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 나는 스님 못해요. (6)
인터넷을 하다 재미난 투표를 발견했다.
나는 다음 생에
1. 다시 엄마의 자식으로 태어난다.
2. 엄마가 내 자식으로 태어난다.
나는 이 질문에 당연하다는 듯 2번을 골랐고, 또 당연히 2번을 선택한 사람들이 더 많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하지만 결과는 1번을 선택한 사람들의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았다.
나는 다음 생에 우리가 만날 수 있다면
엄마가 내 자식으로 태어났으면 좋겠다.
그래서 내게 투정을 부렸으면 좋겠다. 내 속이 아주 많이 상하더라도 어린 당신을 안아줄 수 있는 그런 엄마의 엄마가 되고 싶다.
모두에게 그렇듯 어린아이 일 때는 부모가 세상이었다.
부모를 통해 맛있는 음식을 먹고, 신기한 체험을 하고, 옳고 그름을 배우고, 사랑과 미움을 배웠다.
나는 내가 어른이 되면 부모에게 든든한 무언가가 되는 그런 어른으로 자연스레 크는 줄 알았다.
하지만 나이가 어른이 되어서도 내게 부모는 여전히 세상이었다.
다만 어릴 때와 달라진 점이 있긴 했다.
내가 다른 인간관계 속에서 경험한 맛있는 음식을 부모와 함께 먹고 싶다. 떠올리는 것,
내가 다른 세상에서 하고 온 신기한 체험을 부모에게도 알려주고 싶다. 다짐하는 것,
옳은 줄만 알았던 부모의 세상에 그름이 있다. 생각을 곱씹어보는 것,
어릴 때보다 부모의 사랑과 미움이 이해가 되어가는 것. 그것이었다.
나는 부모에게 양가감정을 가지며 많이도 혼란스러웠다. 그 누구보다 사랑하고 그 누구보다 미웠으니까.
지금 누군가 내게 ‘무엇이 그렇게 미웠니’하고 묻는다면 가볍게 대답하고 넘기기 힘들 것 같다.
나의 부모이자 누군가의 자식이자 한 사람.
개개인의 인간이 보이기 시작했다.
야속하게도 내게 가여움이라는 마음이 생겨 버렸다.
사람들이 나와 달리 다음 생에도 다시 엄마의 자식으로 태어난다를 고른 이유가 무엇일까.
내가 그 선택을 했더라면 이유는 이랬을 것 같다.
지금의 엄마와 나의 사이가 무척 좋아서.
지금의 엄마를 무척 사랑해서.
다음 생에는 엄마에게 더 좋은 자식이 되고 싶어서. 그래도 우리 엄마 정도면 꽤 괜찮은 사람인 것 같아서.
사실 내게 있어 저 투표의 두 선택지는 모두,
어떤 위치에서 어떤 역할로 둘이 사랑할래?
하고 묻는 것처럼 느껴졌다.
내 답은
내가 엄마가 되어 자식에게 사랑을 주고, 또 받고 싶은 것이다.
자식도 자식 나름, 엄마도 엄마 나름이지만, 적어도 나에게 우리 엄마는 이번 생 한없는 엄마의 역할수행을 했다.
여리지만 굳세고, 지혜롭게 내게 길을 알려주는 물 같은 사람이었다.
비도 되어 나를 간지럽게 해 주고, 깊은 바다에 나를 빠뜨리기도 했다가 나를 수면 위로 동동 띄우는 엄마는 그런 물이었다.
얼마나 바빠.
그러니 다음 생까지 나의 물이 되어주기를 바라지 않는다. 물도 피곤하거든.
엄마, 다음 생에 내 자식으로 태어나는 건 어때? 내가 엄마만큼 엄마 역할수행 해 볼게.
스님,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는 다음 생. 저는 일단 이번 생 엄마에게 충실해야겠습니다. 엄마 곁에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