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댁에 갔다가 사촌 누나와 놀고 온 다음 날, 갑자기 아이가 이런 말을 꺼냈다.
"엄마, 누나가 그러는데 지금까지 누나한테 크리스마스 선물을 준 사람이 산타할아버지가 아니고 고모였데. 고모가 산타인 척 몰래 선물을 줬던 거래. 사실 산타는 없데. 지금까지 산타할아버지가 준 선물 엄마, 아빠가 준거야?"
너무나 자연스럽고 태연하게 그 얘길 하길래 별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건가 싶었고, 이 상황이 언젠가는 올 거라 생각했던 나는 오래전부터 준비했었던 말을 해줄 때가 온 건가 싶었다. 클 만큼 큰 조카가 왜 동생의 순수한 동심을 갑자기 망가뜨렸을까 하는 약간의 원망스러움과 당황스러움을 숨기고 나를 바라보고 있는 아들에게 말했다.
"사실 세상에는 비밀이 한 가지 있는데, 세상의 모든 엄마, 아빠는 산타야."
아이가 놀라며 다시 물었다.
"그럼 지금까지 선물들 다 엄마, 아빠가 준거야?"
아... 현실적으로 그 모든 것들의 진실을 밝혀야 하는가 하는 사실에 잠시 망설였다. 그리고 지금껏 받은 선물들을 하나하나 언급하면서 그게 다 엄마, 아빠가 준거냐고 묻는 아들의 말에 차분히 사실대로 얘길 했다.
"사실 엄마, 아빠는 ○○이의 산타야. 지금껏 그걸 숨기고 선물을 준비했었어. 산타할아버지한테 갖고 싶다고 빌었던 선물들, 엄마가 ○○이의 산타니까 바로 듣고 그걸 준비할 수 있었지..."
아들이 갑자기 나를 안았다.
"고마워 엄마."
나를 안고 고맙다고 얘길 하는 아들에게 고마웠고, 나는 꽤 괜찮게 이 사건이 넘어가나 싶었다.
그렇지만 아직 풀리지 않은 것들이 많았는지 아들은 그 후 계속 나에게 질문했다. 평소에는 거의 내가 아들의 궁금한 학교 생활을 묻는 편이지 아들은 그다지 나에게 질문을 잘 안 하는데, 오늘 그동안 미뤄뒀던 질문들을 한꺼번에 쏟아내듯 계속 물었다. 그것도 안 물었음 싶은 질문들만...
"그럼 지금껏 산타할아버지 옷 입고 왔던 사람이 아빠였어?."
"그런데 내가 말 안 한 선물을 받은 적도 있어. 작년에 잠옷. 그것도 엄마가 준거야?"
"그럼, 유치원 때 산타할아버지가 베란다로 들어와서 베란다로 나갔다고 했잖아. 루돌프가 우리 집 베란다에 있다고. 그건 뭐야? 진짜 아니었어?."
.
.
.
사실을 깨닫고서 아이는 갑자기 처음과 달리 실의에 빠졌다.
책상에 앉아서 엎드리고 있었다. 당황스러웠다. 이렇게까지 힘들어할 줄 몰랐다.
사실 나는 부모님이 크리스마스 때 나의 산타가 되어 준 적도, 몰래 선물을 준비해 주신 적도 없었다. 초등학교 1학년 때쯤이었나 산타가 우리 집에 오면 요강에 발을 빠지게 해서 잡아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요강을 방문 앞에 놔뒀던 기억이 산타에 대한 마지막 기억이고, 누가 얘길 해준 적도 딱히 없어서 산타가 없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게 됐는지도 모르겠지만 그 사실이 그다지 충격은 아니었다. 어차피 난 첨부터 선물 주는 산타가 없어서 그랬나 보다.
