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 나는 스님 못해요. (1)
우리 가족은 강아지 한 마리와 함께 살고 있다. 이름은 ‘우디’ 나이는 두 살. 우디는 태어난 지 7개월 차에 전 보호자의 파양으로 우리 가족에게 오게 되었다.
우디와 관련된 글을 본 시각은 새벽 4시경.
마음이 통했달까, 이 아이가 우리의 조건에 맞았달까.
모두가 잘 만한 시간에 나는 연락을 했고 기다렸다는 듯 답이 왔다.
해당 지역으로 가 아이를 만난 건 낮 12시경.
내가 너의 존재를 알게 된 지 하루도 채 지나지 않았을 시점이었다.
전 보호자와의 약속을 잡고 누운 새벽 5시.
나는 두 장 밖에 없는 그 아이의 사진을 보고 또 보며 고민에 잠겼었다.
‘이 아이의 이름은 뭐가 좋을까?’
사람에게도 이름대로 산다는 말이 있다. 그 사람 자체를 축복하고 대표할 수 있는 무언가가 되어야겠지.
우스워 보일 수도 있겠지만 이 고민은 내가 기다려온 나의 강아지에게 해 줄 수 있는 첫 번째 마음 표현이었다. 우리가 계속 불러야 하는 이름이고, 아이가 계속 불려야 하는 이름이니까.
뭐가 좋을까.
아이에게 찰떡같이 어울리는 이름을 짓고 싶었다.
아이의 관상을 보고, 털 색을 보고, 성격, 어감, 글자 수 등 나름의 깐깐한 기준을 가지고 고르고 또 고르는 밤을 보냈다.
그렇게 와닿은 이름 ‘우디’.
‘우디’라는 이름을 보고 아이의 사진을 봤을 때 이 아이는 확신의 우디였다.
가족들이 이름의 이유를 물었을 때,
“털 색이 나무색이다, 두 글자이다, 아이의 외모에 어울린다.”라고 답했지만, 그것만이 완전한 이유는 아니었다.
내가 느끼는 나무처럼 온화하게, 튼튼하게 그리고 풍요롭게 자라주렴. 단단한 뿌리로 씩씩하게 자라주렴. 말없이 영향력을 끼치는 그런 나무로 자라주렴.
이게 너를 향한 내 첫 번째 마음이다.
우디는 우리를 만난 그날 저녁부터 자신의 새 이름을 알아들었다. 총명한 녀석이다.
얼마 뒤 우리 집에 새 식구가 들어온 것을 스님께 말씀드렸다. 귀여워하실 것이란 예상과 달리 스님은 ‘전생에 죄를 많이 지으면 동물로 태어나는 것이다.’ 하시며 강아지를 좋게 보지 않으셨다. 나는 스님께서 동물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존중한다. 그러니 앞으로 서로가 이 화두를 꺼내지 않으면 되는 것이다. 이 사실로 내가 그리고 우리 가족이, 우디를 보는 시각이 달라진 것은 없다. 내게 너의 존재란 입양을 고민한 그 순간부터, 식구가 된 지금까지 한마음이다.
나는 스님 중에서도 강아지나 고양이, 또는 다른 동물들을 좋아하시는 분이 많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니 이것은 그저 개인의 선호 차이일 뿐이겠지.
일명 강아지 공장이라 불리는 장소에서 태어난 우디는 모견의 출산 환경이 열악했던 탓인지 이곳저곳 약한 부분이 많다. 수요가 있기에 공급이 있는 강아지 공장. 이는 없어져야 할 끔찍한 환경이 맞다.
나는 우디를 데려오기 전, 전 보호자에게 몇 가지 질문을 했었다. 아이를 어디에서 만났는지, 아픈 곳은 없는지. 그러자 펫 샵에서 2개월 때 데리고 왔고, 지금은 알레르기 치료 중이라고 답이 왔다. 답변을 듣고 선 튼튼한 아이를 가족으로 맞이하고 싶은 마음이 커 부질없게도 너의 이쪽저쪽을 따져보았다.
물론 잠깐 스쳐 지나간 생각이었지만.
그렇게 우디는 우리 가족의 첫 강아지가 되었다. 네가 약하다고 해서 나는 너를 탓하지 않아. 너도 견생은 처음이니까.
스님께 하지 못한 말이 있다. 내뱉는 말보다 담아놓는 말이 더 많은 까닭인지 굳이 하지 않은 말이다.
“스님, 우디는 이미 태어났어요.”
축생으로 태어난 것보다 내게 더 중요한 것은 그것이다. 우디는 이미 이 세상에 태어나 숨 쉬고 있어요.
성견이 된 지금도 4킬로 밖에 되지 않는 그 작은 몸으로 살아보려 애쓰고 있어요.
사람의 입맛대로 교배되고, 사람에게 친화적인 성격으로 태어나 사람의 눈에 들지 않으면 야생에선 이 아이가 살 수 없는 구조. 내가 아닌 그 어디서라도 사람과 함께 해야 하는 아이들. 그렇기에 나는 이미 태어나버린 우디와 함께 할 수밖에 없습니다.
시비왕과 비둘기의 이야기를 보면 생명의 무게가 얼마나 귀한 것인지를 생각할 수 있지요. 그러니 스님, 제 마음 아시겠지요?
나와 우디 그리고 아빠. 셋이 함께한 어느 저녁이었다.
나는 우디를 안고 쓰다듬으며 아빠에게 말했다. 강아지의 시간은 너무 빨리 가는 것 같다고.
길어도 15년 정도밖에 살지 못하는 이 작은 아이가 너무 가엽다고. 그러자 아빠는 답했다. 돌과 바위, 큰 나무는 몇 년을 살 것 같냐고. 천년도 사는 바위와 나무와 같은 존재가 길어도 겨우 백 년 남짓 사는 인간을 보았을 때 내가 우디에게 가지는 마음을 가질 수도 있지 않겠냐고.
그렇지. 그러면 며칠을 살다가는 곤충은 얼마나 가여운 목숨이어야 하는 것인가. 또 나는 한 이 백 년 살고 싶은 것인가. 어떻게 생각하면 살고 싶은, 또 어떻게 하면 살고 싶지 않은 골치 아픈 고민 덩어리를 아빠는 내게 던져주었다.