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나면 성지순례를 다닌다. 다른 나라와 달리 우리나라는 순교자들의 힘으로 천주교가 발전해 왔기 때문에 특히 성지가 많이 있어 주변 여행 겸 순례하기가 좋다. 그냥 기록을 안 남기고 다녔더니 시간이 지나자 기억이 희미해져 간다. 그래서 올해부터는 다시 순례를 시작하고 있다. 회화나무 꽃이 피는 7월 말일, 해미읍성에 있는 회화나무를 보러 갔다. 지금도 순교자들의 머리를 매달았던 가지는 철사줄의 흔적을 남긴 채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어가는 중이었다. 탱자 가시에 위리안치되어 있는 감옥도 살피고 해미성지로 갔다. 이곳 출신 작가가 해미성지에 대한 당시 순교자들의 삶을 살펴볼 수 있는 해미라는 소설이 있음을 알았다. 관심이 많아 사서 읽게 됐다.
『해미』는 흐름출판사에서 발행된 류은정 작가의 장편소설이다. 읽기 쉽고 내용이 그리 어렵지 않아 누구나 책을 손에 들면 마지막까지 단숨에 읽을 수 있는 흡입력이 있다. 류은정 작가는 200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소설 『가위』가 당선되어 등단하게 된다. 주요 작품으로는 『이산 정조대왕』, 『선덕여왕』등 역사적인 인물들을 그린 작품이 많다.
『해미』 작품으로는 사실에 기반을 두고 가공인물인 필성을 내세워 병인박해 당시의 내포지역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그들의 생활과 당시 시대적인 배경을 알 수 있다. 충청도의 토박이 사투리가 등장인물들의 대화에서 그대로 나온다. 사투리가 읽기에 거슬리고 힘들지만 그 당시 그들의 사회상을 이해하는 데에는 도움이 되기도 한다. 작가가 그쪽 지역 출신이 아니면 구사하기 어려울 것이다. 순교자들이 어떻게 배교의 유혹에 빠지지 않고 끝까지 순교할 수 있었는지를 설명한다. 잔인하게 고문을 당해 줄에 묶여 끌려가면서도 어떻게 예수 마리아를 부를 수 있었을까. 구덩이에 파묻혀지지만 순교자들은 스스로의 삶을 순교로 선택한다.
순교자들의 치아와 뼛조각과 머리카락에서 흰빛이 반짝거리는 것으로부터 소설은 출발한다.
병인박해 때 여숫골 숲정이로 끌려온 후 구덩이 몸을 던진 그들의 몸에서 나는 빛이었다. 천주교 신자는 흉악할 줄 알았는데 끝집 부부를 보면 그렇지도 않다는 얘기들이 오간다. 천주교신자인 끝집 부부처럼 매사에 감사해하며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감이 그들을 천주교 입교로 이끈다.
내포 지역은 이존창이 처음 천주교를 전파한 뒤로 많은 교인들이 나왔다. 양인과 천민에게 까지 전해졌고 삶 속에서 믿음을 지켜왔던 하층민 교인들은 박해의 칼날을 피하지 못하고 옥방이 가득 찼다. 김진식 베드로는 김대건 신부의 사촌으로 김재철의 아들이다. 양반의 신분으로 신분이 낮은 사람들을 양반 상놈 구별 없이 평등하게 대우하는 것이 천주교의 사랑이라고 가르친다. 그리고 계명대로 살면 천국에 갈 수 있다는 교리를 설명하며 사랑으로 베풀자 서서히 신자들의 신심은 더 깊어간다.
내포마을에 오신 주교님을 위해 김진식은 이야기 주인공인 필성에게 무예를 익히게 하여 주교님을 공격과 위험으로부터 지키도록 한다. 그중 가장 큰 마을인 신리는 가장 큰 교우촌이 형성됐다. 해미로 끌려가서 옥사하고 봉분 없는 이름 없는 무덤들이 늘어만 간다. 107페이지를 읽으며 지금도 내가 자주 뱉던 원망 섞인 기도문을 발견하고 반성한다.
