이 하는 것이 아니라 신에 의한 것이다. 신애의 용서는 외부적으로는 신이 계기가 되었지만 본질적으로는 인간의 용서였다. 진정한 신앙심에서 비롯한 것이 아니라 종교가 제공하는 이익을 취하기 위한 행위였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신애는 유괴범을 용서할 수 없었다. 그 점에서 인간으로서의 신애와 종교인으로서의 신애의 부조화가 드러나게 되며 신애는 선택의 기로에 선다. 고통을 직면하는 인간이 될 것인지 신에 의탁하는 종교인이 될 것인지. 그러나 신애는 애초에 신을 믿은 적이 없었다.
영화에서의 신애는 종교를 버린 이후 적극적으로 신에 적대한다. 그녀는 교회에서 사람들의 기도를 방해하거나 목사에게 저항하고 종교 행위를 직접적으로 방해하기도 한다. 교인들을 향한 행위 이상으로 신에 대해 직접적으로 저항하고자 한다. 김집사의 남편과의 외도를 통해 기독교 교리를 전면적으로 어기고 죄악으로 정해진 행위를 수행하는 동시에 이는 신을 행한 의도적 행위임을 대사를 통해 명시하기까지 한다.
종교를 맛본 신애는 알고 있었을 것이다. 종교는 인간에게 안락한 구원의 손길을 내밀며 더 이상 부조리를 직면할 필요가 없게끔 보호해준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럼에도 신애는 이해할 수 없는 세상과 그 속에서 고통으로 가득 찬 인간의 삶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로 결심한다. 동네 주민들 앞에서 신의 사랑에 대해 논하며 신에 대한 믿음을 통한 행복에 대해 증언한 신애는 신에 대한 믿음을 거두고 다시 고통과 괴로움의 터전으로 '스스로' 걸어 들어간다. 주체성의 결여를 통한 비존재자로서의 행복보다 주체적으로 실존하는 인간으로서 겪는 괴로움을 선택했다는 것은 어리석어 보이기도 한다.
결말부에서 정신병원에서 퇴원한 신애는 머리를 자르러 간다. '머리를 자른다'라는 행위는 보통 새로운 출발이나 이전 교착 상태에서의 해방과 같은 의미를 내포한다. 새로운 삶의 여정을 시작하게 되었음을 암시하는 장면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공교롭게도 방문한 미용실의 직원은 유괴범의 딸이다. 신애는 미용실을 박차고 나와 누군가의 손길에 의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머리를 자른다. 떨어진 머리카락 위에는 햇살이 비친다. 신애의 선택으로 말미암아 신애는 자신의 고통을 자가적으로 직면하게 되었지만 이는 괴로움만으로 걸어 들어간 것이 아니라 주체성과 실존의 회복을 통한 새로운 희망의 탐색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여지를 제공한다. 이 때 햇살은 더 이상 신의 빛이 아닌 인간 신애의 내면의 결심을 보여주는 '밀양', 은밀한 빛의 단서가 된다.
주체성의 회복과 자력으로 구원하는 인간의 삶을 얘기하면서도 영화는 동시에 신애, 인간의 실존이 혼자만의 것은 아니라고 이야기한다. 각자 세상에 떨어진 존재인 인간들은 외부의 존재자로서 타인을 구원해줄 수는 없지만 서로 돕고 각각의 실존을 함께 직면할 수는 있다. 신을 믿기 전 동사무소에서 직원의 도움을 격렬하게 거부하던 신애는 머리를 자르는 자신을 돕는 종찬을 받아들인다. 기독교에서는 이웃과 관계맺음을 그리고 서로 사랑하고 도움을 나눔을 강조한다. 종교의 설계 이유를 생각해보면 종교의 교리들은 인간에게 필요한 가치들에 신의 당위성을 부과해 이유를 설명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교리 자체는 신앙 그 자체로 전복되기 이전 인간 스스로가 서로에게 필요한 것들을 정해놓은 것이다. 그리고 신애는 종교적 이유 때문이 아닌 본질적으로 인간 그 차제의 의지로서 동료 인간의 도움을 받아들인다.
