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 나는 스님 못해요. (2)
나는 어려서부터 동물을 좋아했다.
내가 애정을 줬던 동물만 해도 금붕어, 열대어, 햄스터, 래트, 앵무새, 거북이, 장수풍뎅이, 무당벌레는 물론 쌀에 있는 애벌레까지 다양하기도 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웃음만 나오는 그 당시 나의 작명 센스 중 가장 이상한 하나를 공개해본다.
햄스터 부부가 세 마리의 새끼를 낳았을 때, 초등학생인 내가 지은 이름이다.
첫째는 사랑 천사. 둘째는 마음 천사, 셋째는 아기 천사.
어머머...
내게는 아직까지도 이 이름들이 기억 속에 선명하게 남아있다. 그리고 이 아이들의 모습이 선명하게 떠오른다.
이 아이들의 존재는 내가 기르던 동물들이 또 다른 생명을 탄생시켰다는 충격적인 사건 그 자체였다. 눈도 못 뜨고, 털도 없이 온몸이 붉기만 했던 새끼 햄스터들을 보고, 평상시 잘 쓰지도 않던 ‘천사’라는 단어를 붙여 이름을 지어준 까닭은 말 그대로 초등학생인 내 눈에 그 모습이 천사들로 보였기 때문일까.
그때의 내가 얼마나 행복했으면 또 얼마나 좋았으면.
참 솔직했네. 어린 나.
좋은 것들은 다 갖다 붙여주고 싶었나 보지 아마!
이 세 천사들은 눈에 띄게 새끼 티가 났다가 금세 커서 어린 햄스터 티가 났고, 또 금세 제 부모와 엇비슷한 덩치로 성체가 되었다. 나는 아이들의 어느 순간에도 여전히 거기서 거기인 초등학생이었지만 말이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나는 아이들과 작별을 했다.
이 세 천사들은 내가 길러본 동물들 중 유일하게 자신의 탄생부터 성장, 죽음까지의 모든 것을 보여 준 아이들이 되었다.
나와 함께 한 모든 동물들은 늘 사람인 나보다 평균 수명이 짧은 탓에 빨리도 떠나갔다. 정을 붙였던 동물들과의 이별은 언제나 마음이 무너지는 일이었지만, 더더욱 나를 자책하게 했던 일은 마저 먹지 못한 먹이와 남은 물그릇 등 아이의 남은 흔적을 지우는 일이었다.
나도 알고 있다. 태어나면 또 죽는 것이 자연의 이치라는 것을.
하지만 나는 보호자였기에
‘네가 적극적인 의사 표현이 없었다.’
‘네가 원하는 것이 있어도 내게 말하지 않았다.’ ‘네가 어디가 아프다고 내게 울어대지 않았다.’ 하고 불편한 마음을 떠넘길 수 없었다.
모두 내가 무지하고 무심했던 것이다.
진심으로 미안한 마음을 가져주는 것이 내가 동물들과 이별하며 할 수 있는 마지막 일이었다.
초등학생을 벗어나며 한동안 우리 집에는 어떠한 동물도 없었다. 그러던 재작년, 우리 집에 강아지 ‘우디’가 들어왔다.
나는 우디를 안고서 이곳저곳 아이의 냄새를 맡다 놀란 적이 있다.
우디에게서 아주 익숙한 사과 향이 났기 때문이다.
그 향은 내가 햄스터 가족을 키울 때 깔아주던 톱밥 베딩의 냄새였다. 나는 그 냄새로 세 천사들을 오랜만에 떠올리며 우디에게 말했다.
“뭐야, 너 다시 우리 집에 온 거야?”
그러면서 동시에 든 또 다른 생각.
‘우디 샴푸 바꾸지 말아야겠다!’ 뭐 이 정도?
호호,
나는 우디를 보면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을 다 보내고도 내가 아이를 놓지 못할까 두렵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우리가 어떤 마음을 나누어야 네가 없을 때 내가 덜 후회를 할까를 생각한다. 너의 하루하루가 뿌듯했으면 좋겠어. 잘 살아보자 우리.
스님, 저는 동식물을 보며 깨달음을 얻어 보겠습니다. 이쪽도 꽤 흥미롭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