사람의 마음이 참으로 간사해서 자책하며 걷다 보면 슬그머니 원망이 고개를 든다.’지가 뭘 그렇게 잘뭇혔남유? 당신을 믿고 따른 것 베끼 읎어유. 근디 왜 이런 일을 겪게 허신대유?‘란 대목이 나온다. 억울하다고 생각하면서도 결국 십자가 앞으로 더 다가온다. 십자가 앞에 무릎 꿇고서 실컷 울고 나면 가슴에 들어찬 답답함과 괴로움이 눈 녹듯 사라지고 없어진다. 길에서 잠을 자고 죽은 것과 같은 시간들을 힘겹게 견디며 지낸다. ‘나는 너희를 용서하지 않은 적이 없느니라’ 라는 음성을 듣게 된다. “예수님의 보혈루다가 여러분은 구원을 받았어유!”하며 외치고 태연하게 끌려가는 그들을 보며 구경꾼들은 “참 독허다, 독혀”라고 말한다.
가야산 골짜기에 흘러내린 물이 해미천의 넓고 깊은 곳으로 이어졌다. 10여 명이 오랏줄에 묶인 채 서서히 물속에 빠지자 물보라가 사라진 수면에 십자가 모양의 흰 광채가 어려 있었다. 숲정이는 원래 죄인들의 처형장으로 이용되고 있었다. 형장으로 끌려가던 천주쟁이들이 너나없이 ’ 예수 마리아를 불러 이 소리를 ‘여수 머리’로 알아들으면서부터 여숫골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1868년 병인년 조선 조정에 통상을 요구하던 독일 상인 오페르트가 대원군의 부친인 남연군의 묘를 파헤치는 사건이 발생하게 된다. 무덤 속의 부장품을 도굴하여 통상조약과 신앙의 자유를 대원군에게 요구할 계획이었지만 이건 오히려 천주교를 박해하는 사건이 된다. 오페르트의 도굴 사건이 벌어진 뒤에 깊숙이 숨어있던 신자들까지 잡혀 와 해미읍성으로 끌려오게 된다. 포박당한 신자들을 계속 끌고 와 구덩이 속으로 밀어 넣어 생매장시켰지만 그들은 배교하는 대신 구덩이 속으로 몸을 던져 순교의 길을 택하게 된다.
한티고개에서 망을 보다가 해미읍성의 포졸들이 출동하면 피신시키며 어떻게 해서라도 조선 천주교의 맥을 이어가게 하던 김진식과 필성도 마지막 순교를 하게 된다. 김진식은 성모경으로 마침 기도를 바치며 ‘나 먼저 가 있겠네. 다덜 조만간 보세.”라고 말하며 작별 인사를 건넨다.
선구자적인 역할을 했던 양반들이 천민과 양민들을 구별 없이 대하며 천주교의 사랑을 전하기는 그 당시에는 정말 어려운 결정이었을 거다. 자신들의 모든 것을 다 내놓고 순교하며 사랑을 전파하셨던 그분들의 헌신이 있었기에 한국 천주교회는 발전됐을 거다. 지금 우리의 신앙은 그분들이 노력이 헛되지 않도록 성지에 대한 관심을 더욱 가져야 하지 않을까. 지속적인 전파를 위한 재교육이 절실하다.
‘해미’라는 소설책은 해미를 중심으로 일어났던 순교자들을 알려주고 있지만 다른 성지의 순교자들도 더 많은 이들이 빨리 이해하고 잊지 않도록 많은 소설 형식의 책이 나오면 좋겠다. 내가 가장 관심을 가졌던 ‘해미 회화나무’는 한 구절만 나와서 조금 아쉬운 부분은 있었지만 나포지역을 중심으로 순교하신 분들의 삶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됐다. 많은 신자들이 이 소설을 읽고 선조들의 희생이 헛되지 않도록 가슴에 새기는 개기가 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