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바람

이 생을 빚지고

by 빨강



꽃샘추위가 예보된 날이었다. 그날따라 찬바람이 세차게 불었다. 등기를 보내기 위해 찾은 우체국 뒷마당에는 벚꽃이 여러 그루 활짝 피어 있었다. 어디서부터 시작됐는지 알 수 없는 바람에 벚꽃이 오소소 일어났다. 나비 날갯짓 같은 꽃바람이 불었다. 연분홍 꽃잎이 공중을 한들한들 날았다. 신부 어머니의 연분홍 색 치맛자락이 펄럭이는 것 같았다. 어지럽게 날아다니다, 언제나 떨어질 준비가 된 수 만개의 꽃잎이 서로 부딪히다 멀어지며 낮은 곳으로 내려앉았다. 갑자기 찾아온 찬바람에 한기가 들었다.



내일이면 물러갈 추위에 패딩을 꺼내 입은 현명한 사람들이 우체국에서 볼일을 보고 있었다. 누구는 흰 스티로폼 박스 가득 사과를 보내고, 급한 등기를 여러 개 보내고, 그날 번 돈을 천 원짜리 까지 빳빳하게 펴서 입금했다. 전에 살던 동네라면, 번호표를 뽑고 한참을 기다려야 했을 시간에 우체국은 크고, 사람들은 적었다. 한산함이 당연한 분위기였다.

이 동네는 어딜 가도 기다리는 법이 없었다. 모든 일은 느긋하고 천천히 이루어졌다. 한밤에 악다구니가 없었고, 층간 소음도 어느 정도는 그러려니 했다. 모든 게 조용히 일어났다. 너무 조용해서 바람이 불면 환풍기 팬이 돌아가는 소리가 더 크게 들렸다.


자기 전에는 괜찮았는데 자는 동안 몸살이 나서 앓았다, 관절에 열감이 났다. 그래도 일어나 보려고 애를 썼는데, 깨고 나면 꿈속 깨고 나면 꿈속이었다. 포근한 이불만이 현실 같아서 이불을 꼭 쥐었다. 전화 진동 소리에 간신히 깨고 보니 오후였다. 뭐라도 먹어야지 하며, 딸기를 씻었다. 먹다 보니 너무 많아 반은 먹고 반은 덮어 놓았다.



엄마와 아빠가 연애를 할 때, 아빠는 엄마를 데리고 안양의 딸기밭을 갔는데, 엄마는 그 자리에서 딸기 세 근을 먹었다고 했다. 아빠는 그런 여자는 처음 봤다고 했다. 갑자기 그 이야기가 생각나서 조금 웃었다. 혼자라도 웃고 나니, 살 것 같았다. 내 다리 사이에서 자던 두 번째 고양이가 이불 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나에게 뛰어 왔다. 내 무릎 위에서 눈을 다시 감는다. 나는 많은 무엇에게 생을 빚지고 있다. 언제다 갚을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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