그런데 아들은 달랐다. 아기 때부터 어두운 방에서 어렴풋이 산타를 봐왔고, 나와 함께 놀라며 선물을 받았다. 7살부터는 들킬게 분명해서 산타 분장은 하지 않고 문 앞에 걸어둔 커다란 산타 양말 안에 선물을 넣어두었다. 어릴 때 우연히 아이가 내가 찍어둔 아들과 산타(남편) 사진을 보고, 산타가 아빠를 닮았다고 말했을 때도, 잘 둘러대며 넘겼었다. 그리고 아들은 9살이지만 아직도 철썩 같이 산타를 믿고 있었다. 올해 산타할아버지한테 어떤 선물을 받고 싶은지도 종이에 스스로 적어두었었다. 그래서 이 상황이 점점 충격으로 다가왔나 보다.
"난 누나가 그냥 장난치나 보다 생각했어. 어제로 돌아가고 싶어. 이 사실을 몰랐을 때로 돌아가고 싶어."
책상에 엎드린 채 망연자실한 목소리로 아들이 얘길 했다.
"미안해. 지금까지 선물을 두 번이나 준거잖아. 유치원에서 산타할아버지가 준 선물이랑 크리스마스날 받은 선물."
나는 미안하다는 말까지 들으니 마음이 안 좋았다. 이렇게까지 힘들어할 줄은 몰랐다. 나는 겪어본 적이 없는 상황이라 더 그랬다. 그리고 이 상황을 긍정적으로 바꾸고 싶었다.
"○○아, 엄마, 아빠는 지금껏 ○○이의 산타가 돼줄 수 있어서 진심으로 즐거웠고 행복했어. 그건 엄마, 아빠가 너무나 하고 싶어서 한 일이야. 네가 미안해한다면 엄마는 마음이 아파. 네가 잘못 알고 있는 게 있는데 세상에 산타가 없는 게 아니야. 최초의 산타할아버지는 성 니콜라스라는 사람이었어. 실제로 존재했어. 그 사람이 죽고 그 후에는 많은 다른 사람들이 산타가 됐고, 세상에 모든 엄마, 아빠가 산타가 된 거야. 꼭 엄마, 아빠가 아니라도 산타가 되고 싶은 사람은 산타가 될 수 있어.
그리고 엄마, 아빠는 이렇게 들켜버렸지만 언제까지나 너의 산타일 거야. 평생.
○○이 처럼 귀여운 아이의 산타가 될 수 있어서 엄마, 아빠는 정말 감사하고 행복해. 고마워."
"고마워, 엄마."
"나, 진정 좀 하고 밥 먹으러 나갈게."
조금 진정이 되고 저녁을 먹었다. 아이는 실의에 빠지기 전에 올해 크리스마스 선물은 안 받을 거라고 절대 산타 양말에 선물 넣지 마라고, 엄마, 아빠가 선물을 안 주면 진짜 선물이 안 들어있는지, 진짜 산타가 없는 건지 확인해야겠다고 화를 냈었다. 저녁을 먹으면서 화난 마음이 조금 진정이 된 듯 보였다. 그리고 자기 전에 아들이 침대에 누우며 말했다.
"엄마, 선물 줘도 돼. 안 받으면 서운할 것 같아."
웃음이 나왔다.
"알았어. 그런데 받고 싶다고 얘기한 그 선물만 넣어둘게. 절대 다른 건 안 넣어둘 거야. 맹세해! 그랬는데 혹시 다른 선물이 들어 있다면 진짜 다른 산타가 있다는 거니까 한 번 잘 살펴보자!!"
그냥 끝까지 모르는 척할 걸 그랬나?
다른 걸 몰래 넣어둬야 하나...
두 번 속이는 건 좀 그런가?
끝나버린 것 같은 비밀 산타 놀이에 시원섭섭하다.
이번에는 어떤 크리스마스가 될지 모르겠다.
그리고 나도 어릴 때로 돌아가서 부모님이란 걸 알아도 좋으니까 산타할아버지한테 선물 한번 받아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