종교가 '불'필요하게 된 인간의 모습을 보여준다,
소설 속 결말은 조금 다르다. 신애는 종교에서 벗어난 이후 자살을 선택한다. 기독교 교리에서 자살은 죄악이다. 자살이 죄악이 되는 이유는 종파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신이 준 인간의 인생을 거둘 권한은 역시 신에게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런 인간의 목숨을 스스로 거둠으로써 신에게 저항한다. 신이 부과한 자기보존의 의무를 져버리고 신 앞에서 무력한 '벌레'로서의 삶이 아닌 '인간'으로서의 삶을 지향한 선택이다. 영화와 동일하게 신앙을 벗어나 주체성을 추구했다는 주제의식은 공유하나 방식의 차이가 존재한다.
영화와 소설을 비교하며 흥미로운 지점은 이뿐만이 아니다. 소설은 관찰자 시점에서 전개되기 때문에 신애라는 인물의 심리나 내면 묘사가 직접적으로 드러나는 대신 관찰자인 남편에 의한 대사와 행동만이 독자에게 주어진다. 그리하여 그녀의 선택에 대한 인물 스스로의 직접적 행위 원인을 알 수는 없지만 작품 내적으로 지속적으로 내포해온 주제의식을 바탕으로 인물 행위의 의도를 일정 수준에서 일관적이게 추측할 수 있다. 영화는 내부 관찰자가 아닌 전형적 영화의 형식인 외부 관찰자 관점을 취한다. 영화 매체의 특성 상 특이점은 아니다. 영화와 비교했을 때 소설 서술 방식의 특이점이 드러난다. 비교적 인물의 심리나 내면 사고 방식을 묘사하기 쉽다는 점에서 문학의 매체적 장점이 드러나는데, 그 점을 활용하기 쉬운 1인칭 시점을 사용하지 않았다는 점, 그 이상으로 관찰자를 작품 내에 배치했다는 점이 인상적인 부분이다. 전지적 시점을 이용하지 않았다는 것에서 인간이 이야기하는 인간의 이야기가 되고 결국에는 관찰자 역을 맡은 남편의 사견에서 끝날 수 있는 이야기를 인간 실존에 대한 주제의식으로 확장시킨다는 부분에서 주제의식과 결합된 작가의 의도가 드러나는 대목이다. 영화에서는 남편이라는 인물이 과감하게 삭제되며 다른 효과가 발생한다. 관찰자의 부재로 주인공 신애의 이야기에만 집중하게 된다는 점에서 한 인간의 주체성 상실과 회복이라는 과정을 고스란히 독존하는 자를 중심으로 조명하게 된다. 원작에 없던 인물인 ‘종찬’이 추가된 것도 이러한 효과를 추구하는 동시에 원작에서 보여준 동료 인간의 관점을 포함하고자 한 시도로 해석해볼 수도 있다.
시점의 특이성 외에도 소설과 영화를 비교했을 때 재밌는 점이 많다. 먼저 각색의 과정에서 부가된 '밀양'이라는 공간성이다. 작중 사별한 남편의 고향인 밀양은 주인공 가족의 이주를 정당화하고 영화의 중심 사건이 발생하게 되는 계기가 되는 등 서사 전개의 필수 구성요소이다. 영화에서 밀양은 서사의 개연성을 추가해주고 구체성을 부여하는 장치이자 스토리가 전개되는 핵심적 배경이 된다. 소설에서 공간과 장소에 대한 묘사가 전개 상 필수적인 경우를 제외하고 거의 존재하지 않았음을 생각해본다면 인상적인 부분이 아닐 수 없다. 이 밀양이라는 장소는 단지 물리적 배경으로만 기능하지 않고 작품의 내적 주제 의식과도 맞닿는다. 불행의 시발점이 된 장소로서의 밀양은 주인공의 새로운 삶과 희망을 암시하는 햇살이 되어 그 서사적 기능과 은유적 기능을 동시에 수행한다.
원작과 주제의식을 공유하면서도 새로운 해석을 가미하고 이야기의 외연을 확장했으며, 문학적 요소로 여겨질 수 있는 다수의 장치들을 영화적으로 해석했다는 점에서 각 매체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한 훌륭한 활용이 눈에 띈다.
이창동 감독의 밀양과 벌레 이야기는 인간의 실존에 대한 이야기를 신앙이라는 테마와 엮어내 인간의 삶과 부조리에 대한 고찰 기회를 제시한다. 작품의 내면적 주제인 유괴 사건과 그 부모의 이야기라는 스토리 라인 역시 주제의식을 부각하며 각각 문학, 영화 작품으로써 독자에게 즐거움과 예술에 대한 향유 경험을 제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