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 나는 스님 못해요. (3)
내게는 한 살 차이가 나는 여동생과 여섯 살 차이가 나는 남동생이 있다.
상상, 공상, 명상, 자기반성 등 내재적인 힘을 통해 에너지를 충전하는 나와 달리,
여동생은 조금 더 외향적으로, 남동생은 훨씬 더 외향적으로 에너지를 충전하며 인생을 살아간다.
나는 어릴 때 나와 다른 동생들의 모습에 외로움을 느끼면서도 부러웠다.
내가 좋아하는 놀이 방식을 너는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이 서운했고, 나는 어울리지 못하는 곳에 너는 어울린다는 것이 부러웠다. 하지만 이 마음은 모두 내가 기준이었다. 동생들과 함께 어울리고 싶으면 동생들이 좋아하는 놀이 방식을 선택해서 내게 큰 즐거움이 아닐지라도 어울리면 될 일이었다.
아주 쉬운 일이지만 한두 번이 아닌 계속해서 그 방식을 선택했을 때, 그때도 내가 나로서 존재한다고 할 수 있을까. 그 답은 확실히 하지 못하겠지만 가면을 벗고 나면 무척이나 허무할 것 같았다.
넓고 깊은 바다에는 고래도 있고, 상어도 있고, 해파리도 멸치도 있다. 그래도 모두가 고래만 하고 싶어 하면 어떨까. 또 모두가 상어만 하고 싶어 하면 어떨까. 또 또 모두가 고래와 상어를 하고 싶어 하는데 내가 해파리로 태어나 버렸다면 어떨까. 쟤네들은 좋겠다 하고 울면서 살아야 할까.
아니. 바다는 고래, 상어, 해파리, 멸치, 미역, 산호, 바닥에 깔린 돌 하나까지 모두가 있어야 다채로운 것이다. 외형도 습성도 모두가 다르지만 그렇기에 풍요로운 것이다.
동생들과 내가 다른 삶의 모습을 추구한다 해서 내가 그들을 따라 할 필요는 없다. 서로의 방식으로 얻게 된 것들을 알려주고, 한 번씩은 각자가 푹 빠져있는 각자의 세상을 보여주며 우리는 서로에 대해 끊을 수 없는 호기심을 불어넣어 줄 수 있는 관계가 되었다. 우리는 그렇게 살고 있다. 동생들이 나와 달라 내 세상은 더욱 풍요로워지고 있고, 그러한 사람들이 내 옆에 있다는 것이, 무엇보다 내게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준다는 것이 감사하다.
끝으로 말하지만 나는 위에 한 바다 이야기가 내 동생들에게 국한된 다짐이 아님을 알고 있다. 세상에 있는 나와 다른 모든 이들을 향한 나의 다짐인 것이다. 나는 타인을 향해 당연히 느낄 수 있는 서운함과 부러움, 나도 모르게 새어 나오는 질투심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아주 인간다운 모습이니까. 하지만 나 같은 사람이 있으면 너 같은 사람도 있어야 돌아가는 게 사회라는 것을 안다. 내가 바라는 것은 그런 마음을 가졌다가도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러 다시 돌아올 때면 그 앞에서 진심으로 행복해 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은 것이다. 나는 그러한 내가 추구하는 인간이 되기를 한 번씩 생각하곤 한다.
스님, 나는 세상의 이야기가 참 재미있어요. 이렇게나 속세를 좋아하는 사람이 어떻게 스님을 할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