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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빨강 Oct 24. 2024

왕할머니의 이사

벽을 넘어 도망가던 왕할머니

왕할머니는 발가벗고 김장 때나 쓰는 빨간 고무대야 안에 앉아 있었다. 엄마는 바가지로 증조할머니의 몸에 따뜻한 물을 끼얹었다. 화장실에서 수증기가 피어올라다가 화장실 문틀을 넘지 못하고 사그라들었다. 거품이 증조할머니의 젖가슴에 몽글몽글 피어 있었다. 바가지가 물을 뱉어낼 때마다 빨간 고무대야에서는 물이 넘실넘실 넘쳐흘렀다.


그게 3일 전이었다. 이모와 통화를 하던 엄마는 혀를 차며 말했다.


노인네가 백 살이 넘더니 검은 머리가 나더라고.


호상이었다. 벽에 똥칠을 하고 담을 넘어 도망가던 왕할머니가 돌아가셨다. 아빠가 한낮에 집에 있었다. 사람들의 발길로 집 앞 골목이 주차장이 됐다. 한자가 쓰인 등이 대문 앞에 달렸다. 동생과 나는 대문을 오가는 사람들을 보며 시멘트 댓돌에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왕할머니 방으로 사람들이 들어갔다 나가고 할머니와 엄마 고모들은 부엌에서 전을 부치고 육개장을 끓였다. 수육 삼는 냄새가 담벼락을 넘어가고 동네 사람들이 마당에 돗자리를 깔고 앉아 육개장에 밥을 말아먹었다. 그렇게 3일이 지났다. 우리는 왕할머니방에 얼씬도 하지 못하고 거실만 서성였다.


아이고, 어머니 어머니.


할아버지의 곡이 들리고 기다란 관이 방문으로 나왔다. 부모가 죽으면 불효자도 운다. 양쪽으로 활짝 열린 대문을 지나 집 앞에 서 있던 파란색 용달차에 관이 실렸다.


할머니의 이삿짐은 단출했다. 용달차에 꽁꽁 묶인 짐을 따라 차들이 골목을 빠져나갔다. 동생의 손을 꼭 잡고 집 안으로 들어왔다. 왕할머니가 있던 방에는 향냄새가 났다. 어수선한 방안을 들여다보니 사촌 아줌마가 손짓을 했다. 그제야 우리는 밥상 앞에 앉아 잘게 자른 수육 한 점을 입에 넣었다. 동네 아줌마들이 남은 음식을 접시에 올리며 호상이라고 했다.     


꼭두새벽부터 깨어있던 우리는 엄마, 아빠, 언니가 나간 파란 대문을 보며 울지 않으려고 애썼다. 귓속말을 하는 아줌마들의 눈치를 보며, 할머니와 엄마가 언제 오는지 대문 밖을 계속 내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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